무신학의 탄생 - 철학, 종교와 충돌하다
미셀 옹프레 지음, 강주헌 옮김 / 모티브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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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미셀 옹프레는 프랑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다. 그는 많은 철학 관련 책을 썼는데, 도발적인 글쓰기는 그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 책 또한 매우 도발적인 내용과 문체가 동원되고 있다.

그의 기본적인 관점을 자유주의적이고 쾌락적인 유물론으로 정의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책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꼭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튼 그는 이 책을 쓴 목적을 “실질적인 내재론, 또는 유물론적 존재론의 타당성을 밝히기 위함”(23쪽)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유물론적 존재론의 타당성을 따지려 들거나 그의 유물론이 천박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그것이 어떠하든 이 책의 핵심적인 가치는 손상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전투적인 무신론자를 키워야 한다”(299쪽)는 매우 솔직한 관점에서 이 책을 쓴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는 계기”(303쪽)가 되길 바란다는 그리스도교도인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의 주요 논박 대상인 세 일신교의 성직자들까지도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의 가치를 더해주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그의 문체에서 풍기는 맛과는 조금 다른 저자의 지적 노고다. 그는 이 책을 위해 수많은 분야의 학문을 동원했다. 심리학, 정신분석학, 고고학, 고문서학, 역사학, 신화학, 미학, 경전해석학, 언어학, 철학 등의 지식이 이 책을 위해 사용되었다.

‘무신학’은 저자가 지어낸 말은 아니다. 사상가이자 소설가이도 한 조르쥬 바타유가 1950년 3월 29일 레이몽 크노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다. 그 편지에서 바타유는 출간 예정인 자신의 총서에 <무신학 전서>라는 제목을 붙이기로 했다고 썼다. 반면, ‘무신론’이라는 단어는 1532년에 처음 등장했고, ‘무신론자’라는 단어는 기원후 2세기에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쓰였다고 한다.

그러면 최초의 무신론자는 누구였을까. 일단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이에 따라 최초의 사람이 바뀔 수도 있다. 일단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역설한 사람, 그리고 이를 확신하며 분명하게 글로 남긴 사람 가운데 최초의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수도자였던 크리스토바오 페레이라를 꼽는다. 그는 1636년 <기만의 폭로>라는 책을 통해 기독교에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그리고 종교 일반의 기만성까지 까발렸다. 그는 종교가 인간이 인간에 대한 지배권을 보존하려고 만들어낸 창조물에 불과하며, 이성은 종교라는 쓰레기와 싸우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구라고 썼다.

그렇지만 기독교에서 선불교로 개종한 그는 여전히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 영성주의자였기 때문에 최초의 무신론자로 보긴 어렵다고 저자는 결론짓는다. 대신 그는 최초의 무신론자로 장 멜리에 신부(1664~1729)를 지목한다. 장 멜리에 신부가 죽고 나서 발견된 <유언>이라는 책에서 유물론적 철학과 무신론이 명확하게 역설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무신학의 목표를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세계를 지배하는 세 일신교의 해체다. 둘째는 각 종교의 성립사를 추적하여 거짓 신화를 깨뜨리는 것이다. 셋째는 신정정치의 해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며 “기독교 이후 시대를 끌어갈 진정한 도덕적 조건을 구축해야 한다”(99쪽)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모든 종교를 동등하게 평가하는 세속인 사이에 보편화된 상대주의적 관점을 일갈한다. 그는 “미신적 생각과 합리적 생각, 신화와 논리적 이야기, 기적과 과학적 사고 등이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297쪽)고 생각하는 상대주의가 오히려 폐해를 낳을 것이라며 비판한다.

그리고 이렇게 끝맺고 있다.

“세 일신교의 미신적 가르침에 맞서 계몽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탈기독교를 지향하는 세속의 세력, 즉 무신론자를 양성해야 한다. 이미 결판난 전투일 수도 있지만 세계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다시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 서구의 유대교, 기독교 사회와 그에 맞선 이슬람 사회 간의 양자택일을 과감히 거부하는 전투적인 무신론자를 키워야 한다.”(298~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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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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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의 진실성 문제는 그것의 유용성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나는 종교가 진실하지 못하다고 굳게 믿는 만큼이나 해롭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종교가 주는 해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교에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믿음의 성질에 좌우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믿어지고 있는 특정 신조들에 좌우되는 것이다. 우선 믿음의 성질에 관해 살펴보자. 여기서는, 신앙을 갖는 것, 다시 말해 반대 증거가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 반대 증거로 인해 의심이 생기면 그 증거들을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된다.

