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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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의 ‘방법비판’과 가라타니 고진  

 

2001년 청년진보당이 사회당이 될 무렵, <방법비판과 정치적 맥락주의>(금민/김태호)가 사회당 당보 특별호를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습니다. “어렵다!” 예, 어려웠습니다. 20세기의 무수한 신조류 사상가들이 죄다 거명되고, <자본>을 꾸역꾸역 읽기에 급급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자본>에 대한 새로운 독법을 설명하니 어렵지 않을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외부의 반응도 썰렁했습니다. 단지 자율평론의 조정환 님 정도가 비판적 주석을 달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방법비판을 다시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만 간략하게 되짚어보려 합니다. 가라타니 고진과 겹쳐 읽는 것을 통해서. 아무튼 이 “방법비판은 칸트․헤겔․맑스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이며, 동시에 이들을 넘어서고자 했던 모든 신조류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들 대가들을 넘어서지 못했는가를 밝혀보고자 하는 작업”(위의 글)입니다. 그렇습니다. 방법비판은 이처럼 원대한 작업이며, 커다란 나침반으로 제시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것이 희미하게 잊혀지려 할 무렵 다시 상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겁니다. 

좀 길지만,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므로 다시 인용을 해봅니다. 

“Ⅳ. 방법비판과 정치적 맥락주의

방법비판은 대상에 대한 서술적 비판의 맹점(盲點)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러한 비판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확증하는 일이다. 이 확증은 그러나 서술 자체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와 같은 서술, 가능한 서술은 필연적으로 물신적일 수밖에 없고, 방법비판적 단서가 없이는 언제든지 현실옹호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자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서술이 요구되는 한에서 물신적 서술은 회피될 필요도 없으며 극복될 성격의 것도 아니다. 대상에 대한 서술을 통하여 대상을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에는 서구 형이상학의 오래된 전통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전통 - 이 좌파적․전복적 형태로 재현된다고 본다. 그래서 방법비판은 철저히 탈형이상학적이고 반(反)실체주의적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을 비판적으로 전도시키는, 이론의 외재적 장치들 - 형이상학적 전제들 -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신(神)을 통한 현실비판을 거부한다. 방법비판은 한편으로 사회의 주어진 조건하에서 그 선험적 형식원리들이 내재화하는 필연성을 인식하며, 그래서 이 원리들에 반대하는 운동들도 내재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종류의 내재성의 철학 - 20세기 좌파의 철학 - 이 간과한 문제, 모든 내재화는 현실옹호적으로 끝난다는 문제를 망각하지 않는다. 모든 비판적 서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방법비판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입장들로부터 나오는 실천철학적 결론을 - 물론 성급한 시도이겠지만 - 통속적으로 써 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정치적․실천적 맥락주의로 표현될 수 있다. 방법비판적 실천은, 어떠한 실천도 주어진 구체적 맥락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 맥락을 떠나서는 비판적 실천이 정의될 수 없다. 그러나 방법비판은 아울러 이렇게 정의된 ‘비판적 실천’이 보편적 비판으로 위장하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서술 불가능한 “보편적 비판”이 내재화하는 것을 부단히 경계하며, 언제나 “현실의 상태를 극복해 가는 운동” 그 자체이고자 한다. 방법비판은 그래서 “있는 것”(현실의 맥락)과 “없는 것”(현실의 효력논리의 수준에서는 서술 불가능한 대안사회) 사이의 긴장이며, 실천적․반성적 균형(equilibrium)이다. 방법비판적 실천은 현실의 맥락에서 출발하고, 현실의 운동 속에서 대안사회를 본다. 대안사회는 그래서 결코 역사의 목적론적 도달점이 아니며 현실 속에 부단히 생성되고 정정되어 가는 과정이다. 방법비판은 대안사회를 공간적으로 내재화하려는 시도(일국 사회주의)도, 또는 시간적으로 내재화(歷史內化)하려는 시도 - 목적론적 시간기획에 입각한 과학적 이행이론 - 도 철저히 거부한다. 방법비판은 한편으로 부단히 이러한 내재화를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루어진 내재화를 재파괴한다.”(위의 글, 강조는 인용자)

