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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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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의 ‘방법비판’과 가라타니 고진  

 

2001년 청년진보당이 사회당이 될 무렵, <방법비판과 정치적 맥락주의>(금민/김태호)가 사회당 당보 특별호를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습니다. “어렵다!” 예, 어려웠습니다. 20세기의 무수한 신조류 사상가들이 죄다 거명되고, <자본>을 꾸역꾸역 읽기에 급급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자본>에 대한 새로운 독법을 설명하니 어렵지 않을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외부의 반응도 썰렁했습니다. 단지 자율평론의 조정환 님 정도가 비판적 주석을 달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방법비판을 다시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만 간략하게 되짚어보려 합니다. 가라타니 고진과 겹쳐 읽는 것을 통해서. 아무튼 이 “방법비판은 칸트․헤겔․맑스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이며, 동시에 이들을 넘어서고자 했던 모든 신조류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들 대가들을 넘어서지 못했는가를 밝혀보고자 하는 작업”(위의 글)입니다. 그렇습니다. 방법비판은 이처럼 원대한 작업이며, 커다란 나침반으로 제시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것이 희미하게 잊혀지려 할 무렵 다시 상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겁니다. 

좀 길지만,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므로 다시 인용을 해봅니다. 

“Ⅳ. 방법비판과 정치적 맥락주의

방법비판은 대상에 대한 서술적 비판의 맹점(盲點)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러한 비판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확증하는 일이다. 이 확증은 그러나 서술 자체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와 같은 서술, 가능한 서술은 필연적으로 물신적일 수밖에 없고, 방법비판적 단서가 없이는 언제든지 현실옹호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자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서술이 요구되는 한에서 물신적 서술은 회피될 필요도 없으며 극복될 성격의 것도 아니다. 대상에 대한 서술을 통하여 대상을 비판하고자 하는 시도에는 서구 형이상학의 오래된 전통 -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전통 - 이 좌파적․전복적 형태로 재현된다고 본다. 그래서 방법비판은 철저히 탈형이상학적이고 반(反)실체주의적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을 비판적으로 전도시키는, 이론의 외재적 장치들 - 형이상학적 전제들 -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신(神)을 통한 현실비판을 거부한다. 방법비판은 한편으로 사회의 주어진 조건하에서 그 선험적 형식원리들이 내재화하는 필연성을 인식하며, 그래서 이 원리들에 반대하는 운동들도 내재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종류의 내재성의 철학 - 20세기 좌파의 철학 - 이 간과한 문제, 모든 내재화는 현실옹호적으로 끝난다는 문제를 망각하지 않는다. 모든 비판적 서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방법비판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입장들로부터 나오는 실천철학적 결론을 - 물론 성급한 시도이겠지만 - 통속적으로 써 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정치적․실천적 맥락주의로 표현될 수 있다. 방법비판적 실천은, 어떠한 실천도 주어진 구체적 맥락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 맥락을 떠나서는 비판적 실천이 정의될 수 없다. 그러나 방법비판은 아울러 이렇게 정의된 ‘비판적 실천’이 보편적 비판으로 위장하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서술 불가능한 “보편적 비판”이 내재화하는 것을 부단히 경계하며, 언제나 “현실의 상태를 극복해 가는 운동” 그 자체이고자 한다. 방법비판은 그래서 “있는 것”(현실의 맥락)과 “없는 것”(현실의 효력논리의 수준에서는 서술 불가능한 대안사회) 사이의 긴장이며, 실천적․반성적 균형(equilibrium)이다. 방법비판적 실천은 현실의 맥락에서 출발하고, 현실의 운동 속에서 대안사회를 본다. 대안사회는 그래서 결코 역사의 목적론적 도달점이 아니며 현실 속에 부단히 생성되고 정정되어 가는 과정이다. 방법비판은 대안사회를 공간적으로 내재화하려는 시도(일국 사회주의)도, 또는 시간적으로 내재화(歷史內化)하려는 시도 - 목적론적 시간기획에 입각한 과학적 이행이론 - 도 철저히 거부한다. 방법비판은 한편으로 부단히 이러한 내재화를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루어진 내재화를 재파괴한다.”(위의 글, 강조는 인용자)

