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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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주의자들은 1793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과격파’들처럼 전 지구적인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 억눌린 분노를 밖으로 표출시키고, 민주적인 집단 저항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것이야말로 이들이 할 일이다. 그리하여 세계가 바로 서도록, 다시 말해서 머리는 위를 향하고 다리는 아래를 향하도록 잡아주어야 한다. 시장의 손이라는 보이지 않는 족쇄를 부숴야 한다. 경제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경제란 그저 한낱 도구에 불과하므로, 인류 공동의 행복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 15쪽)

오늘날 이처럼 거리낌 없이 혁명을 선동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장 지글러(Jean Ziegler)다. 저명한 기아문제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는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오랫동안 일했으며, 지금은 유엔 인권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거리낌 없이 혁명을 선동하는 사람

그렇다. 그는 무슨 혁명조직의 활동가도 아니다. 그런 그가 왜 ‘과격파’들처럼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그가 목격한 참혹한 현실이 바로 이러한 결론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이념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로부터 그의 진단과 처방이 나온 것이기에 그의 선동은 너무도 힘이 넘친다.

“나는 노동조합 지도자가 아니며, 인민해방전선을 이끄는 리더도 아니다. 그저 제한적인 영향력을 가진 한 명이 지식인일 뿐이다. 나의 책은 내가 돌아다니며 목격한 세계에 대한 나의 진단을 제시한다.”(위의 책, 332쪽)

그는 도대체 어떤 현실을 목격한 것일까. 그리고 어떤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은 것일까. 바로 기아와 부채로부터 발생하는 지구적 규모의 경제적 살인이다.

“오늘날 인류가 처한 비참함의 정도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참담하다. 5세 미만의 어린아이들 중에서 1천만 명 이상이 해마다 영양 결핍이나 각종 전염병, 오염된 식수,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이들 중에서 50퍼센트는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6개국에서 발생한다. 희생자들의 90퍼센트가 남반구 국가들의 42퍼센트에 집중되어 있다. 이 아이들의 생명은 재화의 객관적인 결핍이 아니라, 재화의 공평하지 못한 분배, 다시 말해 인위적인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위의 책, 35쪽)

“2006년 북반구 선진 산업 국가들이 제3세계 122개국의 개발을 위해 지원한 돈은 580억 달러였다. 같은 해 제3세계 122개국은 부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환 명목으로 북반구 은행에 포진한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에게 5,010억 달러를 지급했다. 오늘날의 세계 질서 속에서 부채는 그 자체로 구조적 폭력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위의 책, 79쪽)

인위적 결핍에서 비롯된 ‘기아’와 구조적 폭력인 ‘부채’

지구상에서 현재 5초마다 10세 미만 어린이 한 명이 기아 또는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2007년 한 해 기아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같은 해 일어난 모든 전쟁의 사망자를 더한 수보다 많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리고 제3세계 국가들의 감당키 힘든 막대한 부채는 기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들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그는 기아와 부채로 인한 끔찍한 현실을 고발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원인을 파헤친다.

“부채와 기아, 기아와 부채. 악순환을 거듭하는 이 두 가지의 조합에는 출구가 없어 보인다. 도대체 누가 이와 같은 살인적인 조합을 만들어냈는가? 누가 이와 같은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려 하는가? 이와 같은 교착 상태를 이용해서 천문학적인 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위의 책, 247쪽)

그는 이 질문에 단호하게 답한다. 바로 ‘자본주의가 낳은 봉건주의자들’이 그 원흉이라고. 다시 말해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범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의 첨병인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를 실명을 밝혀가며 놀랍도록 생생하게 고발한다. 네슬레, 몬산토, 노바티스, 다우케미컬, 지멘스, 나이키 등이 대표적인 제물이 되었다.

제3세계의 막대한 부채 문제, 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아와 빈곤의 실태를 이 책보다 더 생생하게 고발한 책, 지구적 책임과 지구적 연대를 이보다 더 절절하게 호소한 책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줄줄이 고발당한 거대 다국적 기업들

그는 저자후기에서 부채와 기아라는 두 개의 강력한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자고 다시 한 번 직접적이고 강력한 선동을 한다. 그렇다. 이스라엘 군대에 의한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만 학살이 아니다. 부채와 기아로 인한 지구적 규모의 경제적 학살을 우리의 시야에 넣어야 한다.

