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이 생겨서 어릴때는 구분이 어려운 쌍둥이 자매인 어머니와 이모.
그러나 이제는 닮았다고 말하지 않으면
닮았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행색을 하고 있다.

안진진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어릴 적 임신시키고 떠났고
진진의 이모는 적절한 집안의 남자를 만나 자녀를 기른다.

진진은 어릴적 시장에서 장사하는 엄마의 직업란에 “사업” 이라고 기재한 덕에 선생님으로부터 일일 학부모 수업 요청을 받고, 엄마가 아닌 이모를 수업에 불러내며,

성인이 된 뒤에도 이모를 엄마라고 순간적으로 말하지만 정정하지 않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아주 닮아 구분도 되지 않았던 인물들이,
어쩜 이렇게 다른 운명이 되버리는걸까 생각하며 흥미롭게 읽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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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장! 완독

테레사와 토마시가 키우는 개인 카레닌이 암으로 인해 죽게 된다. 테레사는 카레닌의 죽음 앞에서도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토마시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는 모습을 보고 또한번 여자라고 오해를 한 것, 그 혼란스러운 마음은 카레닌의 무덤을 파는 것으로 연결된다.
카레닌은 사랑에 대하여 인간과 인간의 사랑은 어쩌면 개와 인간의 사랑보다도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개에게는 어떠한 사랑을 바라지도 않지만, 인간이 인간에게는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을 수 있다고.
그러면서 자신의 고집대로 오게 된 시골에서 더 이상 의사생활을 하지않고, 할 수도 없는, 늙어버린 토마시의 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한다. 그리고 편지 역시 어느 여자가 아니라 토마시의 아들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반성한다.
자신이 고집대로 토마시를 시골로 끌고 왔다는 것.

토마시는 그것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것마저 모두 자신의 생각으로 이루어진, 그런 이야기를 토마시에게 전하고. 토마시는 전원생활에 만족하고있다고 이야기 하며 늙은 두사람의 모습, 그러나 여전히 삐걱대고 미숙한 두 사람의 모습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테레사가 말한 대로, 사람은 사랑을 받기를 끊임없이 갈망하기 때문에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대가 없이 사랑을 준다는 것은 사실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강아지를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은 반려견들이 먼저 우리를 조건없이 사랑해주기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랑은 이기적인것이라는 생각이 또 들었다. 사랑받기 위해서라니. 주는 것에 온전히 행복 할 수 있는 것도 정말 축복인것이니 줄 수 있을 때 많이 주고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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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은 항상 짧은 한 편 읽고나면 으잉? 싶은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아무래도 뜻하는 바를 모두 표현하기에는 너무 짧기 때문이겠지.

이번에도 첫 챕터 별일은 없고요? 를 읽고나서는 뭔가 시작되려나 싶었는데 챕터가 끝났네? 했는데 책 뒤에 소개글을 읽고서 이해가 되었다. 작가는 시련과 아픔 다음에 새로운 시작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겠구나.

정확히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사랑을 정리해야한다는 결론과 슬픔에, 엄마 곁으로 내려온 주인공. 아주 소소한 일들, 레몬 생강차를 만들어 먹고, 철물점 심부름을 하고, 공장에서 유치원생 수준의 한글을 가르치고,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어쨌든 하루를 채워 산다는 것.
그리고 철물점 아들인 재섭씨와 미술관을 가는 것으로 소설이 마무리 된다.

이런 것들이, 조각나고 부서지고 무너져버린 지금 우리에게 마침내 당도한 “다음이 있다는 마음” 을 상기시키는 것이겠지 생각했다.

아무래도 상처를 받은 그 시절에 계속해서 머무르게된다.
나는 아직도 그 시절을 생각하느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문득, 주변이 변하고 만나는 사람도 환경도 달라진 걸 인지하고 나면, 허망함이 밀려든다.
언제 이렇게 변했을까, 내 마음은 왜 제자리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변했다. 나는 제자리일것 같지만, ‘다음’ 은 나도 모르게 찾아왔고, 서서히 과거는 잊혀진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희미해지고 있겠지.
현재에 집중하면서, 다가올 다음을 생각하고 대비하면서
삶을 고민해보자!