강조한 부분을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이 부분을 잘 기억하면서 역시 길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역사의 목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것은 가상입니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초월론적 가상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역사의 이념이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칸트가 말하는 이념을 역사에 의미나 목적이 없다, 그런 것은 가상이라는 이유로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부정하는 이념이란 ‘구성적 이념’입니다. 역사의 의미를 조소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대부분은 일찍이 ‘구성적 이념’을 믿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고, 그와 같은 이념에 상처를 입고 시니시즘이나 니힐리즘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자본주의가 야기한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사회주의는 환상이다. ‘거대서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1980년 이후 세계자본주의의 중심부에서 포스트모던적인 지식인이 이념을 조소하고 있는 사이, 주변부나 저변부에서는 종교적 원리주의가 확대되었습니다. 적어도 거기에는 자본주의와 국가를 넘어서려는 지향과 실천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신의 나라’를 실현하기는커녕, 성직자=교회국가의 지배로 귀착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규제적 이념과 구성적 이념의 구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규제적 이념은 결코 달성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는 현상에 대한 비판으로서 계속 존재합니다.”(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도서출판 b, 2007, 188쪽. 강조는 인용자)

방법비판의 내용과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것 사이에 결론적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혀 다른 맥락에서 서로 접근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에 많이 기대고 있습니다. 방법비판이 비판적으로 의거하고 있는 지적유산 가운데 하나에는 “맑스에 대한 최근의 칸트주의적 독해들 - 특히 프랑크 쿠네(Frank Kuhne)”가 들어갑니다.

방법비판은 매우 강한 어조로 일국 사회주의와 목적론적 시간기획에 따른 이행이론을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부’의 의미를 잘못 이해해선 안 됩니다. 여러 선택지가 가능한데, 그 중 이러저러한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의 ‘거부’는 ‘불가능성’의 다른 표현에 가깝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공화국으로>에서 논증합니다. 일국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은 20세기 초의 맑스주의자들도 상당수 공감했던 것이긴 하지만, 곧이은 현실 사회주의에서는 일국 사회주의의 가능성이 적극적으로 웅변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관계 속에서의 국가 형성에 주목합니다. 국가를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관계라는 현실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면, 왜 국가가 내부적인 부정만으로 지양될 수 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단 하나의 가능성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부의 부정이 전 세계에서 일거에 일어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공산주의’의 단계를 설정하는 이행이론도 목적론적 시간기획인 한에 있어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으며, 국가 간 관계와 경제적 제 관계의 세계성을 사상하고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과 유리된 형이상학적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대서사’를 떠받쳐 주었던 목적론과 구성적 이념이 현실에서 패배하고, 이처럼 철학적, 사상적으로도 유죄를 선고받자 불편한 심기를 많이 표현했습니다. 시니시즘과 니힐리즘으로 빠져들어가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방법비판은 한편으로 부단히 이러한 내재화를 시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루어진 내재화를 재파괴”하는 것입니다.

방법비판은 불가능성의 논증이 아닙니다. “재파괴”가 필요하다는 규제적 원리입니다. 현실을 정확히 보고, 현실 속에서 비판의 무기를 찾으며, 현실을 지양해 나가는 긴 여정에서 나침반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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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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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와 기본소득
 

앙드레 고르는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명성에 비해 그의 저작은 한국에 별로 소개된 것이 없다. 기껏해야 번역서가 최근에 두 개 나왔을 뿐이다. 

<D에게 보낸 편지> 앙드레 고르 | 임희근 역 | 학고재 | 2007.11.30 

<에콜로지카> 앙드레 고르 | 임희근 외 역 | 생각의나무 | 2008.11.26 

<D에게 보낸 편지>는 여든세 살의 철학자가 여든두 살의 아내에게 바친 절절함이 묻어나는 편지다. 그는 아내 도린이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불치병에 걸리자 1983년 이후 모든 사회 활동을 접고 아내를 간병해왔다. 

<에콜로지카>는 고르가 아내와 동반자살하기 전에 구상하여, 이미 발표된 그의 글 중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7편의 글을 자신이 직접 선별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은 고르의 저작들이 아직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사상의 진면목을 개괄할 수 있는 훌륭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여기서는 <에콜로지카> 전반을 소개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기본소득과 관련된 고르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그의 글에서 그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게 세 군데를 짚어볼 수 있다. 

“저마다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노동시간대를 조절하고, 노동을 연속적인 방식으로 혹은 불연속적인 방식으로 할지 자유롭게 정하고, 하나의 활동영역에서만 노동을 할지 혹은 여러 활동영역에서 노동을 할지를 자유롭게 정하여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2만 시간 하는 대신에 평생 사회수당을 보장받는 것, 이 모든 것은 조절과 ‘전반적 균형’을 담당하는 중앙기구, 즉 국가가 존재해야만 가능하다.”(위의 책, 109~110쪽) 

이 대목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Galilée, 1980)이라는 책의 ‘파괴적 성장과 생산적 탈성장’이란 장에 있는 것이다. 고르는 여기서 “평생 사회수당”이라는 개념은 받아들이지만, ‘2만 시간의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오늘날 순수한 형태의 ‘조건 없는 기본소득(UBI)’ 구상에 가깝다기보다는 ‘참가형 기본소득(PI)’ 구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훗날 다음과 같이 변화하게 된다. 