... (중략) ...

 위에서 말한 해악들은 문제시되는 특정 신조와 관계없이, 독단적으로 주장되는 모든 신조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들에는, 뚜렷한 해악을 저지르는 특정한 윤리적 교의들이 존재한다." (위의 책, 12~13쪽)

저자 서문에 있는 위의 인용문은 종교에 대한 러셀의 관점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1장에 실린 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이 책의 제목으로도 쓰였는데, 역시 그의 종교에 대한 총괄적인 관점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해주는 글이다. 이 글은 1927년 3월 6일, 전국 비종교인협회 런던 남부지부 후원하에 배터시읍 공회당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의 나머지 글들은 2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종교와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러셀의 글들을 모은 것인데, 그 주제는 무척 광범위하다. 그는 철학, 논리, 역사, 과학에 대한 탄탄한 지식을 바탕으로 무신론자이자 자유사상가로서의 자기 주장을 일관되게 펼치고 있다.

이 글들 가운데 개인적으로는 <토마스 페인의 운명>이 가장 흥미로왔다. 대략의 글들은 이미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새롭다고 느껴지는 것이 흥미로울 수밖에. 단, 러셀이 나보다 한 세기 전에 태어난 사람임에도 지금의 내 생각과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크다는 것을 느낄 때는 놀랍기도 하다.

토마스 페인을 다룬 글은 매우 압축적으로 잘 정리된 전기와 같은 글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온건한 내용이 담겼던 토마스 페인의 책 <이성의 시대>가 당대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 의해 <이성의 시대 2>가 나올법한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에 실린 러셀의 글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여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고, 여전히 우리에게 답변해야 할 문제들을 제시해 준다. 21세기의 무신론자들에게는 살아있는 고전으로 읽힐만 하다.

사족을 덧붙이면, 오타와 오역이 눈에 많이 거슬렸고, 불성실한 역자 후기는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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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
샘 해리스 지음, 박상준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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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에서도 출간된 샘 해리스의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다니엘 데닛의 <마법 부수기>와 동일한 맥락의 주장을 펼치는 책이다. 여기서 다니엘 데닛의 책은 아직 한국어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도 “나, 데닛, 도킨스, 히친스 이 네 명은 네 개의 머리를 가진 한 사람인 것처럼 공격받는다”고 말했는데, 결코 부당한(?) 공격은 아니다. 이 네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다양한 변주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그 핵심만을 파악하고 싶다면, 네 사람 모두의 책을 읽을 필요까진 없다. 한국어판이 있는 세 책 가운데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가 가장 간명한 것이니 시간을 절약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이를 권할만하다.

그렇지만 나머지 책을 읽은 사람들도 내친김에 한 번 읽어보는 것이 나쁘진 않다. 저자도 말했듯이 “이 책의 또 다른 주요한 목적은 우리 사회의 세속주의자들을 무장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 명의 기독교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이 책을 썼지만, 이 책은 사실 모든 종교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제목에 있는 ‘기독교 국가’의 의미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국가’는 현실의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매우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형성된 권력 집단의 형태로 이해할 수도 있다.

기독교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현재 명시적으로는 세속 국가이나 신정 국가를 지향하는 강력한 보수 기독교 세력이 존재한다. 그리고 미국은 이미 그 맹아들을 너무나 많이 보여주고 있다. 특정 국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기독교(기타 종교도 마찬가지)에 근거한 공동체나 집단을 향해서도 이 책은 거침없이 발언하고 있다.

대략 이 네 사람의 주장과 논리, 그 전개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으로 출발한 분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는 것도 좋겠다. 고전에 해당하는 버트란트 러쎌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와 보다 적나라한 문체로 서술된 미셀 옹프레의 <무신학의 탄생>을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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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옷을 입은 성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2
김호경 지음 / 책세상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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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안에서 성서를 대할 때와 종교 밖에서 성서를 대할 때는 분명 다르다.

중학교 1학년 때 친한 형을 따라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성당을 다니면서 구약과 신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지는 못했지만, 드문드문 읽으면서 나름 성서와 친하게 지냈다.

