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 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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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직은 내 입술에 품을 수 없는 그 말, <<당신>>

 

모든 말이 그렇겠지만 당신이라는 말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쓰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상당히 달라진다. “당신 같은 사람이 도대체 뭘 알겠어.”라는 표현에서의 당신은 상대방을 은근히 깔아뭉개는 심리가 담겨있다. 반면에 당신 사랑하는 내 당신 둘도 없는 내 당신, 당신 없는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라는 노랫말에 나오는 당신이라는 표현에는 가벼운 음조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 대한 애절한 마음이 깊게 깔려있다. 마치 주호백과 윤희옥의 사랑을 말해주듯이 말이다.

 

소설 초반부를 읽을 때에는 사실 울컥하는 마음이 앞섰다. 주호백을 대하는 윤희옥의 매몰찬 모습 때문이다. 물론 윤희옥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김가인과의 아픔이 남아있는데 어찌 쉽게 다른 사람이 마음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나 역시,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와 같은 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적이 있기에 어느 정도 그녀를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이마저 내팽개치고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에는 솔직히 공감보다는 반감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점차 묘해진다. 치매로 깊은 숨겨두었던 주호백의 마음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윤희옥의 깊은 사랑이 시작된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깊은 사랑은 그만큼 위험하다는 걸 아는데 너무 오래 걸렸어요.”(p.15-16)

 

무의식중에 드러난 주호백의 고백이 무엇이었기에 윤희옥의 얼음장 같았던 마음이 돌아설 수 있었을까? 어떻게 모든 것을 바치는 열정적인 사랑을 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렇게 경멸해마지 않았던 사람인데.

 

인혜와 내가 공통으로 가진 회한이 있다면 사랑이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자기희생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그 점일 터였다. (p.193)

 

단지 나를 행복하게 하려고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고난에 맞서 내가 얼마나 인내할 수 있는지, 상처에 맞서 내가 얼마나 관용할 수 있는지, 그로써 어떤 법열을 얻어내는지 증명해 보이려고 사랑을 하는 거지요. (p.231)

 

그렇다. 주호백이라고 왜 마음에 상처가 없었겠는가. 그 마음에 얼마나 거센 분노의 불길이 솟구쳤겠는가.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거세게 일어나겠는가.

 

하지만 그는 마음속에 이는 그 모든 풍랑을 가라앉힌다.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모든 고통을, 걷잡을 수 없는 아픔을 견뎌낸다. 그것이 그에게는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평생에 걸쳐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자신의 집을 지었기에 말이다.

 

당신 가슴속에 내가 집 하나를 지었소. 고대광실로다가. 죽은 다음에도 들어가 살 집. (p.267)

 

온갖 풍파 속에서 평생에 걸쳐 가슴 한견에 세운 집, 바로 당신. 그러니 당신이라는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녹아내려있을까. 얼마나 많은 아픔이, 고통이, 행복이, 사랑이 어우러져 있을까.

 

그런 당신을 향한 사랑이기에 결국은 생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죽음 뒤에서도 함께 하는 그런 사랑.

 

사랑은 단지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게 아니라 생명 자체를 함께하는 거라는 사실을 배운 거지. 나는 그의 숨결이 되었고 아빠 역시 나의 숨결이었어. (p.217)

 

내게도 그런 당신이 있다. 아직은 주호백처럼 당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말 정말 불러보고 싶다. 당신이라고. 나의 또 다른 생명 당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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