“생태사회적 정치는 주로, 노동시간과 상관없는(노동시간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노동 자체와도 상관없는 충분한 수입을 보장해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재분배하여 누구나 일할 수 있고 일을 좀 더 잘 하면서 덜 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 노동에서 놓여난 시간을 개개인이 그들이 선택한 활동 - 그들의 시장 의존과 직업적 혹은 행정적 책임을 줄여주고, 직접 체험된 연대의식과 사회성의 조직, 즉 상호부조, 서비스 교환, 무정형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조직을 다시 짜게끔 해줄 재화와 용역의 자가생산을 포함한 - 에 쓸 수 있는 자율성의 공간을 창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해방, 기능적으로 특화된 타율적 노동의 해방은 전체의(전체를 아우르는) 정치로서 구상되어야 한다.”(위의 책, 70쪽) 

이 글은 <액츄얼 마르크스> 12호(PUF, 1992, 주제 “생태학과 역사적 유물론”)의 ‘전문가정치와 자기제한 사이에 있는 정치적 생태학’이라는 장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노동 자체와도 상관없는 충분한 수입”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재분배와 함께 “자율성의 공간” 창출, 그리고 “타율적 노동의 해방”을 생태사회적 정치로 구상할 것을 주문한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구상이 현재의 사회적, 경제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임을 강조하면서 “전복적” 상상력을 지닐 것을 주문한다. 

“노동시간과 노동 자체를 분리하여 생계수당을 요구하는 것은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오히려 2세기 전부터 생각해오던 대로의 ‘노동’이 더는 주요 생산력이 아님을 인정하고, 경제의 통상적 척도로 주요 생산력, 즉 체험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가 투여한 시간의 양에 따라서 임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생계수당을 점진적으로, 평화롭게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안토넬라 코르사니가 이렇게 얘기했지요. “… 생계수당을 재분배 논리 안에 위치시켜서는 특히 안 되며, 자본과 노동에 바탕을 둔 부를 급진적으로 넘어서려는 전복적 논리 내에 위치시켜야 한다.” 생계수당이라는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단절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며 특히 가치형식을 띨 수 없는 부, 즉 돈과 상품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 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생계수당이 도입된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화와는 다른 통화가 될 것입니다. 지금과 동일한 기능을 갖지도 않을 것이고요. 그것은 지배목적, 힘의 목적에 쓰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만들어질 것이고, 밑으로부터 형성된 힘에 의해 나아갈 것이고, 동시에 자급생산협동조합들에 의해 추진될 것입니다. 이러한 협동조합들은 지금 느껴지는 다양한 종류의 위기들, 에너지 위기와 신용시스템 붕괴에 따른 통화위기 등의 위기 발생 상황에 대한 해결책입니다.”(위의 책, 166~167쪽) 

<카데르누스 IHV 이데이아스> 31호(Unisinos, 2005)의 ‘가치 없는 부, 부 없는 가치’라는장에 실린 이 글은 많은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우선 전통적인 노동가치론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지식경제론’을 편다. 이 부분은 다른 곳에서 따로 좀 더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노동가치론’을 ‘정보가치론’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맑스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노동가치론’에 기대기는 하지만, 이를 넘어서려 했다는 점 정도만 알아두자. 

여기서 “생계수당”은 ‘기본소득’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겠다. 고르는 안토넬라 코르사니가 이를 “재분배 논리”가 아닌 “전복적 논리” 속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적극적인 공감을 표한다. 그렇다. 기본소득은 단순히 재분배를 통해 복지를 확장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보편적 복지 실현에 대한 요구보다 더 큰 내용을 담고 있으며, 사회의 변화를 위한 다양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과 확산을 통해 기본소득의 실현가능성을 높이면서 그 가능성과 잠재력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여기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렇게 정의해 볼 수 있겠다. ‘임금노동형 완전고용 패러다임’에서 ‘사회적 필요노동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여기서 ‘사회적 필요노동’을 어렵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맑스의 <자본> 1권에 나오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과도 관련이 없다. 노동과 고용의 성격이 오로지 자본의 이윤 창출이라는 목적에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의해 재조직되고, 사회적 필요라는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사회적 필요’를 좀 더 상세하게 정의하는 문제는 남아있다. 