고등학교 때는 ‘Cell'이라는 카톨릭 학생모임도 이끌면서 매주 교구 수녀님과 함께 성경연구를 하고 학생모임에서 배운 것을 반복하며 주일 미사 시간에도 성서와 가까이 지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에게 종교 생활은 그저 폭넓은 의미의 문화 활동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성서를 전체로 이해하지 못한 채 부분을 따로 떼어내어 진실한 신앙이나 믿음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윤리적, 도덕적 지침으로 삼는다거나 문학적 텍스트를 대하듯 한 것 같다.

이후 오랫동안 성서는 내게 잊혀진 존재였다. 물론 책장에는 다양한 판본의 성서들이 늘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성서에 대한 약간의 관심은 몇 해 전 세계 종교사를 개략적으로 공부하면서 되살아났다. 꾸란은 물론 바가바드 기타, 우파니샤드까지 뒤적거려 가면서. 최근에는 적극적인 종교 비판의 관점에서 성서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이 때 길잡이를 해준 책이 있었으니 바로 <인간의 옷을 입은 성서>다. 이 책은 신약의 네 복음서를 중심으로 성서에 대한 핵심적인 이해를 돕는다. 물론 성서신학자인 자신의 관점으로. 그러나 꼭 저자의 관점에 공감해야만 이 책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보는 것은 성서와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스스로를 보수적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방법만 있다면 꼭 읽히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기독교와 담 쌓으라고 하진 않을테니 최소한 성서의 가름침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보라고.

오래전 김일성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김일성의 저작을 읽었듯이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 나는 다시 성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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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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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이 두 책은 유사점이 많다. 종교와 비판적으로 대결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공통점이자 이 두 저자의 근본적인 목표다.

도킨스는 동물행동학자이자 과학 저술가이고, 히친스는 정치학자이자 저널리스트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때문에 약간의 차이들은 발견된다. 내가 볼 때 그 대부분은 자신의 경험에 따른 문체와 스타일의 차이 정도이지만.

도킨스는 약간 점잖고 굵게 논지를 전개하고 있고, 히친스는 매우 까칠하고 날카로운 표현들을 동원하여 구석구석을 더듬는다. 예들 들면, 히친스는 도킨스가 다룬 아브라함을 시조로 하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불교를 비롯한 동방의 종교, 일본의 천황제, 북한의 김일성과 한국의 문선명(한반도의 두 '아버지')까지 친절하게 까발리고 있다.

히친스가 그의 책에서 도킨스를 언급한 부분도 약간의 차이를 암시한다. 그는 "무신론자들이 '영리한 사람'을 자처하며 우쭐거려도 된다는, 도킨스 교수와 대니얼 데넛의 비굴한 주장을 내가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도 지속적인 논쟁의 주제 중 하나이다"라고 스치듯 말했는데, 책에서 자세한 내용을 말하진 않았다.

얼마전에 한 블로거가 히친스의 책을 소개하기 위해 내가 올린 포스트에 이런 댓글을 남겼다.

"히친스라던가 도킨스 같은 포퓰리즘 학자들의 천박한 유물론적 도그마에 동조하며 무조건적으로 종교에 대한 조롱을 하는 것 ... 슬라보예 지젝이나 알랑 바디우와 같은 사상가를 좀 읽어 보시고 종교에 대한 사유를 확장하시고 좀 더 성숙한 사고를 가지세요. ... 히친스 도킨스 등의 영미 천박한 reductionists들을 보며 감탄이나 하고있다니 실망이 큽니다."

그는 자신을 무신론자이며 기독교에 비판적인 21살의 학생이라고 밝혔는데, 그건 뭐 중요한 건 아닌듯 싶다. 아무튼 그는 매우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내가 볼 때 도킨스와 히친스는 '천박한 유물론적 도그마'에 빠져있거나 '천박한 환원주의자'는 적어도 아닌 듯 싶다. 사실 이 두 사람은 종교적 도그마뿐만 아니라 유물론으로 치장된 도그마에서도 빠져나온 혹은 빠져나오길 간구하는 사람들이다.

종교에 대한 사유의 확장 문제를 떠나서라도 지젝이나 바디우, 아감벤 등의 저작들도 읽어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인정하는데, 그 저작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스스로의 경험과 이성적 사유에 근거하여 종교에 대해 발언할 권리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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