이주란의 소설을 읽고 ‘신세‘에 대해 떠올렸다. 어쩌면 신세를 지고 끼치고 갚는 것이 인생일 것이다. 동시에 누군가와 만나는 일은 인생의 한 ‘시기‘에 방문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기는 퇴사나이별, 죽음 등으로 인해 단절되곤 하는데, 적당히 거리를 두는 적절한 사람이 있어 "다음이 있다는 마음"(「서울의 저녁」)은 단절을 다시 연결로 이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쓰지만 선을 넘지는 않는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다시 혼자가 될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끝나도 삶은 계속되듯, 떠나고돌아오는 발걸음은 희망 쪽을 향해 있다. 이 무자비한 세상에 맞서 "무자비한 따뜻함"(「어른」)을 전하는 그의 소설에 또다시 큰신세를 입었다.

재섭씨와 나는 다시 같이 걷기 시작했다.
헤어지는 게 두려우면 더 사랑하면 될 텐데. 그쵸?
재섭 씨가 말했고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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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글을 읽고 눈물이 난 건 처음이다.
작가는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글을 쓰다 수십번 도망갔다는 것에서,
그리고 읽혀지는 글에서
한줄 한줄에 진심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책에 기대었다. 책은 슬픔이 쉴 자리를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나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의 크고 작은 슬픔을 덜어놓기위해서 책을 읽고, 기록을 하고, 때때로 일기를 쓴다.

지금은 여전히 패배자의 생각에 머무른다.
나의 결핍이 존재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은 대답을 하지만,
마음 한 켠이 쑤신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나아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의 부족함을 알고, 직면하는 나는,
언젠가는 온전히 행복해지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나의 모자람없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줘야겠다.
내가 나의 엄마이자, 아빠이자, 둘도 없는 친구니깐!
가장 소중하게 대하여줄 것!

나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 슬픔 의 얼굴은 구체적이었다.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뚱뚱한 남자애, 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프고 다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고통으로 부서진 자리마다 열리는 가능성 을 책 속에서 찾았다.
죽고, 아프고, 다치고, 미친 사람들이 즐비한 책 사이를 헤매며 내 삶의 마디들을 만들어 갔다.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애썼지만 매번 실패하고 타협했다. 쓸 때의 나는 여기 없다. 이 글들은 나였던 것,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것이다.
살아가는 일은 사라지는 일이지만 나는 내 젊음을 부러워하지도 그리워 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나는 여기에 두고, 여전히 처음인 많은 것들에 매번 새롭게 놀라면서 다음으로 가고 싶다.
행간을 서성이며 배운 것들 덕분에 반드시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앞으로를 기대한다. - P10

다만 ‘지금‘ 같이 놀고 싶은 친구를 만났고, 같이 놀면 재밌는 사람을 만났으니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우리는 서로가 느끼는 감정이 같을 수 없는 한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치관 우선순위를 체크하는 테스트를 했을 때 우리는 둘 다 최우선 순위로 ‘나‘를 꼽았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누군가를 돌보고 아낀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는 우리의 건강함이 마음에 들었다.

엄마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내가 출근하면서 "간 다"라고 말하는 인사다. "갔다 올게, 아니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해 봐." 시간에 쫓겨 인사 없이 훌렁 나가는 일이 다반사지만, 아침에 이렇게 한마디씩 나눌 여유가 있으면 새삼 깨닫곤 한다. 집 나선 가족이 돌아 오지 않는 일이 엄마에게는 평생의 상처라는 걸. 삼십 년 넘는 세월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는 흉터가, 엄마에게는 아버지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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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14-끝
네 주인공이 모두 등장하면서
인간의 시선에 대해서 조금씩 이야기한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다수의 사람의 시선을 필요로 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만을 필요로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 언제 어디서든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프란츠는 마지막에 속했고, 꽤나 우스꽝스럽게 그 시선이
사비나 이후의 여학생이었다가, 사비나였다가 알 수 없는 묘사를 한다.
그러다가 결국 시위를 하다가 끌려가 맞고
가장 원하지 않던 전 부인인 마리클로드의
시선 아래서 목숨을 거둔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동물적인 감각으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닐까.

토마시와 테레사도 무겁게 죽었고,
그 소식을 들은 사비나는 가볍게 죽기 원해 죽었고,
프란츠도 죽었다.

각자 남긴 것은 가벼울까, 무거울까.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
사람이 해야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이 된다.

캄보디아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품에 노란 아기를 안은 미국 여배우의 커다란 사진한장.

토마시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碑文) 하나. 그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원했다.

베토벤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우울한 목소리로 "Esmuss sein!"이라고 말하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헝클어진머리에 침울한 표정을 한 남자.

프란츠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 하나. 오랜 방황 끝의 귀환.

그리고 그다음도 또 계속될 것이다.
잊히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환승역이다. - P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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