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내력 - 제11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오쿠이즈미 히카루 지음, 박태규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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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기억과 상처에 관한 일본 소설, 영화를 접하면 기분이 상할 때가 많다. 특히 "평화"를 내세운 재현물들 중 상당수는 일본을 피해자로 위치시키면서, 스스로가 저지른 가해의 기억들을 삭제하거나 누락시킨다. [반딧불의 묘], [버어마의 하프] 같은 영화는 텍스트 그 자체로 볼 때는 나무랄 점이 없을 수도 있겠으나, 그 텍스트를 역사와 맥락 속에 바라볼 때, '문제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1인칭 자아의 나르시스적 멜랑꼴리에 빠져있는 일본의 모습에서 또 다른 폭력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고나 할까.

오쿠이즈미 히카루의『돌의 내력』은 위의 재현물들과 똑같이 자신들이 벌인 전쟁으로 인해 스스로 겪은 상처, 그리고 세대를 거쳐 재생산되는 상처와 폭력을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작가의 문제 의식은 정확하게 일본인이 저지른 폭력을 겨냥하고 있다. 물론 폭력의 재생산의 출발점은 전쟁 당시 일본군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저지른 폭력이 아니라, 일본군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상의 경험에서 출발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일본군이 드디어 미군에 의해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던 그 무렵, 필리핀 레이테 섬에 고립된 일본군들은 동굴 속에 숨어서 기아와 부상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이 죽음 직전의 상황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사항전이라는 명분을 위해 움직이던 그들은 얼마 되지 않는 식량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끼리만 나눈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칼이나 총으로 죽이는 일이 시작된다.

극한 상황에서 동료들을 죽여야 했던 경험, 아마도 그것은 전쟁을 통해 타자의 생명을 죽이는 경험을 통해 획득된 '살인에 대한 둔감성'이 필연적으로 내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이었으리라.

『돌의 내력』의 첫부분을 읽다보면, '돌'에 관한 저자의 박식함과 꼼꼼하고 섬세한 문장력으로 미루어 짐작하여 이 책이 그저 '돌'에 꽂힌 한 제대 군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인줄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중반을 넘어서면서 주인공의 아들이 갑자기 살해당하는 시점에서부터 이야기는 '추리'와 '미스테리'의 성격을 띠면서, 과거와 현재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전쟁의 기억과 상처라는 이슈를 부각시킨다.

어린 시절 아동 학대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3명의 주인공이 비극적 결말을 향해 치달아 가는 내용을 다룬 텐도 아라타의 『영원의 아이』가 떠올랐다. 짧은 식견이긴 하나, 기억과 상처를 다루는 일본 소설이나 영화는 유독 추리물의 형식을 취하는 것들이 많다.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그것이 서로 교차되고 맞물리면서, 양자가 서로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하면서, 미래의 비극적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형식의 내러티브 구조.

왜 이런 내러티브 구조를 취할까? 그게 궁금했더랬다. 삶의 미스테리를 풀어가기 위한 이러한 공유된 서사 구조는 단지 단지 드라마틱한 흥미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듯 하다. 그게 일본인 특유의 어떤 정서 구조, 언어 구조에서 연원한 듯 싶다. 누가 이 문제에 대해서 아는 바 있는 사람 있으면 갈카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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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리차드 세넷 지음, 조용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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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o의 딜레마를 보다 포괄적으로 규정한다면 단기 자본주의 때문에 그의 인간성, 특히 다른 사람과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지속 가능한 자아(sustainable self)의 의식을 간직하는 인간성의 특징들이 훼손될 위기에 천한 것이다...(중략)...그가 말하는 문화적 보수주의는 과거를 답습하자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면서 잃어버리고 있다고 느끼는 일관성을 유지하자는 것 뿐이다.