강조한 부분을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이 부분을 잘 기억하면서 역시 길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역사의 목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것은 가상입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초월론적 가상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역사의 이념이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칸트가 말하는 이념을 역사에 의미나 목적이 없다, 그런 것은 가상이라는 이유로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부정하는 이념이란 ‘구성적 이념’입니다. 역사의 의미를 조소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대부분은 일찍이 ‘구성적 이념’을 믿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고, 그와 같은 이념에 상처를 입고 시니시즘이나 니힐리즘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가 야기한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사회주의는 환상이다. ‘거대서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1980년 이후 세계자본주의의 중심부에서 포스트모던적인 지식인이 이념을 조소하고 있는 사이, 주변부나 저변부에서는 종교적 원리주의가 확대되었습니다. 적어도 거기에는 자본주의와 국가를 넘어서려는 지향과 실천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신의 나라’를 실현하기는커녕, 성직자=교회국가의 지배로 귀착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규제적 이념과 구성적 이념의 구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규제적 이념은 결코 달성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는 현상에 대한 비판으로서 계속 존재합니다.”(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도서출판 b, 2007, 188쪽. 강조는 인용자)

방법비판의 내용과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것 사이에 결론적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혀 다른 맥락에서 서로 접근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에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방법비판이 비판적으로 의거하고 있는 지적유산 가운데 하나에는 “맑스에 대한 최근의 칸트주의적 독해들 - 특히 프랑크 쿠네(Frank Kuhne)”가 들어갑니다.

방법비판은 매우 강한 어조로 일국 사회주의와 목적론적 시간기획에 따른 이행이론을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부’의 의미를 잘못 이해해선 안 됩니다. 여러 선택지가 가능한데, 그 중 이러저러한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의 ‘거부’는 ‘불가능성’의 다른 표현에 가깝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공화국으로>에서 논증합니다. 일국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은 20세기 초의 맑스주의자들도 상당수 공감했던 것이긴 하지만, 곧이은 현실 사회주의에서는 일국 사회주의의 가능성이 적극적으로 웅변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관계 속에서의 국가 형성에 주목합니다. 국가를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관계라는 현실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면, 왜 국가가 내부적인 부정만으로 지양될 수 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단 하나의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부의 부정이 전 세계에서 일거에 일어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공산주의’의 단계를 설정하는 이행이론도 목적론적 시간기획인 한에 있어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으며, 국가 간 관계와 경제적 제 관계의 세계성을 사상하고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과 유리된 형이상학적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대서사’를 떠받쳐 주었던 목적론과 구성적 이념이 현실에서 패배하고, 이처럼 철학적, 사상적으로도 유죄를 선고받자 불편한 심기를 많이 표현했습니다. 시니시즘과 니힐리즘으로 빠져들어가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방법비판은 한편으로 부단히 이러한 내재화를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루어진 내재화를 재파괴”하는 것입니다.

방법비판은 불가능성의 논증이 아닙니다. “재파괴”가 필요하다는 규제적 원리입니다. 현실을 정확히 보고, 현실 속에서 비판의 무기를 찾으며, 현실을 지양해 나가는 긴 여정에서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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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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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와 기본소득
 

앙드레 고르는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명성에 비해 그의 저작은 한국에 별로 소개된 것이 없다. 기껏해야 번역서가 최근에 두 개 나왔을 뿐이다. 

<D에게 보낸 편지> 앙드레 고르 | 임희근 역 | 학고재 | 2007.11.30 

<에콜로지카> 앙드레 고르 | 임희근 외 역 | 생각의나무 | 2008.11.26 

<D에게 보낸 편지>는 여든세 살의 철학자가 여든두 살의 아내에게 바친 절절함이 묻어나는 편지다. 그는 아내 도린이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불치병에 걸리자 1983년 이후 모든 사회 활동을 접고 아내를 간병해왔다. 

