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은이),
장성주 (옮긴이)
비채
2022-04-11
원제 : Parable of the Sower
#김영사서포터즈15기
🌊난이도(내용) 중🥉
🌊흡입력 중🥈
🌊표지관련성 상🥈
🌊창의성 상🥈
🌊추천 상🥇
🌊시점 #1인칭주인공시점
원제는 1993년에 발표된, 2024년이라는 시점을 가진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초공감능력을 가진, 그래서 그것이 약점이 되지 않기 위해 그 능력을 숨기며 사는 여자아이의 일기를 통해 작가는 이야기를 진행한다.
책은 총 4부이며, 영화로 제작되어도 손색이 없을 듯하게 느껴졌다.
2024년은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아이의 생활과 가족을 보여준다.
2025년은 황폐해진 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활을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보여주며 갈등을 고조시킨다.
2026년은 집을 나간 동생이 싸늘하게 돌아오고, 아빠마저 행방이 묘연하게 된다. 그리 자신의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던 모험과 도전 혹은 그것을 빙자한 살고자하는 욕구가 겉으로 드러난다.
2027년은 장벽을 빠져나와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병렬독서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 #글을왜써야할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쓴다고, 누군가는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서, 누군가는 할줄 아는 일이 이 일 뿐이라 쓴다는 등... 여러 이유가 있다.
씨앗에서의 상황은 글을 읽고 쓰는 것조차 능력이 되는 사회다. 그 곳에 자신의 능력이 약점이 될지도 모르는 초공감(超共感) 능력자 글을 쓴다. 시를 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시를 읽어주기를 바란다.
시를 쓰고, 읽은 동안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도 되고, 듣는 자는 그 이야기로 인해 위안이 되고 다음 길을 나가가는 힘을 얻기 때문이다.
각 부가 진행될때마다 시가 나오는데 이 시의 의미를 잘 몰랐다. 그런데 책을 보고나니 절저리하게 읽혔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 곳에는 집이 없었다. 건물이 한 채고 없었다. 거의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다. 산기슭에 널따랗게 나 잇는 시커먼 흔적. 잿더미에서 비죽 붉어진, 개중에는 서로 기대선 것도 있는 불탄 기둥 몇 개. 그리고 높다란 벽돌 굴뚝 한 개가 외로이 시커멓게, 오래된 묘지 그림 속 묘비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뼈와 재 사이에, 묘비처럼.
온갖 질문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질문이 한 장 한 장 넘길때마다 생긴다.
환경 파괴(破壞)는 어디까지 인간을 몰아 세울 수 있는가?
환경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극악한 상황에 인간의 적응력(適應力)은 어디까지 인가?
파괴된 환경과 그 사이에 살아남은 인간사이에 어떤 감정이 존재하는가?
과연 신(神)이 있다면 신(神)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신인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나약한 인간종이 명맥(命脈)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이 만든 지구의 파멸(破滅)을 인간이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왜 하필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는 종이 되었던가?
희망이라는 단어가 아닌 삶이 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
‘초공감(超共感) 능력자’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근데, ‘초공감(超共感) 능력자’라는 주인공이 느끼는 공감 능력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 아닌가?
초공감(超共感) 능력자 라고 말하며 공감능력을 등안시 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아닐까?
주인공이 느끼는 그런 공감은.... 이게 초공감인가??
.179 어제 키스가 집에 왔다. 전보다 훨씬 더 자란 모습이었는데, 키도 덩치도 커다란 아빠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266 어젯밤, 내가 탈출하면서 본 우리 동네는 불타고 있었다. 집도, 나무도, 사람들고, 활활 탔다.
.478 바람이 그러하듯, 물이 그러하듯, 불이 그러하듯, 생명이 그러하듯 하느님 또한 청조적인 동시에 파괴적이고, 요구하는 도시에 베풀며, 조각가인 동시에 찰흙이다. 하느님을 무한한 잠재력이다. 변화가 곧 하느님이다. -<지구종: 산 자들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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