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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영역
사쿠라기 시노 지음, 전새롬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사쿠라기 시노는 이번에 <순수의 영역>으로 처음 접하는 작가이다. 작가가 나오키상을 수상한 이후 처음으로 발표한 장편소설이 바로 이 작품이다. 작가 스스로 “현재까지 제 모든 것이 이 작품에 담겨 있다고” 할 정도이니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저절로 높아졌다. 관계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질투라는 감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는 책 소개 내용에 따라 질투라는 감정을 염두에 두고 책을 읽어나갔다.
사랑과 전쟁을 너무 많이 보았나 보다. 작가가 그려낸 질투는 치정에 얽힌 선정적인 남녀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 전반에서 질투라는 감정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글 마지막 부분에 있는 표현으로써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질투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질투란 멈출 듯 반복해서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백 명이면 백 가지 형태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세기로, 혼자만의 시간을 괴롭힌다.’ (p.372)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다. 질투는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혼자 속앓이를 하며 괴로워하게 만들기도 한다. 또한 질투는 남녀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상사와 부하직원, 형제자매 사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로뎅과 카미유 클로델의 관계를 보라. 연인이자 스승과 제자 사이였던 그들이었지만 탁월한 능력을 지닌 카미유 클로델을 향한 로뎅의 질투가 어떤 비극을 일으켰는지를 돌이켜보라. 이 작품에서도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준카와 그녀를 향한 류세이의 질투는 시종일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그려지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예기치 못한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질투심이라도 인간에게 꼭 필요한 소중한 감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질투심이 없다는 게 이토록 슬픈 일인 줄 몰랐다. 인간으로서 뭔가 소중한 게 누락되어 있다. (p. 307)
이 작품에서 내가 주목했던 또 다른 주제는 ‘순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였다. 이 책에서 순수로 대변되는 이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준카이다. 하지만 발달장애를 지닌 준카가 류세이의 전시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후 작가가 그려낸 준카의 모습을 보면서 순수라는 느낌보다는 순진하다는 느낌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 순진과 순수,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예전에 순진과 순수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로 맑은 물이 가득 든 컵(순수)과 비어있는 투명한 컵(순진)을 비교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둘 다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하고 맑지만 물이 담긴 컵에는 더 이상 다른 무언가가 들어갈 틈이 없지만 빈 잔에는 깨끗하고 투명한 물이 담길 수도 혹은 더러운 무언가로 채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순수와 순진은 다르다. 그런데 내가 본 준카는 순진한 존재였지 순수한 존재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에 난 구멍인 달을 보며 미움을 얘기하던 준카(순진한 준카)가 요시후미와 이야기하면서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하늘에 난 구멍에 넣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준카의 순수함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의 심리와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세밀히 묘사하면서 전반부에는 잔잔한 흐름을 보이다가 후반부에 들어 예기치 못한 반전을 보이며 또 다른 방향으로 작품을 이끌어나간다. 담담하지만 가슴 한켠이 저미는 듯한 공감의 아픔을 느끼게 해 준 이 책은 나를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을 향해 떠나가는 여행자이면서도 이 작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관광객으로 변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