기본소득의 도입과 통화의 성격 변화, 그리고 이와 연관된 협동조합의 위상 문제는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고르 또한 이 글에서 개략적인 암시만 했을 뿐이다. 아무튼 최근의 논의 가운데에는 기본소득이 협동조합을 비롯한 새로운 경제 섹터의 창출에 긍정적 효과를 미칠 것이라는 언급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사회적 협동조합운동’에 착목하고 장기 전략을 마련하려는 사회당의 입장에서는 이 기본소득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의 연결고리를 구체적으로 찾는 것이 결코 부차적인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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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아이들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 손정숙 옮김 / 지식의풍경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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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일 히틀러!’ 세상이 다 아는 나치식 경례다. 세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은 나치의 역사가 64년 전 막을 내린 후 이 경례를 다시 구경하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치의 망령은 여전히 독일을 배회하고 있으며, 당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러시아에서조차 이들이 배회하고 있다.

바로 나치를 추종하는 신나치 ‘히틀러의 아이들’이 오늘도 독일과 러시아 등지에서 버젓이 활보하고 있다. 그들은 외국인 증오를 앞세워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며 ‘하일 히틀러!’를 외친다. 악몽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수전 캠벨 바톨레티가 쓴 <히틀러의 아이들>은 그 악몽의 시간을 생생히 파헤친 책이다. 

나치가 되어 간 아이들
 

이 책을 쓴 수전 캠벨 바톨레티는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과 소설, 논픽션을 써 온 작가다. 그녀가 이 책을 쓴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60여년 전 카를 페텔이 쓴 <21세 이하의 나치>라는 글 속에 나치가 “정치적 적극성을 가진 청년들에게 편승해 권력을 잡았다”는 문구를 몇 년 전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는 도서관과 박물관, 공문서 보관서 등을 다니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젊은이들과 어린이들까지 나치의 도구, 전쟁의 도구로 세뇌시키고 있었다는 무수한 증거들이 당시에 있었음에도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언론인, 정치가들의 무관심한 반응을 보고선 그녀는 깜짝 놀랐다. 과거 히틀러청소년단 활동을 했던 사람들까지 수소문해 찾아다니며 증언을 모은 그녀는 2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물로 이 책을 펴냈다. 지은이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이 책은 우리의 세계를 영영 변화시켜 놓은 12년간의 파괴적인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젊은이들이 맡았던 역할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증오와 살인,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가르쳤다는 사실로부터 새로운 이해를 끌어내려는 시도다. 결국 히틀러청소년단은 나치로 태어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나치가 되어 갔다.”(위의 책, 196쪽)

이 책은 아돌프 히틀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를 추종했던 청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다. 히틀러는 이런 청소년들을 자신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철저하게 이용했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청소년들에게서 시작하련다. 우리 나이든 이들은 기력이 소진됐다. 하지만 저 훌륭한 청소년들! 세상에 저보다 멋진 이들이 어디 있으랴. 이 모든 남성들과 소년들을 보라! 얼마나 좋은 도구인가! 이들과 함께라면, 나는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다.”(위의 책, 7쪽)

교육, 나치의 틀로 찍어내다

이렇게 해서 1926년 히틀러청소년단(Hitler Youth)이 결성되었다. 처음에는 6천여 명 정도의 단원으로 출발했다. 히틀러가 수상으로 지명된 1933년에는 단원수가 무려 230만 명에 달했다. 그 후 단원수가 급격히 늘어나 1938년에는 70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이들은 후방에서의 전쟁 지원뿐만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가서는 전투에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을 도구화하는 데 있어서 히틀러가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은 바로 교육이었다. 이 대목에선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교과서 개정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근현대사 교과서에서부터 지금은 도덕 교과서, 사회 교과서까지 개정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정부와 뉴라이트 세력이 편향적인 교과서 개정에 열을 올리는 것은 이러한 ‘도구적 관점’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히틀러에게 교육이란 한 가지 목표밖에 없었다. 어린이들을 훌륭한 나치의 틀로 찍어내는 것이었다. 나치는 집권하자마자 ‘국립학교’라고 불리는 공립학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낡은 교과서를 던져 버리고 새 교과서를 도입했다. 오로지 나치가 승인한 사상만 가르치도록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교과 과정을 다시 썼다.”(위의 책, 49쪽)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청소년단 지도자들도 뉘른베르크에서 재판을 받았다. 최고 지도자였던 발두르 폰 시라흐는 법정에서 “신과 독일 국민 앞에 제가 유죄임을 밝힙니다. 독일 청소년들을 수백만 명을 살해한 살인자로 교육한 점에 대해 저는 유죄입니다.”라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는 반인륜적 범죄행위로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뉘른베르크 법정은 히틀러청소년단 단원들은 단죄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치에 의해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에게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여주는 등 탈나치화를 위한 여러 노력들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들이 범죄적 동기를 위해 복무한 노예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나치의 세뇌 작업은 철저했다.