“기아는 절대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다. 기아로 죽은 어린아이는 살해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편성된 세계의 경제, 사회 정치적 질서는 살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부조리 그 자체다.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는 살인적일 뿐 아니라 아무런 정당한 필요도 없이 살인을 자행하고 있다. 그 같은 질서는 뿌리 뽑아야 마땅하다. 나는 이 책이 그와 같은 투쟁을 위한 무기가 되기를 소망한다.”(위의 책, 342쪽)

그런데 그의 이러한 선동은 귓가를 스치는 거리의 확성기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으로부터의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그 비밀은 바로 ‘출생의 우연’이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 예정이나 필연이 아닌 우연에 불과했다는 것을 한 번만이라도 상기한다면, 기아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시급히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어떻게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출생의 우연이라는 요소를 제외한다면, 나와 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갈라놓을 다른 요소들이란 전혀 없다.”(위의 책, 331쪽)  

그는 기아와 부채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절박함, 정당성, 가능성, 그리고 투쟁의 수단들을 이 책에 담았지만, 그 결과를 무작정 낙관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한 확신 하나를 갖고 있다.
 

“투쟁의 결과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도 있다. 일찍이 파블로 네루다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꽃이란 꽃은 모조리 꺾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결코 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위의 책, 344쪽)
 
국방부가 좀 나서서 널리 읽혔으면
 

감히 이 책을 지구상에서 가장 불온한 새 책이라 말하고 싶다. 그는 지구를 누비며 겪은 직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지구상의 모든 시장 지상주의자들을 향해 거침없는 일격을 날리고, 일국을 넘어선 지구적 규모의 변혁을 촉구하고 있다. 무엇이 이보다 더 불온할 수 있겠는가.

국방부가 이왕이면 이 책도 ‘불온서적’ 목록에 꼭 넣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좀 더 널리 읽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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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과 존스의 또 한 가지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탁월한 의사소통 능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다윈은 거의 2,000명의 사람들과 평생 수만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커뮤니케이터였다.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은 '다윈 서신 프로젝트Darwin Correspondence Project'라는 이름으로 현재 남아있는 편지 14,500통을 분류하고 엮어서 선집을 내고 온라인으로도 그 내용을 공개하고 있다.

(http://www.darwinproject.ac.uk/)

다윈이 5년간의 비글호 탐험 이후 고향 집에 침거하며 여생을 보내면서 가장 열심히 한 일 중 하나는 서신 교환이었다. 그는  찰스 라이엘, 토마스 혁슬리,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비둘기 사육사, 농장 일꾼, 무명의 탐험가처럼 알려지지 않은 보통 사람들과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다윈 서신 프로젝트'는 다윈 사상의 궤적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 사회의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종의 기원>이 일일 노동자의 주머니도 노릴 만큼 접근 가능한 책이 되었던 것도 어쩌면 다윈의 이런 커뮤니케이션 능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 스티브 존스 지음, 김혜원 옮김, 장대익 감수, <진화하는 진화론>, 13쪽. 

 

다윈의 이러한 적극적인 소통 능력은 그의 평범함 속에서도 훌륭한 학문적 업적이 싹틀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물론 이것 만으로 그의 업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는 보통 사람 이상으로 무척 집요한 사람이었고 끈기가 남달랐다. 

그는 죽기 1년 전까지 지렁이를 연구해 <지렁이의 작용에 의한 식생 토양 형성>(1881)이란 책을 내놓았고, 비글호를 타고 5년간 수집한 자료를 20년 동안이나 분류하고 분석했으며, 따개비 연구에만 8년을 공들여 천 여쪽의 연구서를 남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것은 20년 동안이나 그의 비밀 노트에 잠자고 있었던 '자연선택 이론'이다. 물론 지질학적 시간대에 걸친 그의 연구에 비하면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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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민주주의 -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
콜린 크라우치 지음, 이한 옮김 / 미지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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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누군가가 던진다면 당신의 대답은?

