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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타자기 ㅣ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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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한다. <기린의 타자기>라는 제목에 먼저 떠오른 건 우습게도 이광수씨였다. 딸아이가 런닝맨 광팬이라 매주 정규 방송을 보는 걸 넘어서 매일같이 한 편씩 보다보니 기린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광수씨가 떠올랐다. 물론 이 소설에서 말하는 기린은 이광수씨가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린은 상상 속의 동물 기린을 가리키는 단어로 ‘재능이 남다른 사람’이라는 의미에 더해 서영에게 ‘이 타자기로 네 상상력을 마구 쏟아내길 바란다’라고 말하는 친구 우탁의 마음이 담긴 뜻이다.
제목만 놓고 보면 뭔가 밝고 희망찬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데 소설 속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내용이다. 기린의 타자기를 받은 서영과 그녀의 딸 지하의 이야기는 순간 이동을 펼치며 사람들을 구해내는 지하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순간이동?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초능력자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누구나 한 번은 꿈꾸는 초능력이지만 결코 현실에서 가질 수 없는 초능력. 그런 초능력을 가진 지하는 놀랍게도 청각언어장애를 가지고 있다.
지하라는 주인의 이름도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는데 막상 그녀의 엄마인 서영이 지하에 갇힌다는 설정을 읽으면서 굳이 지하라는 이름을 지은 의미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암흑의 공간이라는 걸까?
이 소설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펼쳐진다. 순간이동을 펼치는 능력자로 살아가면서 ‘조용한 세상’이라는 소설을 쓴 지하와 그녀의 엄마인 서영의 현실을 그린 이야기와 ‘조용한 세상’이라는 소설 속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서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서영의 상황은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자라면. 결혼에 도달한 과정도, 그 후에 벌어진 친정 식구들의 모습도, 그녀를 끝없이 괴롭히는 시댁 식구들의 모습도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건 서영, 그녀의 마음이다. 모든 걸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선뜻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엄마 서영을 떠나 순간이동자로 살아가는 지하는 어떨까? 순간이동 능력을 가졌지만 순간 이동을 한 후 기억을 잃어버리고 육체적으로 점점 쇠약해져가는 상황들이 점점 통제 불능이 되어가면서 그 능력이 어느 순간 그녀에게는 족쇄가 되어간다.
기린의 타자기. 엄마의 타자기로 쓴 ‘조용한 세상’에서 지하는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소설과 현실이 다르지 않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자신을 옭아매는 무언가를 뜯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소설의 색깔이 조금씩 변해가는 듯하다. 상상력을 맘껏 펼쳐내라는 의미처럼 그렇게 펼쳐진 이야기이기에 그랬던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