<에콜로지카>는 고르가 아내와 동반자살하기 전에 구상하여, 이미 발표된 그의 글 중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7편의 글을 자신이 직접 선별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은 고르의 저작들이 아직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사상의 진면목을 개괄할 수 있는 훌륭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여기서는 <에콜로지카> 전반을 소개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기본소득과 관련된 고르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그의 글에서 그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게 세 군데를 짚어볼 수 있다. 

“저마다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노동시간대를 조절하고, 노동을 연속적인 방식으로 혹은 불연속적인 방식으로 할지 자유롭게 정하고, 하나의 활동영역에서만 노동을 할지 혹은 여러 활동영역에서 노동을 할지를 자유롭게 정하여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2만 시간 하는 대신에 평생 사회수당을 보장받는 것, 이 모든 것은 조절과 ‘전반적 균형’을 담당하는 중앙기구, 즉 국가가 존재해야만 가능하다.”(위의 책, 109~110쪽) 

이 대목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Galilée, 1980)이라는 책의 ‘파괴적 성장과 생산적 탈성장’이란 장에 있는 것이다. 고르는 여기서 “평생 사회수당”이라는 개념은 받아들이지만, ‘2만 시간의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오늘날 순수한 형태의 ‘조건 없는 기본소득(UBI)’ 구상에 가깝다기보다는 ‘참가형 기본소득(PI)’ 구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훗날 다음과 같이 변화하게 된다. 

“생태사회적 정치는 주로, 노동시간과 상관없는(노동시간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노동 자체와도 상관없는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재분배하여 누구나 일할 수 있고 일을 좀 더 잘 하면서 덜 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 노동에서 놓여난 시간을 개개인이 그들이 선택한 활동 - 그들의 시장 의존과 직업적 혹은 행정적 책임을 줄여주고, 직접 체험된 연대의식과 사회성의 조직, 즉 상호부조, 서비스 교환, 무정형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조직을 다시 짜게끔 해줄 재화와 용역의 자가생산을 포함한 - 에 쓸 수 있는 자율성의 공간을 창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해방, 기능적으로 특화된 타율적 노동의 해방은 전체의(전체를 아우르는) 정치로서 구상되어야 한다.”(위의 책, 70쪽) 

이 글은 <액츄얼 마르크스> 12호(PUF, 1992, 주제 “생태학과 역사적 유물론”)의 ‘전문가정치와 자기제한 사이에 있는 정치적 생태학’이라는 장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노동 자체와도 상관없는 충분한 수입”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재분배와 함께 “자율성의 공간” 창출, 그리고 “타율적 노동의 해방”을 생태사회적 정치로 구상할 것을 주문한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구상이 현재의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임을 강조하면서 “전복적” 상상력을 지닐 것을 주문한다. 

“노동시간과 노동 자체를 분리하여 생계수당을 요구하는 것은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오히려 2세기 전부터 생각해오던 대로의 ‘노동’이 더는 주요 생산력이 아님을 인정하고, 경제의 통상적 척도로 주요 생산력, 즉 체험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가 투여한 시간의 양에 따라서 임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생계수당을 점진적으로, 평화롭게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안토넬라 코르사니가 이렇게 얘기했지요. “… 생계수당을 재분배 논리 안에 위치시켜서는 특히 안 되며, 자본과 노동에 바탕을 둔 부를 급진적으로 넘어서려는 전복적 논리 내에 위치시켜야 한다.” 생계수당이라는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단절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며 특히 가치형식을 띨 수 없는 부, 즉 돈과 상품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 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생계수당이 도입된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화와는 다른 통화가 될 것입니다. 지금과 동일한 기능을 갖지도 않을 것이고요. 그것은 지배목적, 힘의 목적에 쓰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만들어질 것이고, 밑으로부터 형성된 힘에 의해 나아갈 것이고, 동시에 자급생산협동조합들에 의해 추진될 것입니다. 이러한 협동조합들은 지금 느껴지는 다양한 종류의 위기들, 에너지 위기와 신용시스템 붕괴에 따른 통화위기 등의 위기 발생 상황에 대한 해결책입니다.”(위의 책, 166~167쪽) 

