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음의 조명들이 반겨주는 곳,익숙한 부엌의 한 켠을 빌린  듯한... 

까페라기 보다는 부드러운 담요 같은 작업실이라 좋았다. 

소곤거림이 더 잘 들리는 그 곳에서 눈빛이 맑은 소년과 애기를 나눴다. 

바깥이 거실 같고,실내가 테라스 같은...... 

내게도 그런 작업실 하나 생기면 좋겠다. 

가끔은 불러서 도란도란거릴 맘 착한 친구 하나 있다면 더 좋겠다. 

혼자라도 좋겠다. 어쩌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머물다 간 그 자리에 내 상체만한 커다란 쿠션과,오밀조밀 초록 노랑 책걸상들이 그래도 오늘의 나를,친구를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럼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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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난 벙어리처럼 어리둥절 장갑이 되어버린 것 같다.아니,쉼없이 재잘거리는 종달새가 되버린 것 같다.마음이 마음처럼 움직이질 않는다.심장이 심장처럼 뛰지 않았으면 좋겠다.아니,미치도록 미쳐보고 싶어.아프도록 아프고 싶다.죽지 않을 만큼 하루쯤 아프다가 깨어나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 딱 떼는 얄미운 내가 되고 싶다.그렇게 예고 없이 아파본 적이 내게 분명 있었지.그런데 세상은 너무 말짱해서 난 그게 눈 시리게 무서웠어.그 때부터 난 이기적이 되어버렸지.아무렴 어때를 외치며 껍질 속으로 다시 들어가버림 그만인 걸 몰라 몰라 몰라...... 

고통이 고통이라 여겨지지 않고 외로움이 외로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무렵 아마 난 저 세상 사람일거야.내가 쓰는 단어들,투정들,푸념들,탄식들,흩어지다가 다시 흩어진 모음의 조각들,무수히 버려진 느낌표들,나를 도무지 떠나주질 않는 말줄임표들...... 

빗물에게서 헤어진 벗들의 추억들을 아프게 만나고,바람에게서 그대로 멈추어버린 나를 발견하고,낡은 가구들에게서 일기장보다 오래된 나를 만나는 오늘,난 얼음이 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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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해빠진 독서
                                                                          - 기형도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죽은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이 두꺼운 책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이제없다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작가는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게 되겠지만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손가락들은 까닭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휴일이 지나가면 그 뿐,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저 자를 눕혀두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망치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흙탕물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그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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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3시 2011-01-2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eality?
 
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어수선하게 흩어진 퍼머 머리와 반쯤 풀린 눈매, 그리고 지루한 하루의 단짝 같은 소박한 디자인의 카세트 라디오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가을여자, 그녀는 바로 나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소설과 음악이 만나 데이트를 갖는다는 국립중앙도서관의 겨울맞이 행사가 가을보다도 더 로맨틱한 분위기로 나를 초대하고 있던 즈음, 난 '가을여자'의 저자이자 속내가 궁금해지는 끌림의 작가 오정희 선생님을 만났다. 이십대와 이젠 안녕을 고하던 순간 처음 그녀의 소설을 행복한 우연으로 접했었다. 무늬만 주부이던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느껴졌던 삽십대 정점의 여성이 주인공이던 그 소설의 제목은 이름마저 매혹적인 '바람의 넋'이었다. 어느 날 홀연히 스며든 바람에 취해 자꾸만 밖으로 밖으로 방황을 지속하다 그 바람에 실연당한 사람처럼 다시 돌아온 여자의 시간이 그림처럼 그려진  소설이었다. 나도 그녀였고 그녀의 시간도 내 시간이었던 버릴 수 없는 기억이 되준 이야기였기에 작가 오정희 선생님을 오래이 간직하고 있었다. 

유년시절부터 책을 유난히 좋아했고 글짓기 시간에 또박또박 써내려간 작문으로 선생님께 해바라기보다 더 큰 칭찬을 받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작가가 될거라 믿고 지금까지 글을 써오신 작가님의 순수한 열정은 단아한 소녀의 얼굴을 한 첫인상에도 역력했다. 삼십대의 불안정한 욕망의 틈바구니를 누구보다도 열렬히 체험하셨던 작가의 진솔한 말씀이 그녀의 소설보다도 더 아프게 다가왔던 시간이었다. 

빛바랜 외투, 눈가에 패인 시간의 물결들, 낯선 공간과 만남에의 열망, 갈급한 생활들 이 모든 것이 인생의 가을을 나는 여자의 초상이자 비망록이라고 외치고 있었던 친근한 소설로 다시 선한 작가를 재회했다. 오랜만의 부부동반 모임에 입고 갈 의상을 고민하며 울상이던 부인 곁에서 뜻하지 않게 시작된 치통을 겪는 남자의 이야기가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다지 곱지 않은 집안일 곳곳에 손을 뗄 수 없었던 지난한 아낙네로서의 시간들은 이젠 제발 이별하고 싶어지는 중년의 여인에게 그녀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욕망은 부엌 냄새 스민 홈웨어가 아닌, 우아하고 이지적인 사교계의 여왕이나 차려입을 듯한 진짜 의상이었다. 허나 서글프게도 남편의 힘을 빌어 그런 멋진 의상을 준비하기엔 현실은 너무 가난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와는 사뭇 다른, 그녀의 로망을 살고있는 언니에게 늘 그래왔듯 빌려입기로 결정한다.  매번 똑같은 해결책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그녀 곁에서 더 극심해지는 치통을 호소하고픈 남편의 심리가 그토록 솔직하고 섬세하게 드러나 있을 수 없었다. 사랑할 수 없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랑할 마음이 두려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의 무게 따윈 무신경해지고 싶은 게 간절한 바램이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한없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잦아들수록 내 안의 소녀는 더 생기를 띈다. 심지어는 불안할 정도로 팔딱이고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상상 속에 나를 기꺼이 가두고 오늘도 살아있음에 느끼고 있음에 미치도록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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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 + 작별 세트 - 전2권 - 정이현 산문집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누구나 한 번 쯤 들여다보고 싶고,매만져보고 싶은 어리숙한 시절들,알싸한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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