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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평점 :
헉, 분량이 어마어마하다. 한 권으로 되어 있는데 800페이지가 넘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 손으로 들고 읽기에는 그 무게가 장난이 아닌 책이다. 개인적으로 분량이 많은 책을 선호하는 편이라 읽기도 전에 벌써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이 책의 장르가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했다. 30년 전에 죽은 제이. 그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그려지며 그를 살해한 진범이 누구인지, 무슨 이유로 그를 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읽지 않았는데 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제이를 죽인 범인과 그 동기를 너무 쉽게 알 수 있었다. 꼭 집어서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부분은 중반 정도에 나오지만 앞부분만 읽어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구조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사회소설이라고 보아야 하나? 다윈 영이 다니는 프라임스쿨의 법학 시간에서 다루는 문제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과 씨앗에 비유하면서 자신들의 입맛대로 법을 만드는 1지구인들의 행태를 정당화하는 법학교수와 이에 대항하는 레오의 이야기나 다윈 영이 아버지와 9지구에 관해 나누는 대화 등은 분명 사회적인 요소들, 그것도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분명 사회소설적인 요소들이 보이지만 그렇게 깊이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소설로 보기에도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소설에서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소설을 계속해서 읽다보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다름 아닌 인간 자체라는 생각하게 된다.
30년 전에 살해당한 제이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이중적인지를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재판관 제이라는 말이 처음에는 상당히 우호적인 별명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제이의 본 모습이 드러나면서 오로지 자신의 잣대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제이만이 아니다. 다윈 영의 아버지 니스나 할아버지 러너도, 삼촌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겠다고 나선 루미도, 자유를 갈망하며 자식에게서조차 벗어나야 한다는 버즈와 그의 아들 레오도 모두가 오로지 자신의 생각 속에 갇힌 채 상대방을, 세상을 바라본다.
다윈 영은 어떤가? 그는 이런 면에서 자유로운 존재인가? 글쎄다. 처음부터 다윈 영은 호감이 가는 인물이 아니었다. 순수하다고 느껴지기보다는 마냥 순진하기만 한 바보 같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던 건 내가 구제할 수 없는 속물이기 때문일까? 이것도 그저 나만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를 바라본 것일까?
가족의 비밀을 알아버린 다윈. 그는 어떻게 변해갈까? 다윈의 미싱 링크는 무엇일까? 다윈의 모습이 정말로 인간의 본질을 들려주고 있는 걸까? 자기중심적인 소설 속 인물들이 정말 인간의 본질인 걸까?
수많은 생각이 오고갈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