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민주주의 -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
콜린 크라우치 지음, 이한 옮김 / 미지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누군가가 던진다면 당신의 대답은?

물론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그리고 정치적 관점에 따라 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답을 할 것만 같다. 이 질문에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콜린 크라우치는 명쾌한 답을 내린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우리는 지금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 ‘포스트산업’ 등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단어가 되었지만, ‘포스트민주주의’라니? 이 표현은 도대체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걸까. 2004년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처음 출간되었고, 최근에야 한국어로 출간된 <포스트민주주의>(이 한 옮김, 미지북스, 2008)의 저자 크라우치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가 오직 두 개념, 즉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 개념만 갖고 있다면 민주주의의 건강에 대한 논의를 그리 진전시킬 수 없을 것이다. 포스트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민주주의 시기 이후 지루함, 좌절, 환멸이 발생한 상황, 강력한 소수 집단이 정치 시스템이 자신들을 위해 작동하도록 다수인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상황, 정치 계급이 대중의 요구를 관리하고 조작할 줄 알게 된 상황, 하향식 공공 캠페인을 진행하여 사람들이 투표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상황을 기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같은 상황은 비민주주의non-democracy의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가 민주주의의 포물선을 따라 도달하게 된 현 시기를 묘사해준다.”(32쪽)

포스트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기한 저자는 이 개념이 현 시기 민주주의의 특징을 보다 분명하게 서술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저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포물선의 특징을 끌어오는데, 둥근 모자를 생각하면 쉽다. 앞에서 볼 때 둥근 모자의 천정은 민주주의가 활성화된 시기였고, 왼쪽 아래는 민주주의 이전의 시기, 오른쪽 아래는 포스트민주주의 시기라고 보면 된다.

민주주의 이전, 민주주의, 포스트민주주의로 향하는 포물선

여기서 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이 포물선은 불연속이 아닌 연속을 이루는 곡선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저자는 “포스트민주주의 시기는 민주주의 시기의 특징과 민주주의 이전 시기의 특징이 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포스트민주주의의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다.”(127쪽)고 설명한다.

이상이 다소 개념적인 설명이었다면, 저자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좀 더 직설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여론을 조작하는 기법과 정치를 감시하도록 열어두는 기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교해진 반면, 정당 정책안의 내용과, 정당 간 경쟁의 성격은 그 어느 때보다 진부하고 활기가 없다. 이런 종류의 정치를 비민주적이거나 반민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민주주의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시민들이 조작되고, 수동적이며 공공 사안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 축소된 역할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35쪽)

한마디로, 비민주적 혹은 반민주적이라고 정의하기도 어렵지만,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도 없는 현재의 상태를 포스트민주주의로 명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스트민주주의 시대를 추동한 힘은 무엇일까. 저자는 “오늘날 포스트민주주의의 원인이 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경제적 세계화다.”(47쪽)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경제적 세계화’는 다른 말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고 할 수도 있다.

‘경제적 세계화’가 포스트민주주의를 추동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스트민주주의 하에서 일어난 일들의 결과는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많은 나라들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 보였다고 한다.

“복지 국가는 차츰 잔여화됐다. 시민의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수혜 요건을 갖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으로 바뀐 것이다. 노동조합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국가 기능은 야경 국가의 성격으로 두드러지게 회귀했다. 빈부 격차는 커지고 있다. 세금의 재분배 기능은 줄어들었다. 정치가는 한 줌도 안 되는 기업가들의 관심사에만 주로 반응하고, 기업가의 특수 이익이 공공 정책으로 둔갑한다.”(37쪽)

저자는 또한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다국적 기업이 국가와 세계를 좌우하는 핵심 제도가 되었으며, 이것의 영향 하에 새로운 지배 계급이 구성되고 있다고 본다. 아무튼 이는 원점으로의 회귀는 아닐지언정 기존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정부가 지식과 전문성을 점점 더 기업 경영진과 지도층에 의존하게 되고, 정당이 그들로부터 자금의 많은 부분을 충당하게 되면서, 새로운 지배 계급, 정치와 경제 모두 장악한 계급이 구축된 사회로 우리는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 새 지배 계급은 사회가 점점 더 불평등해짐에 따라 사회 경제적 권력과 부를 더 많이 가지게 됐을 뿐만 아니라 특권적인 정치적 역할마저 획득했다. 이것이 21세기 초 민주주의 위기의 핵심이다.”(84쪽)

제도가 된 다국적 기업과 새로운 지배 계급

저자는 또한 현대 정치에서 민주주의가 쇠락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기업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과 나머지 모든 집단 사이에서 나타난 커다란 힘의 불균형”(173쪽)으로 간명하게 정의한다.

이러한 불균형이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지만, 저자는 비관주의를 설파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의지의 낙관주의를 펼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여성주의와 생태주의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의 활성화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을 이미 엿보았다. 그러한 탐색이 보다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다음과 같은 실천에 매진할 수 있다면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정치가 포스트민주주의를 향해 냉혹하게 미끄러져 가는 것을 멈추기 위한 실천은 여전히 가능하고, 다음의 세 가지 수준에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업 엘리트의 커져가는 지배력을 제어하는 정책, 둘째, 정치적 관행 자체를 개혁하는 정책, 셋째, 현 상황을 바꾸는 데 관심 있는 시민들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는 행동.”(173쪽)

저자는 보다 실천적인 쟁점으로 논의를 이끌기도 한다. 그 쟁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정당과 사회 운동 사이의 관계 문제다. 이 문제는 올해 촛불 정국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뜨거운 감자였다.

정당과 운동 사이의 긴장과 협력

“정당은 포스트민주주의의 반평등주의적인 경향을 피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꼭 필요한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정당을 통해서 우리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에 안주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정당 밖에서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사회 운동 단체에 힘을 보태면서 정당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184쪽)

저자는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유럽의 중도 좌파 정당들이 그 자체로는 가망이 없기 때문에 사회 운동과 시민들의 직접 행동이 보다 강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맥락에서 이러한 주장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당이 꼭 중도 좌파 정당들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좌파 정당들 또한 이를 유념해야 한다. 정당과 사회 운동 사이에는 늘 일정한 긴장 관계가 있기 마련이고, 이를 조화롭게 풀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수의 좌파 정당들은 제도 정치의 높은 진입 장벽 탓에 운동 정치에 머물고 있는 수준이고 ‘사회 운동적 정당’의 형태에 가까워 그러한 긴장이 아직까지 그리 크진 않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기업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비롯한 다양한 수단들의 개발, 정당과 운동 사이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양자 사이의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시민들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 민주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 줄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정체성 집단의 조직화 등을 강조하고 있다.

포스트민주주의로부터 벗어나기

국민이 선출한 정부의 반反국민성이 드러나고 있는 역설이 바로 포스트민주주의의 적나라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이는 사회 민주주의의 퇴조 이후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사적 시대 규정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이명박 정부 시대를 가장 잘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은 보편적 복지의 경험 등 사회권 보장 문제에 있어서 유럽처럼 사회 민주주의의 기본적 특징조차 경험한 바가 없기 때문에 포스트민주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더욱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할 지 모른다.

민주주의의 포물선 끝이 무저갱으로 내달릴 지, 아니면 방향전환의 변곡점을 지날 지는 결국 대중들의 행동과 정치적 의지의 결집 여하에 달려 있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 정치의 특징을 포스트민주주의로 개념화하는 것의 실천적 함의는 바로 이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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