저항을 꿈꾼 청소년들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청소년들이 나치의 세뇌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0년 중부 독일의 모링겐에는 청소년 저항 운동가들을 수용하는 특별 강제 수용소까지 만들어졌다. 불과 열일곱의 나이였던 헬무트 휴베너는 반나치 전단을 돌린 혐의로 1942년 10월 27일 참수형에 처해졌다.

“1942년 여름, 궁지에 몰린 유대인들의 소식을 듣고 한 무리의 용감한 뮌헨 대학생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대중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들은 나치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전단지 수천여 장을 뮌헨을 비롯한 남부 독일 마을에 돌렸다. … 학생들은 스스로를 ‘백장미단’이라 칭했다. 그 백장미단을 만든 이들 가운데는 한스 숄도 있었다. 전쟁에 신물이 나고 나치의 잔혹상에 괴로워하던 한스는 터놓고 말할 용기와 한 대의 복사기를 찾아냈다.”(위의 책, 129쪽)

대학생이 되기 전 히틀러청소년단 활동에 염증을 느꼈던 한스 숄도 동료 학생 두 명과 함께 나치를 비판한 전단지를 돌린 혐의로 1943년 2월 22일 인민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곧바로 참수되었다.

백장미단은 숄 남매를 비롯한 뮌헨 대학생들이 주도한 비밀 지하 조직이었다. 그들은 1942년 6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주로 뮌헨과 독일 남부지역에서 나치에 반대하는 전단을 배포하면서 용감히 행동했다. 당시 수많은 히틀러의 아이들이 앵무새처럼 히틀러 만세를 외칠 때 그들은 꽃다운 목숨을 바쳐 저항했다.

백장미단에서 활동하다 처형당한 한스 숄과 소피 숄의 맏언니인 잉게 숄은 나치 치하에서도 저항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기억과 남아 있는 자료들을 토대로 두 동생의 일생과 백장미단의 활동을 책으로 엮었다. 그 책이 바로 70, 8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필독서처럼 여겨졌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원제 '백장미단')이다.

우리는 영원히 너를 기억할 것이다

2006년 5월 초였다. 당시 나는 핀란드 헬싱키로 가기 위해 뻬쩨르부르크 시내 중심의 간이 버스정류소로 향했다. 모스크바 기차역 건너편에 있는 그 곳에서 버스표를 끊고 나서 주변을 돌아보니 벽에 큰 글씨로 “우리는 영원히 너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고 추모사진이며 꽃들이 놓여 있었다.

마침 이 사진 속 주인공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인 두 남녀 대학생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들렀다. 그들은 간단히 묵념을 하고 우두커니 서서 비장함이 흐르는 슬픈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조심스레 다가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대학생인데 바로 그 자리에서 스킨헤드로 추정되는 극단적 인종주의자들에 의해 칼로 난자당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그 청년은 반파시즘, 반인종주의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러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적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울분을 토하며 매우 격정적인 어조로 반파시스트 운동의 긴박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달 뒤인 6월 말 다시 그곳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벽에 쓰인 글씨는 거의 다 지워지고 사진이며 꽃들도 놓여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글귀는 여전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 또한 영원히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라고 마음에 새기며 자리를 떴다.

파시즘은 그렇게 도래한다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찌야> 2006년 4월 3일자 신문에 실렸던 한 반파시스트 운동가의 인터뷰 내용 중 아직도 기억하는 대목이 있다.

“1930년대 독일에서 일군의 청년들이 뮌헨의 맥주 집에서 회합을 가질 때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파시즘은 그렇게 도래했던 것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른 독일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러시아, 대부분의 가정 혹은 그 친지 가운데 히틀러와의 전쟁으로 인한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러시아에서조차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활개를 친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이, 때론 상상하지 못한 결과가 도래하는 것이 역사다. 때문에 우리는 경계를 늦출 수 없으며 촉수를 곤두세워야 한다. 그것만이 히틀러의 아이들을 다시 만나지 않을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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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juhee 2009-01-2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 감사
 