- 리처드 세넷의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중에서 -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에서 리처드 세넷은 급속한 이익 실현을 바라는 이른 바 '조급한 자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에 대한 통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노동자들은 자신이 남의 노동에 기생해서 먹고 사는 신세가 아니라는 것(기생충 이데올로기)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온갖 부류의 지식은 물론 사업 개념, 제품 디자인, 경쟁 기업 정보, 자본 설비 등의 신뢰 수명(credible life span)이 점점 단축 되고 있는"(존 코터) 이 신경제에서 "자신의 일을 통해 도덕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늘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인간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상품의 신뢰 수명이 짧아진 만큼 인간의 자기 신뢰나 인간 간의 상호 신뢰의 수명은 더욱 짧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무엇일까? 양자는 각각 어떤 가치를 추구하기에 그런 단어로 자기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일까? 리처드 세넷은 그가 훈련받은 학계의 건조한 사회과학 학풍에도 불구하고 '낮은 곳으로 임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글을 계속 생산해 왔다. 1970년대 초 조나단 콥과 함께 미국의 노동 계급을 분석한 [계급의 숨겨진 상처(The Hidden Injuries of Class)]라는 책에서 그는 시내 중심가 사무 빌딩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엔리코'와 인터뷰 했고,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에서는 그때 인터뷰했던 엔리코의 아들 '리코'와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탈리아계 이민자이자 블루 칼라 노동자인 엔리코의 공부잘하는 자랑스런 아들 리코는 미국 사회 중산층 진입에 성공한 중견 컨설턴트가 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우연히 리코와 만난 리처드 세넷은 리코가 끼고 있는 '명문가 출신임을 표시하는 인장 반지'를 보고는 리코가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나는 리처드 세넷이 들려준 이민자 출신 블루 칼라 노동자 계급에서 아메리칸 드림이자 가족의 염원인 계급 상승의 꿈을 실현한 리코에 대한 이야기에서 '진보'와 '보수'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블루 칼라 노동자의 아들 리코가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아버지 세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자본주의적 상황에서 한 단계 계층 업그레이드를 하고, 그 계층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문화적 보수주의자'고 규정해 가는 과정은 눈여겨 볼 만하다. 매순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언제든 아웃당할 수 있는 지속적 긴장의 상황, 변화에 적응가능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변화까지도 창출가능한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사람들은 그 이데올로기를 추구하지 않으면 생존자체가 힘겹다. 일터의 평등과 우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언제든 박살날 수 있다. 리처드 세넷은 개인의 능력으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는 우애와 평등, 신뢰라는 인간성이 심하게 훼손된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인지적 불협화음(cognitive dissonace)'라는 개념을 통해 멋지해 분석한다. 승자만을 위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험을 하느냐 마느냐'라는 모험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어떤 갈등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주의력은 멀리 내다보기 보다는 임박한 환경에 고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집중을 사회심리학에서는 의미 파악에서 갈등적 심리 상태를 뜻하는 '인지적 불협화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초점 고정은 모든 고등 동물에게서 발견되는 위험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가령 토끼의 눈은 여우의 발톱에 고정된다"