물론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그리고 정치적 관점에 따라 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답을 할 것만 같다. 이 질문에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콜린 크라우치는 명쾌한 답을 내린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우리는 지금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 ‘포스트산업’ 등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단어가 되었지만, ‘포스트민주주의’라니? 이 표현은 도대체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걸까. 2004년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처음 출간되었고, 최근에야 한국어로 출간된 <포스트민주주의>(이 한 옮김, 미지북스, 2008)의 저자 크라우치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가 오직 두 개념, 즉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 개념만 갖고 있다면 민주주의의 건강에 대한 논의를 그리 진전시킬 수 없을 것이다. 포스트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민주주의 시기 이후 지루함, 좌절, 환멸이 발생한 상황, 강력한 소수 집단이 정치 시스템이 자신들을 위해 작동하도록 다수인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상황, 정치 계급이 대중의 요구를 관리하고 조작할 줄 알게 된 상황, 하향식 공공 캠페인을 진행하여 사람들이 투표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상황을 기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같은 상황은 비민주주의non-democracy의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가 민주주의의 포물선을 따라 도달하게 된 현 시기를 묘사해준다.”(32쪽)

포스트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기한 저자는 이 개념이 현 시기 민주주의의 특징을 보다 분명하게 서술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저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포물선의 특징을 끌어오는데, 둥근 모자를 생각하면 쉽다. 앞에서 볼 때 둥근 모자의 천정은 민주주의가 활성화된 시기였고, 왼쪽 아래는 민주주의 이전의 시기, 오른쪽 아래는 포스트민주주의 시기라고 보면 된다.

민주주의 이전, 민주주의, 포스트민주주의로 향하는 포물선

여기서 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이 포물선은 불연속이 아닌 연속을 이루는 곡선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저자는 “포스트민주주의 시기는 민주주의 시기의 특징과 민주주의 이전 시기의 특징이 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포스트민주주의의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다.”(127쪽)고 설명한다.

이상이 다소 개념적인 설명이었다면, 저자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좀 더 직설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여론을 조작하는 기법과 정치를 감시하도록 열어두는 기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교해진 반면, 정당 정책안의 내용과, 정당 간 경쟁의 성격은 그 어느 때보다 진부하고 활기가 없다. 이런 종류의 정치를 비민주적이거나 반민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민주주의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시민들이 조작되고, 수동적이며 공공 사안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 축소된 역할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35쪽)

한마디로, 비민주적 혹은 반민주적이라고 정의하기도 어렵지만,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도 없는 현재의 상태를 포스트민주주의로 명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스트민주주의 시대를 추동한 힘은 무엇일까. 저자는 “오늘날 포스트민주주의의 원인이 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경제적 세계화다.”(47쪽)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경제적 세계화’는 다른 말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고 할 수도 있다.

‘경제적 세계화’가 포스트민주주의를 추동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스트민주주의 하에서 일어난 일들의 결과는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많은 나라들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 보였다고 한다.

“복지 국가는 차츰 잔여화됐다. 시민의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수혜 요건을 갖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으로 바뀐 것이다. 노동조합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국가 기능은 야경 국가의 성격으로 두드러지게 회귀했다. 빈부 격차는 커지고 있다. 세금의 재분배 기능은 줄어들었다. 정치가는 한 줌도 안 되는 기업가들의 관심사에만 주로 반응하고, 기업가의 특수 이익이 공공 정책으로 둔갑한다.”(37쪽)

저자는 또한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다국적 기업이 국가와 세계를 좌우하는 핵심 제도가 되었으며, 이것의 영향 하에 새로운 지배 계급이 구성되고 있다고 본다. 아무튼 이는 원점으로의 회귀는 아닐지언정 기존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정부가 지식과 전문성을 점점 더 기업 경영진과 지도층에 의존하게 되고, 정당이 그들로부터 자금의 많은 부분을 충당하게 되면서, 새로운 지배 계급, 정치와 경제 모두 장악한 계급이 구축된 사회로 우리는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 새 지배 계급은 사회가 점점 더 불평등해짐에 따라 사회 경제적 권력과 부를 더 많이 가지게 됐을 뿐만 아니라 특권적인 정치적 역할마저 획득했다. 이것이 21세기 초 민주주의 위기의 핵심이다.”(84쪽)

제도가 된 다국적 기업과 새로운 지배 계급

저자는 또한 현대 정치에서 민주주의가 쇠락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기업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과 나머지 모든 집단 사이에서 나타난 커다란 힘의 불균형”(173쪽)으로 간명하게 정의한다.