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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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주의자들은 1793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과격파’들처럼 전 지구적인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 억눌린 분노를 밖으로 표출시키고, 민주적인 집단 저항운동의 불씨를 지피는 것이야말로 이들이 할 일이다. 그리하여 세계가 바로 서도록, 다시 말해서 머리는 위를 향하고 다리는 아래를 향하도록 잡아주어야 한다. 시장의 손이라는 보이지 않는 족쇄를 부숴야 한다. 경제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경제란 그저 한낱 도구에 불과하므로, 인류 공동의 행복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 15쪽)

오늘날 이처럼 거리낌 없이 혁명을 선동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장 지글러(Jean Ziegler)다. 저명한 기아문제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는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오랫동안 일했으며, 지금은 유엔 인권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거리낌 없이 혁명을 선동하는 사람

그렇다. 그는 무슨 혁명조직의 활동가도 아니다. 그런 그가 왜 ‘과격파’들처럼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그가 목격한 참혹한 현실이 바로 이러한 결론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이념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로부터 그의 진단과 처방이 나온 것이기에 그의 선동은 너무도 힘이 넘친다.

“나는 노동조합 지도자가 아니며, 인민해방전선을 이끄는 리더도 아니다. 그저 제한적인 영향력을 가진 한 명이 지식인일 뿐이다. 나의 책은 내가 돌아다니며 목격한 세계에 대한 나의 진단을 제시한다.”(위의 책, 332쪽)

그는 도대체 어떤 현실을 목격한 것일까. 그리고 어떤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은 것일까. 바로 기아와 부채로부터 발생하는 지구적 규모의 경제적 살인이다.

“오늘날 인류가 처한 비참함의 정도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참담하다. 5세 미만의 어린아이들 중에서 1천만 명 이상이 해마다 영양 결핍이나 각종 전염병, 오염된 식수,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이들 중에서 50퍼센트는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6개국에서 발생한다. 희생자들의 90퍼센트가 남반구 국가들의 42퍼센트에 집중되어 있다. 이 아이들의 생명은 재화의 객관적인 결핍이 아니라, 재화의 공평하지 못한 분배, 다시 말해 인위적인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위의 책, 35쪽)

“2006년 북반구 선진 산업 국가들이 제3세계 122개국의 개발을 위해 지원한 돈은 580억 달러였다. 같은 해 제3세계 122개국은 부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환 명목으로 북반구 은행에 포진한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에게 5,010억 달러를 지급했다. 오늘날의 세계 질서 속에서 부채는 그 자체로 구조적 폭력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위의 책, 79쪽)

인위적 결핍에서 비롯된 ‘기아’와 구조적 폭력인 ‘부채’

지구상에서 현재 5초마다 10세 미만 어린이 한 명이 기아 또는 영양 결핍으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2007년 한 해 기아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같은 해 일어난 모든 전쟁의 사망자를 더한 수보다 많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리고 제3세계 국가들의 감당키 힘든 막대한 부채는 기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들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그는 기아와 부채로 인한 끔찍한 현실을 고발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원인을 파헤친다.

“부채와 기아, 기아와 부채. 악순환을 거듭하는 이 두 가지의 조합에는 출구가 없어 보인다. 도대체 누가 이와 같은 살인적인 조합을 만들어냈는가? 누가 이와 같은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려 하는가? 이와 같은 교착 상태를 이용해서 천문학적인 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위의 책, 247쪽)

그는 이 질문에 단호하게 답한다. 바로 ‘자본주의가 낳은 봉건주의자들’이 그 원흉이라고. 다시 말해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범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계화 지상주의자들’의 첨병인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를 실명을 밝혀가며 놀랍도록 생생하게 고발한다. 네슬레, 몬산토, 노바티스, 다우케미컬, 지멘스, 나이키 등이 대표적인 제물이 되었다.

제3세계의 막대한 부채 문제, 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아와 빈곤의 실태를 이 책보다 더 생생하게 고발한 책, 지구적 책임과 지구적 연대를 이보다 더 절절하게 호소한 책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줄줄이 고발당한 거대 다국적 기업들

그는 저자후기에서 부채와 기아라는 두 개의 강력한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자고 다시 한 번 직접적이고 강력한 선동을 한다. 그렇다. 이스라엘 군대에 의한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만 학살이 아니다. 부채와 기아로 인한 지구적 규모의 경제적 학살을 우리의 시야에 넣어야 한다.

