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어수선하게 흩어진 퍼머 머리와 반쯤 풀린 눈매, 그리고 지루한 하루의 단짝 같은 소박한 디자인의 카세트 라디오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가을여자, 그녀는 바로 나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소설과 음악이 만나 데이트를 갖는다는 국립중앙도서관의 겨울맞이 행사가 가을보다도 더 로맨틱한 분위기로 나를 초대하고 있던 즈음, 난 '가을여자'의 저자이자 속내가 궁금해지는 끌림의 작가 오정희 선생님을 만났다. 이십대와 이젠 안녕을 고하던 순간 처음 그녀의 소설을 행복한 우연으로 접했었다. 무늬만 주부이던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느껴졌던 삽십대 정점의 여성이 주인공이던 그 소설의 제목은 이름마저 매혹적인 '바람의 넋'이었다. 어느 날 홀연히 스며든 바람에 취해 자꾸만 밖으로 밖으로 방황을 지속하다 그 바람에 실연당한 사람처럼 다시 돌아온 여자의 시간이 그림처럼 그려진  소설이었다. 나도 그녀였고 그녀의 시간도 내 시간이었던 버릴 수 없는 기억이 되준 이야기였기에 작가 오정희 선생님을 오래이 간직하고 있었다. 

유년시절부터 책을 유난히 좋아했고 글짓기 시간에 또박또박 써내려간 작문으로 선생님께 해바라기보다 더 큰 칭찬을 받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작가가 될거라 믿고 지금까지 글을 써오신 작가님의 순수한 열정은 단아한 소녀의 얼굴을 한 첫인상에도 역력했다. 삼십대의 불안정한 욕망의 틈바구니를 누구보다도 열렬히 체험하셨던 작가의 진솔한 말씀이 그녀의 소설보다도 더 아프게 다가왔던 시간이었다. 

빛바랜 외투, 눈가에 패인 시간의 물결들, 낯선 공간과 만남에의 열망, 갈급한 생활들 이 모든 것이 인생의 가을을 나는 여자의 초상이자 비망록이라고 외치고 있었던 친근한 소설로 다시 선한 작가를 재회했다. 오랜만의 부부동반 모임에 입고 갈 의상을 고민하며 울상이던 부인 곁에서 뜻하지 않게 시작된 치통을 겪는 남자의 이야기가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다지 곱지 않은 집안일 곳곳에 손을 뗄 수 없었던 지난한 아낙네로서의 시간들은 이젠 제발 이별하고 싶어지는 중년의 여인에게 그녀를 가장 돋보이게 하는 욕망은 부엌 냄새 스민 홈웨어가 아닌, 우아하고 이지적인 사교계의 여왕이나 차려입을 듯한 진짜 의상이었다. 허나 서글프게도 남편의 힘을 빌어 그런 멋진 의상을 준비하기엔 현실은 너무 가난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와는 사뭇 다른, 그녀의 로망을 살고있는 언니에게 늘 그래왔듯 빌려입기로 결정한다.  매번 똑같은 해결책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그녀 곁에서 더 극심해지는 치통을 호소하고픈 남편의 심리가 그토록 솔직하고 섬세하게 드러나 있을 수 없었다. 사랑할 수 없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랑할 마음이 두려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의 무게 따윈 무신경해지고 싶은 게 간절한 바램이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한없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잦아들수록 내 안의 소녀는 더 생기를 띈다. 심지어는 불안할 정도로 팔딱이고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상상 속에 나를 기꺼이 가두고 오늘도 살아있음에 느끼고 있음에 미치도록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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