이러한 불균형이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지만, 저자는 비관주의를 설파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의지의 낙관주의를 펼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여성주의와 생태주의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의 활성화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이미 엿보았다. 그러한 탐색이 보다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다음과 같은 실천에 매진할 수 있다면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정치가 포스트민주주의를 향해 냉혹하게 미끄러져 가는 것을 멈추기 위한 실천은 여전히 가능하고, 다음의 세 가지 수준에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업 엘리트의 커져가는 지배력을 제어하는 정책, 둘째, 정치적 관행 자체를 개혁하는 정책, 셋째, 현 상황을 바꾸는 데 관심 있는 시민들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는 행동.”(173쪽)

저자는 보다 실천적인 쟁점으로 논의를 이끌기도 한다. 그 쟁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정당과 사회 운동 사이의 관계 문제다. 이 문제는 올해 촛불 정국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뜨거운 감자였다.

정당과 운동 사이의 긴장과 협력

“정당은 포스트민주주의의 반평등주의적인 경향을 피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꼭 필요한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정당을 통해서 우리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에 안주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정당 밖에서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사회 운동 단체에 힘을 보태면서 정당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184쪽)

저자는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유럽의 중도 좌파 정당들이 그 자체로는 가망이 없기 때문에 사회 운동과 시민들의 직접 행동이 보다 강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맥락에서 이러한 주장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당이 꼭 중도 좌파 정당들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좌파 정당들 또한 이를 유념해야 한다. 정당과 사회 운동 사이에는 늘 일정한 긴장 관계가 있기 마련이고, 이를 조화롭게 풀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수의 좌파 정당들은 제도 정치의 높은 진입 장벽 탓에 운동 정치에 머물고 있는 수준이고 ‘사회 운동적 정당’의 형태에 가까워 그러한 긴장이 아직까지 그리 크진 않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기업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비롯한 다양한 수단들의 개발, 정당과 운동 사이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양자 사이의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시민들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 민주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 줄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정체성 집단의 조직화 등을 강조하고 있다.

포스트민주주의로부터 벗어나기

국민이 선출한 정부의 반反국민성이 드러나고 있는 역설이 바로 포스트민주주의의 적나라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이는 사회 민주주의의 퇴조 이후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사적 시대 규정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이명박 정부 시대를 가장 잘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은 보편적 복지의 경험 등 사회권 보장 문제에 있어서 유럽처럼 사회 민주주의의 기본적 특징조차 경험한 바가 없기 때문에 포스트민주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더욱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할 지 모른다.

민주주의의 포물선 끝이 무저갱으로 내달릴 지, 아니면 방향전환의 변곡점을 지날 지는 결국 대중들의 행동과 정치적 의지의 결집 여하에 달려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 정치의 특징을 포스트민주주의로 개념화하는 것의 실천적 함의는 바로 이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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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일레인 페이절스 지음, 하연희 옮김 / 루비박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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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신약성경의 역사, 초기 기독교 교회사, 성경 사본학의 거장인 바트 어만이 쓴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은 20세기 중반에 발굴된 나그함마디 문서 등의 다양한 외경서들을 꼼꼼하게 살피면서 초기 기독교의 다양성을 폭넓게 서술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오늘날 정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독교가 어떻게 다양한 기독교들과 겨뤘으며, 어떻게 승리하게 되었는지를 밝힌다. 초기의 다양한 기독교들 가운데는 에비온파, 마르시온파, 영지주의파가 주요하게 언급되는데, 이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영지주의파다.
 