<카데르누스 IHV 이데이아스> 31호(Unisinos, 2005)의 ‘가치 없는 부, 부 없는 가치’라는장에 실린 이 글은 많은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우선 전통적인 노동가치론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지식경제론’을 편다. 이 부분은 다른 곳에서 따로 좀 더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노동가치론’을 ‘정보가치론’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맑스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노동가치론’에 기대기는 하지만, 이를 넘어서려 했다는 점 정도만 알아두자. 

여기서 “생계수당”은 ‘기본소득’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겠다. 고르는 안토넬라 코르사니가 이를 “재분배 논리”가 아닌 “전복적 논리” 속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적극적인 공감을 표한다. 그렇다. 기본소득은 단순히 재분배를 통해 복지를 확장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보편적 복지 실현에 대한 요구보다 더 큰 내용을 담고 있으며, 사회의 변화를 위한 다양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과 확산을 통해 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을 높이면서 그 가능성과 잠재력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여기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렇게 정의해 볼 수 있겠다. ‘임금노동형 완전고용 패러다임’에서 ‘사회적 필요노동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여기서 ‘사회적 필요노동’을 어렵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맑스의 <자본> 1권에 나오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과도 관련이 없다. 노동과 고용의 성격이 오로지 자본의 이윤 창출이라는 목적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의해 재조직되고, 사회적 필요라는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사회적 필요’를 좀 더 상세하게 정의하는 문제는 남아있다. 

기본소득의 도입과 통화의 성격 변화, 그리고 이와 연관된 협동조합의 위상 문제는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고르 또한 이 글에서 개략적인 암시만 했을 뿐이다. 아무튼 최근의 논의 가운데에는 기본소득이 협동조합을 비롯한 새로운 경제 섹터의 창출에 긍정적 효과를 미칠 것이라는 언급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사회적 협동조합운동’에 착목하고 장기 전략을 마련하려는 사회당의 입장에서는 이 기본소득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의 연결고리를 구체적으로 찾는 것이 결코 부차적인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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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는 기술의 두 종류를 구분하였습니다. 하나는 그가 "함께 즐기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 즉 자율성의 영역을 늘려주는 기술들이고, 또 하나는 그 영역을 축소하거나 없애버리는 타율적인 기술들입니다. 나는 그것들을 각각 "열린 기술"과 "잠긴 기술"이라 불렀습니다. 전화나 오늘날의 자유로운 네트워크와 소프트웨어처럼 소통, 협동, 상호작용에 도우을 주는 기술은 열린 기술입니다. 반면, "잠긴 기술"이란 사용자를 노예처럼 만들고, 그 작동을 프로그램화하고, 상품이나 용역(서비스)의 제공을 독점합니다."

-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에콜로지카>, 생각의 나무, 2008, 13쪽.

 "잠긴 기술"은 "닫힌 기술"로, '자유로운 소프트웨어'는 '자유 소프트웨어'로 번역하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아무튼, 고르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적절히 언급하고 있다. 

대다수의 컴퓨터 사용자들은 이미 MS사의 노예가 된 지 오래이며, MS사의 독점 탓에 큰 고통을 겪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대표적인 예가 인터넷 금융결제 분야다. IE(Internet Explorer) 기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공공기관마저 특정 독점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형편이다. 이와 관련된 소송이 현재 진행 중인데, 2심까지 패소한 상태다. 사회당이 다시 법적 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모색하고 있다. 

오랫동안 고군분투하고 있는 자유 소프트웨어 그룹들과 개인들이 있다. 사회당도 자유 소프트웨어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당의 정책으로 이를 채택한 것은 한국 정당에서는 아마 처음있는 일일 것이다. 