“기아는 절대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다. 기아로 죽은 어린아이는 살해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편성된 세계의 경제, 사회 정치적 질서는 살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부조리 그 자체다.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는 살인적일 뿐 아니라 아무런 정당한 필요도 없이 살인을 자행하고 있다. 그 같은 질서는 뿌리 뽑아야 마땅하다. 나는 이 책이 그와 같은 투쟁을 위한 무기가 되기를 소망한다.”(위의 책, 342쪽)

그런데 그의 이러한 선동은 귓가를 스치는 거리의 확성기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으로부터의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그 비밀은 바로 ‘출생의 우연’이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 예정이나 필연이 아닌 우연에 불과했다는 것을 한 번만이라도 상기한다면, 기아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시급히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어떻게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출생의 우연이라는 요소를 제외한다면, 나와 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갈라놓을 다른 요소들이란 전혀 없다.”(위의 책, 331쪽)  

그는 기아와 부채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절박함, 정당성, 가능성, 그리고 투쟁의 수단들을 이 책에 담았지만, 그 결과를 무작정 낙관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한 확신 하나를 갖고 있다.
 

“투쟁의 결과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확실한 것도 있다. 일찍이 파블로 네루다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꽃이란 꽃은 모조리 꺾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결코 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위의 책, 344쪽)
 
국방부가 좀 나서서 널리 읽혔으면
 

감히 이 책을 지구상에서 가장 불온한 새 책이라 말하고 싶다. 그는 지구를 누비며 겪은 직접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지구상의 모든 시장 지상주의자들을 향해 거침없는 일격을 날리고, 일국을 넘어선 지구적 규모의 변혁을 촉구하고 있다. 무엇이 이보다 더 불온할 수 있겠는가.

국방부가 이왕이면 이 책도 ‘불온서적’ 목록에 꼭 넣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좀 더 널리 읽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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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민주주의 -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
콜린 크라우치 지음, 이한 옮김 / 미지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누군가가 던진다면 당신의 대답은?

물론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그리고 정치적 관점에 따라 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답을 할 것만 같다. 이 질문에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콜린 크라우치는 명쾌한 답을 내린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우리는 지금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 ‘포스트산업’ 등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단어가 되었지만, ‘포스트민주주의’라니? 이 표현은 도대체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걸까. 2004년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처음 출간되었고, 최근에야 한국어로 출간된 <포스트민주주의>(이 한 옮김, 미지북스, 2008)의 저자 크라우치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가 오직 두 개념, 즉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 개념만 갖고 있다면 민주주의의 건강에 대한 논의를 그리 진전시킬 수 없을 것이다. 포스트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민주주의 시기 이후 지루함, 좌절, 환멸이 발생한 상황, 강력한 소수 집단이 정치 시스템이 자신들을 위해 작동하도록 다수인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상황, 정치 계급이 대중의 요구를 관리하고 조작할 줄 알게 된 상황, 하향식 공공 캠페인을 진행하여 사람들이 투표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상황을 기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같은 상황은 비민주주의non-democracy의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가 민주주의의 포물선을 따라 도달하게 된 현 시기를 묘사해준다.”(32쪽)

포스트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기한 저자는 이 개념이 현 시기 민주주의의 특징을 보다 분명하게 서술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저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포물선의 특징을 끌어오는데, 둥근 모자를 생각하면 쉽다. 앞에서 볼 때 둥근 모자의 천정은 민주주의가 활성화된 시기였고, 왼쪽 아래는 민주주의 이전의 시기, 오른쪽 아래는 포스트민주주의 시기라고 보면 된다.

민주주의 이전, 민주주의, 포스트민주주의로 향하는 포물선

여기서 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이 포물선은 불연속이 아닌 연속을 이루는 곡선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저자는 “포스트민주주의 시기는 민주주의 시기의 특징과 민주주의 이전 시기의 특징이 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포스트민주주의의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다.”(127쪽)고 설명한다.

이상이 다소 개념적인 설명이었다면, 저자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좀 더 직설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여론을 조작하는 기법과 정치를 감시하도록 열어두는 기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교해진 반면, 정당 정책안의 내용과, 정당 간 경쟁의 성격은 그 어느 때보다 진부하고 활기가 없다. 이런 종류의 정치를 비민주적이거나 반민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민주주의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시민들이 조작되고, 수동적이며 공공 사안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 축소된 역할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35쪽)

한마디로, 비민주적 혹은 반민주적이라고 정의하기도 어렵지만,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도 없는 현재의 상태를 포스트민주주의로 명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스트민주주의 시대를 추동한 힘은 무엇일까. 저자는 “오늘날 포스트민주주의의 원인이 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경제적 세계화다.”(47쪽)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경제적 세계화’는 다른 말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고 할 수도 있다.

