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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해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7월
평점 :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가 해운회사였다. 해운회사 업무 중에서도 선박 운항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선장이나 선원들과 이야기를 나눌 경우가 많았다. 특히 국내에 선박이 들어오는 경우에는 선박을 방문해 배의 이곳 저곳을 돌아볼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작가의 후기에서 밝혔듯이 선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옛날에는 배에서, 특히 원양어선처럼 오랫동안 바다에서 지내야 하는 선박에서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단다. 선장이 경찰권을 가지는 등 선박 자체가 완전히 별세계였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임성순 작가의 <극해>는 포경선 유키마루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려내고 있다.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던 시기에 제4차 남방개발 대표단이 발족되고 각자의 사연을 간직한 채 유키마루에는 일본인, 조선인, 필리핀인, 대만인 등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해군에 식량을 조달하라는 임무를 수행하던 유키마루에 어느 날 정찰 임무가 떨어진다. 기타이오지마에서 정찰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던 유키마루는 미국 정찰기의 폭격을 받아 엔진이 고장 나면서 바다를 표류하게 된다. 엔진을 수리한 후 유키마루는 남극으로 향해 나아가고, 일본인 상급선원과 조선인 등의 하급 선원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더욱 커져만 간다.
이 책에서는 유키마루라는 한정된 공간, 다시 말하면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얼마나 쉽게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갑판장이라는 인물이 새롭게 유키마루에 합류한 하급선원들을 폭력으로 길들인다. 이런 폭력성은 조선인의 반란 이후 필리핀인과 대만인을 폭력으로 대하는 만덕이라는 인물에게서 다시 찾아보게 된다. 그렇지만 과연 이들만이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일까? 이성적으로 모두를 대했다고 스스로를 변명하는 일급 항해사는 어떨까? 그는 폭력과는 거리가 먼 존재일까? 아니면 폭력의 불길을 지피는 불꽃같은 존재일까? 폭력은 결코 누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왜 고통받는 사람들이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것일까? 고통받는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보며 생각한다. 겨우, 그걸 가지고! (p.124)
채찍질 내내 무감했던 조선인들은 순식간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되는 순간이었다. (p.192)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자신과 상관없으면 무관심으로 대하는 이들이 결국 폭력의 동조자인 셈이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학교 폭력, 가정 폭력 등 모든 폭력의 이면에는 이처럼 방관자적인 태도를 보인 이들의 무의식적인 협조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무겁다. 읽는 내내 묵직한 고통이 가슴속을 헤집었다. 깨끗하고 순수했던 영혼이 변해가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통증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이 바로 내가 만들어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가슴이 무거워지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