일단 사회당은 모든 업무에 오픈오피스 수트를 기본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웹 브라우저도 모질라 파이어폭스로 교체하고 있다. OS의 경우도 MS Window를 Ubuntu Linux로 교체하는 것을 추진 중이다. 

자유 소프트웨어 캠페인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동참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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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9-04-1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ganipe님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 드립니다. ^^ 저는 사회당이 여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지 전혀 몰랐는데, 님의 글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혹시 좀더 자세한 소스를 가르쳐주실 수 있을까요?

aganipe 2009-04-1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에로이카님 반갑습니다. 댓글을 이제서야 보았네요.
그런데 '자세한 소스'라 함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암튼 사회당 게시판에 정보기술국장이 쓴 '자유 소프트웨어'란 글을 링크해 둡니다.

http://sp.or.kr/sp2007/bbs/board.php?bo_table=4_1&wr_id=14847#c_14850

 

"서부의 나쁜 마녀는 자기가 소유한 하나의 민간 은행만이 있는 음울한 영지를 다스리고 있다. 이 은행은 영토내의 모든 돈을 발행하고 빌려준다. 10%의 이자를 물리고서다. 마녀는 100마녀달러를 찍어 백성들에게 빌려주고는 110마녀달러를 갚도록 한다. 백성들에게는 추가분 10마녀달러가 없으니 마녀는 장부상으로 10마녀달러를 더 발행해 마찬가지로 대출해 준다. 통화량은 이자를 충당하기 위해 계속 늘어야 하고, 그것은 결국 마녀의 개인 금고로 들어간다. 마녀는 계속 부자가 되고, 백성들은 더욱더 빚더미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마녀는 쌓아 놓은 이득을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사는 데 쓴다. 마녀는 특히 풀로 이엉을 얹은 작은 집과 가게를 좋아해서 이를 점점 더 많이 모은다. 마녀는 영지를 다스리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그들의 재정 부담을 가중시킨다.

남부의 착한 마녀 글린다는 자기 나라를 좀 더 백성들을 위한 방식으로 다스린다. 그 나라의 모든 돈은 ‘백성은행’이 발행하고 대출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운영된다. 마녀는 우선 110백성달러를 발행한다. 그 가운데 100백성달러는 10% 이자로 대출해 주고 나머지 10백성달러는 만인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계획된 사업에 써서 공동체로 흘려보낸다. 노후 연금이나 사회보장, 기반시설, 교육, 연구 및 개발 같은 것들이다. 이 110백성달러가 공동체에 유통돼 대출에 대한 이자와 원금으로 백성은행에 돌아온다. 글린다는 다시 100백성달러를 공동체에 대출해 주고 나머지 10백성달러를 공공사업에 지출한다. 두 번째 대출의 이자를 공급하면서 백성들에게 일자리와 이득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마녀는 똑같은 110백성달러를 재순환시켰을 뿐, 새 돈은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해에 태풍이 불어 닥쳐 작고 예쁜 초가집들을 부숴버린다. 백성들은 이를 다시 세우기 위한 추가적인 돈을 요구한다. 문제없다고 글린다는 말한다. 거기에 쓸 백성달러를 더 찍어 필요한 노동력과 물자를 사는 데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일어나지 않는다. 공급이 수요와 함께 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곳에서는 세금이란 것을 모르고 산다."

607~608쪽, <달러>, 엘렌 H. 브라운 지음, 이재황 옮김, AK

위의 인용문에는 브라운이 주장하는 것의 핵심이 담겨 있다. 물론 매우 극단적인 시나리오다. 그렇지만 극단적인 상상은 가능성과 현실성에 대한 탐구를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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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아이들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 손정숙 옮김 / 지식의풍경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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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일 히틀러!’ 세상이 다 아는 나치식 경례다. 세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은 나치의 역사가 64년 전 막을 내린 후 이 경례를 다시 구경하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치의 망령은 여전히 독일을 배회하고 있으며, 당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러시아에서조차 이들이 배회하고 있다.