‘경제적 세계화’가 포스트민주주의를 추동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스트민주주의 하에서 일어난 일들의 결과는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많은 나라들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 보였다고 한다.

“복지 국가는 차츰 잔여화됐다. 시민의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수혜 요건을 갖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으로 바뀐 것이다. 노동조합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국가 기능은 야경 국가의 성격으로 두드러지게 회귀했다. 빈부 격차는 커지고 있다. 세금의 재분배 기능은 줄어들었다. 정치가는 한 줌도 안 되는 기업가들의 관심사에만 주로 반응하고, 기업가의 특수 이익이 공공 정책으로 둔갑한다.”(37쪽)

저자는 또한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다국적 기업이 국가와 세계를 좌우하는 핵심 제도가 되었으며, 이것의 영향 하에 새로운 지배 계급이 구성되고 있다고 본다. 아무튼 이는 원점으로의 회귀는 아닐지언정 기존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정부가 지식과 전문성을 점점 더 기업 경영진과 지도층에 의존하게 되고, 정당이 그들로부터 자금의 많은 부분을 충당하게 되면서, 새로운 지배 계급, 정치와 경제 모두 장악한 계급이 구축된 사회로 우리는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 새 지배 계급은 사회가 점점 더 불평등해짐에 따라 사회 경제적 권력과 부를 더 많이 가지게 됐을 뿐만 아니라 특권적인 정치적 역할마저 획득했다. 이것이 21세기 초 민주주의 위기의 핵심이다.”(84쪽)

제도가 된 다국적 기업과 새로운 지배 계급

저자는 또한 현대 정치에서 민주주의가 쇠락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기업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과 나머지 모든 집단 사이에서 나타난 커다란 힘의 불균형”(173쪽)으로 간명하게 정의한다.

이러한 불균형이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지만, 저자는 비관주의를 설파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의지의 낙관주의를 펼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여성주의와 생태주의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의 활성화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이미 엿보았다. 그러한 탐색이 보다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다음과 같은 실천에 매진할 수 있다면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정치가 포스트민주주의를 향해 냉혹하게 미끄러져 가는 것을 멈추기 위한 실천은 여전히 가능하고, 다음의 세 가지 수준에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업 엘리트의 커져가는 지배력을 제어하는 정책, 둘째, 정치적 관행 자체를 개혁하는 정책, 셋째, 현 상황을 바꾸는 데 관심 있는 시민들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는 행동.”(173쪽)

저자는 보다 실천적인 쟁점으로 논의를 이끌기도 한다. 그 쟁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정당과 사회 운동 사이의 관계 문제다. 이 문제는 올해 촛불 정국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뜨거운 감자였다.

정당과 운동 사이의 긴장과 협력

“정당은 포스트민주주의의 반평등주의적인 경향을 피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꼭 필요한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정당을 통해서 우리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에 안주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정당 밖에서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사회 운동 단체에 힘을 보태면서 정당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184쪽)

저자는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유럽의 중도 좌파 정당들이 그 자체로는 가망이 없기 때문에 사회 운동과 시민들의 직접 행동이 보다 강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맥락에서 이러한 주장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당이 꼭 중도 좌파 정당들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좌파 정당들 또한 이를 유념해야 한다. 정당과 사회 운동 사이에는 늘 일정한 긴장 관계가 있기 마련이고, 이를 조화롭게 풀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수의 좌파 정당들은 제도 정치의 높은 진입 장벽 탓에 운동 정치에 머물고 있는 수준이고 ‘사회 운동적 정당’의 형태에 가까워 그러한 긴장이 아직까지 그리 크진 않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기업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비롯한 다양한 수단들의 개발, 정당과 운동 사이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양자 사이의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시민들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 민주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 줄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정체성 집단의 조직화 등을 강조하고 있다.

포스트민주주의로부터 벗어나기

국민이 선출한 정부의 반反국민성이 드러나고 있는 역설이 바로 포스트민주주의의 적나라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이는 사회 민주주의의 퇴조 이후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사적 시대 규정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이명박 정부 시대를 가장 잘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은 보편적 복지의 경험 등 사회권 보장 문제에 있어서 유럽처럼 사회 민주주의의 기본적 특징조차 경험한 바가 없기 때문에 포스트민주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더욱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할 지 모른다.

민주주의의 포물선 끝이 무저갱으로 내달릴 지, 아니면 방향전환의 변곡점을 지날 지는 결국 대중들의 행동과 정치적 의지의 결집 여하에 달려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 정치의 특징을 포스트민주주의로 개념화하는 것의 실천적 함의는 바로 이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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