영지주의가 대체 어떤 것이었기에 정통파 기독교와 자웅을 겨뤘던 것일까. 바트 어만의 책에서도 그 해답은 어느 정도 제시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레인 페이절스가 쓴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는 단비와 같은 존재다. 명쾌하고 깔끔한 서술에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 흥미로움은 1945년 12월 이집트 남부 지방의 한 농부에 의한 놀라운 고고학적 발견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직접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이 영지주의 문서들에 접근해 파피루스에 쓰인 필사본 원본의 일부를 옮겨 쓰는 작업에도 참여했고, 편집 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기 때문에 이 문서들에 대한 느낌을 매우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영지주의의 핵심 문서들이 포함된 나그함마디 문서를 정통파 기독교 문서와 비교해보면, 정치와 종교가 기독교의 발전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저자는 이를 통해 기독교의 기원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초기 기독교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논란을 재조명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 질문, 종교적 권위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에 대한 탐구는 오래된 그 질문, 그러나 오랫동안 억압되어 온 그 질문을 다시 던져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블레이크, 렘브란트,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니체 등. 영지주의를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제도화된 정통파 교회에 의문을 제기하고 순응을 거부했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과 거부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아니 의문과 거부는 더욱 커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최근에 흥미로운 기사거리가 하나 있었다. 로마 교황청이 '신성모독'을 저지른 존 레넌을 42년만에 용서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존 레넌은 교황청을 용서해 주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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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방임주의와 부패정치는 이후 투기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변수들인데, 1980년대 일본의 '버블경제'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버블이 끝나고 경제가 공황에 이르게 되면 정치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미래를 보는 눈이 없는 주식꾼들과 주식회사 발기인들의 이기주의 폐악이 드러나기 때문에 자유방임주의는 '주식시장과 무역에 일정한 규제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변한다.

- 에드워드 챈슬러 지음, 강남규 옮김, <금융투기의 역사>, 국일증권경제연구소, 2001, 99쪽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장에 대한 각국 정부의 규제와 개입 흐름도 이와 동일한 배경을 갖고 있다. 이는 역사상 수없이 반복되었던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금 어떤 특정한 패러다임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이 성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지와 바람으로 그러한 전환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말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실제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패러다임을 대체할 현실적 대안의 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2.
인류 역사상 최초의 투기는 기원전 2세기 로마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로마에는 현대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과 비슷한 여러 제도들이 도입되어 있었다. 로마법이 자유로운 자산이전을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은 번성하였고, 돈은 이자를 받고 자유롭게 대출되고 있었다. 외환거래가 등장하였고 은행이 발행한 환어음을 통해 로마 국경 너머까지 자금결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후 네널란드 암스테르담, 영국 런던, 미국 뉴욕이 세계 자본의 중심지였던 것처럼 로마는 당시 금융의 중심지였다. 모든 자본이 로마에 집중된 것이다. 신용이라는 개념이 이미 출현하였고, 선박 등 재산의 안전을 위해 원시적이지만 보험이라는 개념도 등장하였다.

- 위의 책, 25~26쪽

20세기 후반 개발된 각종 최첨단 금융기법들도 완전히 새로운 기법은 아니다. 이미 옛날부터 존재했던 금융기법들이 세련된 형태로 발전했을 뿐이다. 17세기에 암스테르담과 런던에서도 각종 파생상품이 헤지와 투기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또 가치에 대한 최신개념들이 고안되었다.

- 위의 책, 99쪽

투자자들의 인식과 행태가 지난 3세기 동안 크게 바뀌지 않았다면 투기의 성격과 발전패턴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1690년대 투자자들의 보물인양회사 등과 같은 기업들에 광적인 관심을 보였듯이, 현대 투자자들도 새로운 기술을 보유한 회사의 주식에 대한 투기열풍에 쉽게 휩싸일 수 있다. 금융저널리스트이면서 역사가였던 제임스 그랜트는 "과학과 기술은 크게 진보했지만, 금융은 반복된다"고 말했다.

- 위의 책,100쪽

이러한 역사적 패턴의 종식은 '인간의 역사'에서 과연 가능한 일일까. 물론 인간학적 질문으로 회귀하려는 것은 아니다. 90년대를 보내면서 기존에 교과서처럼 배웠던 단계론적 경제사에 깊은 회의가 들었다. 그 첫번째 계기는 <녹색세계사>를 통해서였고, 두번째 계기는 로마사를 통해 화폐와 금융의 역사를 돌아보면서였다. 그러나 아직 의문부호들만 늘어나고 있을 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것은 없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평생을 다 걸어야만 가능한 엄청난 작업일 것이다. 이런 큰 욕심을 내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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