바로 나치를 추종하는 신나치 ‘히틀러의 아이들’이 오늘도 독일과 러시아 등지에서 버젓이 활보하고 있다. 그들은 외국인 증오를 앞세워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며 ‘하일 히틀러!’를 외친다. 악몽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수전 캠벨 바톨레티가 쓴 <히틀러의 아이들>은 그 악몽의 시간을 생생히 파헤친 책이다. 

나치가 되어 간 아이들
 

이 책을 쓴 수전 캠벨 바톨레티는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과 소설, 논픽션을 써 온 작가다. 그녀가 이 책을 쓴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60여년 전 카를 페텔이 쓴 <21세 이하의 나치>라는 글 속에 나치가 “정치적 적극성을 가진 청년들에게 편승해 권력을 잡았다”는 문구를 몇 년 전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는 도서관과 박물관, 공문서 보관서 등을 다니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젊은이들과 어린이들까지 나치의 도구, 전쟁의 도구로 세뇌시키고 있었다는 무수한 증거들이 당시에 있었음에도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언론인, 정치가들의 무관심한 반응을 보고선 그녀는 깜짝 놀랐다. 과거 히틀러청소년단 활동을 했던 사람들까지 수소문해 찾아다니며 증언을 모은 그녀는 2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물로 이 책을 펴냈다. 지은이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이 책은 우리의 세계를 영영 변화시켜 놓은 12년간의 파괴적인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젊은이들이 맡았던 역할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증오와 살인,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가르쳤다는 사실로부터 새로운 이해를 끌어내려는 시도다. 결국 히틀러청소년단은 나치로 태어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나치가 되어 갔다.”(위의 책, 196쪽)

이 책은 아돌프 히틀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를 추종했던 청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다. 히틀러는 이런 청소년들을 자신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철저하게 이용했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청소년들에게서 시작하련다. 우리 나이든 이들은 기력이 소진됐다. 하지만 저 훌륭한 청소년들! 세상에 저보다 멋진 이들이 어디 있으랴. 이 모든 남성들과 소년들을 보라! 얼마나 좋은 도구인가! 이들과 함께라면, 나는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다.”(위의 책, 7쪽)

교육, 나치의 틀로 찍어내다

이렇게 해서 1926년 히틀러청소년단(Hitler Youth)이 결성되었다. 처음에는 6천여 명 정도의 단원으로 출발했다. 히틀러가 수상으로 지명된 1933년에는 단원수가 무려 230만 명에 달했다. 그 후 단원수가 급격히 늘어나 1938년에는 70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이들은 후방에서의 전쟁 지원뿐만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가서는 전투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을 도구화하는 데 있어서 히틀러가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바로 교육이었다. 이 대목에선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교과서 개정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근현대사 교과서에서부터 지금은 도덕 교과서, 사회 교과서까지 개정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정부와 뉴라이트 세력이 편향적인 교과서 개정에 열을 올리는 것은 이러한 ‘도구적 관점’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히틀러에게 교육이란 한 가지 목표밖에 없었다. 어린이들을 훌륭한 나치의 틀로 찍어내는 것이었다. 나치는 집권하자마자 ‘국립학교’라고 불리는 공립학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낡은 교과서를 던져 버리고 새 교과서를 도입했다. 오로지 나치가 승인한 사상만 가르치도록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교과 과정을 다시 썼다.”(위의 책, 49쪽)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청소년단 지도자들도 뉘른베르크에서 재판을 받았다. 최고 지도자였던 발두르 폰 시라흐는 법정에서 “신과 독일 국민 앞에 제가 유죄임을 밝힙니다. 독일 청소년들을 수백만 명을 살해한 살인자로 교육한 점에 대해 저는 유죄입니다.”라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로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법정은 히틀러청소년단 단원들은 단죄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치에 의해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에게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여주는 등 탈나치화를 위한 여러 노력들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들이 범죄적 동기를 위해 복무한 노예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나치의 세뇌 작업은 철저했다.

