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박경리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고려해봤을 때 상당히 현대적인 여성들이 많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은하>에 나오는 인희는 이런 현대적인 여성과는 동떨어진 인물처럼 보인다.

 

연인이던 송건수가 미국에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건수의 친구인 강진호에게서 전해들은 인희는 기울어져 가는 사업을 살리고자 홀아비 이성태에게 시집가라고 하는 아버지의 말을 거부하지 않는다. 인희의 마음속에는 강진호에 대한 호감이 있었지만 송건수와의 관계에서 온 허탈함과 죄의식,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 때문에 결국 강진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성태와 결혼하지만 마음이 없는 그들의 관계는 물과 기름과 같을 뿐이다. 한편 인희의 친구 은옥은 남자친구인 이정식이 군대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하여 자신을 찾아오자 함께 동거생활을 시작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이성태와 결혼을 하겠다는 인희의 행동은 솔직히 이해하기 쉽지 않다. 아무리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서 이성태의 도움이 필요하다고는 해도, 또한 송건수의 결혼이 커다란 상처가 되었다고는 하더라도 과연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 또한 강진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숨긴 채 결혼을 하는 인희는 아무리 생각해도 현대적인 여성이라기보다는 조선시대의 규방에 갇혀 지내던 관습에 얽매인 여인네의 모습이다.

 

강진호에 대한 잠재적인 감정을 엄폐하려 드는 자기 자신의 본질이 전혀 외부에서 강요당한 기성 관념의 소산이라는 것을 인희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p.111)

 

인희의 친구인 은옥은 인희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탈영한 정식을 위해 학교마저 그만두고 그를 위해 헌신한다. 하지만 정식의 죽음 이후에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또 다른 삶을 찾아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순간이야. 그 순간을 놓치면 영원히 행복을 잡지 못한다.....나도 이정식 씨 이제 생각 안 할 테야. 내 앞에 기회가 온다면 난 서슴치 않고 잡는다.....(p.232-234)

 

성태나 인희의 계모 연실처럼 감각이나 육체적 본능에 충실한 것과 인희나 은옥처럼 감정에 충실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 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인희처럼 끝없는 죄의식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강을 흘러가면서 서로 만나게 된다. 마치 사람의 수와 같이 많다는 별이 무수히 무수히 흘러가는 은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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