저항을 꿈꾼 청소년들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청소년들이 나치의 세뇌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0년 중부 독일의 모링겐에는 청소년 저항 운동가들을 수용하는 특별 강제 수용소까지 만들어졌다. 불과 열일곱의 나이였던 헬무트 휴베너는 반나치 전단을 돌린 혐의로 1942년 10월 27일 참수형에 처해졌다.

“1942년 여름, 궁지에 몰린 유대인들의 소식을 듣고 한 무리의 용감한 뮌헨 대학생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대중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들은 나치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전단지 수천여 장을 뮌헨을 비롯한 남부 독일 마을에 돌렸다. … 학생들은 스스로를 ‘백장미단’이라 칭했다. 그 백장미단을 만든 이들 가운데는 한스 숄도 있었다. 전쟁에 신물이 나고 나치의 잔혹상에 괴로워하던 한스는 터놓고 말할 용기와 한 대의 복사기를 찾아냈다.”(위의 책, 129쪽)

대학생이 되기 전 히틀러청소년단 활동에 염증을 느꼈던 한스 숄도 동료 학생 두 명과 함께 나치를 비판한 전단지를 돌린 혐의로 1943년 2월 22일 인민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곧바로 참수되었다.

백장미단은 숄 남매를 비롯한 뮌헨 대학생들이 주도한 비밀 지하 조직이었다. 그들은 1942년 6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주로 뮌헨과 독일 남부지역에서 나치에 반대하는 전단을 배포하면서 용감히 행동했다. 당시 수많은 히틀러의 아이들이 앵무새처럼 히틀러 만세를 외칠 때 그들은 꽃다운 목숨을 바쳐 저항했다.

백장미단에서 활동하다 처형당한 한스 숄과 소피 숄의 맏언니인 잉게 숄은 나치 치하에서도 저항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기억과 남아 있는 자료들을 토대로 두 동생의 일생과 백장미단의 활동을 책으로 엮었다. 그 책이 바로 70, 8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필독서처럼 여겨졌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원제 '백장미단')이다.

우리는 영원히 너를 기억할 것이다

2006년 5월 초였다. 당시 나는 핀란드 헬싱키로 가기 위해 뻬쩨르부르크 시내 중심의 간이 버스정류소로 향했다. 모스크바 기차역 건너편에 있는 그 곳에서 버스표를 끊고 나서 주변을 돌아보니 벽에 큰 글씨로 “우리는 영원히 너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고 추모사진이며 꽃들이 놓여 있었다.

마침 이 사진 속 주인공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인 두 남녀 대학생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들렀다. 그들은 간단히 묵념을 하고 우두커니 서서 비장함이 흐르는 슬픈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조심스레 다가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대학생인데 바로 그 자리에서 스킨헤드로 추정되는 극단적 인종주의자들에 의해 칼로 난자당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 청년은 반파시즘, 반인종주의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러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적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울분을 토하며 매우 격정적인 어조로 반파시스트 운동의 긴박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달 뒤인 6월 말 다시 그곳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벽에 쓰인 글씨는 거의 다 지워지고 사진이며 꽃들도 놓여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글귀는 여전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 또한 영원히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라고 마음에 새기며 자리를 떴다.

파시즘은 그렇게 도래한다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찌야> 2006년 4월 3일자 신문에 실렸던 한 반파시스트 운동가의 인터뷰 내용 중 아직도 기억하는 대목이 있다.

“1930년대 독일에서 일군의 청년들이 뮌헨의 맥주 집에서 회합을 가질 때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파시즘은 그렇게 도래했던 것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른 독일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러시아, 대부분의 가정 혹은 그 친지 가운데 히틀러와의 전쟁으로 인한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러시아에서조차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활개를 친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이, 때론 상상하지 못한 결과가 도래하는 것이 역사다. 때문에 우리는 경계를 늦출 수 없으며 촉수를 곤두세워야 한다. 그것만이 히틀러의 아이들을 다시 만나지 않을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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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juhee 2009-01-2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