신자유주의의 '유연한' 변화 요구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순간 자신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 불안해 하면서 그 변화의 요구에 열심히 부응하게 만든다. 토끼는 "너의 가치는 네 변화 능력에 있거든!"이라는 주문을 외는 여우의 입에 고정되고, 토끼들은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면서 그 주문의 요구에 따른다. 이렇게 보면 결국 리코의 보수주의는 위험 상황에 종속된 자들의 역설적인 자기 보호 본능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역설적인 것은 위험 상황을 만든 원흉의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일종의 반작용이기 때문이다. 한편 리코의 보수주의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자신의 훼손된 인간성 앞에서 지속가능한 자아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즉 케인즈경제학이 폐기처분되고 신자유주의가 등극하면서 '지속 가능한 자아'는 위협받게 되었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인간성의 파괴 상황에서 상처받는 자아, 훼손된 자아, 트라우마를 갖게 된 자아들은 '보수'라는 이름으로 자아의 지속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심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심성 자체가 만들어내는 역설은 부당 해고, 노동 착취 등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제물이 되는 상황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잃어버린 자존감에 대한 향수를 꿈꾸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회복'이니 '잃어버린'이니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일견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회복이라는 것, 잃어버렸다는 것은 과거에는 그것을 향유했다는 것,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자기 신뢰와 인간 간의 상호 존중과 신뢰의 가치를 경험한 바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했던 방식으로 그것을 되찾길 꿈꿀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성장하고 자란 신세대, 새로운 기성세대들이 그것을 과거에 어떤 방식으로 경험했을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이제 자본주의적 급이 만들어내는 상처는 분명 과거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대량생산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불법노동착취와 저임금으로 고통받던 풍경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신분으로 등장한 정규직의 노동력 착취와 노동쟁의 일체에 대한 불법화로 전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성 자체의 출현 양상이 변화되고 있다. 지속가능한 자아와 상호존중의 인간성을 그리워하는 심성은 '보수'라는 이름을 표방하고 있긴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급진적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그리워하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할 뿐이다. 이제 여우의 입에 고정된 시선을 거두어 더 멀리 더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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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 여성주의로 본 유교
이숙인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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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을 찾아간다는 것은 ‘현재’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현재의 발생적 시초를 이해하게 해 주는 동시에, 현재에 대한 발본적 해석과 개입의 지점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의 6장과 7장은 동아시아 고대의 인간 생존 시스템, 국가의 통치 체제와 이념, 혼인 및 가족 제도, 정체성이 어떻게 서로 맞물려 형성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어쩌면 이 책은 ‘성별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문명적 인간’의 기원에 대해『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가 보여준 훌륭한 통찰력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집중 조명한 책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 생산된 개념과 지식 체계를 통해 한국 사회를 그리고 ‘나’를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은 한국 사회와 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국지적․이데올로기적 사상의 기원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고대의 혼인 사상을 살펴보면 사회 체제가 유교 가부장제를 중심으로 하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의 전후 맥락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책에서 제시된 중국 고대 사회의 혼인 사상을 간략히 요약해 보고자 한다. 춘추시대의 혼인 풍습에서는 남자가 여자의 동부 자매 및 동족의 자매들과 동시에 혼인 하는 ‘제잉제’가 합법적이었고, 아버지의 여자 또는 친속의 처와 사통하는 형태의 ‘증보’가 공공연하게 일어났다. 또한, 이혼을 가리키는 용어도 다양한 것으로 보아, 그 시대에는 이혼이 일상화되어 있고 혼인 관계의 성립과 해체가 자유로웠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춘추 시대의 혼인 풍습을 보건데 이 시기에는 ‘동성불혼, 중매혼, 처첩 분변’ 등 혼인상의 질서 확립에 주력했던 종법제가 아직 자리 잡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시기의 특수성은 문명화 이전의 ‘무질서한 원시’와 유교적 질서가 자리 잡히는 ‘문명화된 시기’와의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유교 가부장제의 정착으로 향하는 이행 단계로서 이 시기엔 원시 군혼의 풍습이 부권적 전통에 부합하도록 변형되어 가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송조린’에 따르면, 이 시기의 과도기적 성격을 혼인 풍습과 원시 시대 군혼(공부, 공처)과의 차이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부’, ‘공처’ 등 원시 군혼제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원시시대 군혼과는 달리 배타성을 지닌다. 둘째, 성적 대상이 일부일처제에 비해 고정적이지 않다. 셋째, 여자가 남자에게 시집오는 혼인형식을 지향하는 과정 중에 있다. 즉 당시 지배층이 혼인을 정치적 세력 확장을 위해 적극 활용했던 ‘제잉제’는 공부나 공처라는 군혼의 풍습을 부권적 전통에 부합하도록 변형한 것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웠던 점은 고대인들이 원시 고대 사회를 ‘무질서와 혼란’의 시대로 규정한 이유는 남녀 및 부부 사이의 질서가 갖춰지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았고, 문명과 질서는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상군서], [여씨춘추], [관자], [백호통]의 저자들은 문명과 미개의 차이가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가”의 여부라고 보았다. 당시 혼인의 목적이 계보를 이어줄 자손을 얻는 것이었으며, 혼인과 가족 제도는 부계 가문의 번영과 혈통의 계보를 중시하는 제도와 사상이 범국가적 통치 체제로 자리 잡게 되는 토대와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해 지는 시점은 사유재산, 가족, 국가의 발생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본 엥겔스의 통찰력이 연상되는 부분이었다. 엥겔스는 인간의 생존과 주거 방식이 유목채집에서 농경목축의 정착형으로 변화되면서 사유재산이 생기고, 이를 물려주기 위한 부계가족제도가 형성되면서 부계혈족을 유지하기 위한 여성의 성과 재생산에 대한 통제가 시작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禮에 표현된 고대인의 혼인 사상은 부계의 계보를 확인하고 생산하는 것이 그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은 엥겔스의 주장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국가의 통치 체제와 이념이 가족 제도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점에서도 맞닿아 있다.


유교 가부장제의 혼인 및 가족 제도가 자리 잡는 바로 이 시점에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질문이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었다. 원시 군혼제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한 의식과 관념이 생겼고, 그 중요성은 혼인의 목적을 부계 가문의 번영과 혈통의 계보를 잇기 위한 것으로 보는 의식에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혼인 제도와 함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한’ 남녀 관계에 대한 규율과 통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즉 이 시점은 남성의 자아에 대한 전근대적 내러티브와 여성의 인격에 대한 이분화와 성통제가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혼인을 통해 여성의 존재는 남편의 가문을 이어줄 자식을 낳고 기르는 역할을 중심으로 규정되었고, 혈통과 재산을 상속해줄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여성의 순결과 정숙함, 인격에 대한 상세한 도덕율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춘추좌씨전]에서 볼 수 있듯이 나쁜 여자의 여러 유형이 제시되고, 여성의 몸가짐과 순결을 중시하는 여성성의 규범이 정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혼인제도와 가족제도를 규율하는 질서 개념과 도덕률은 한편으로는 인간 개인을 설명하는 내러티브의 중심축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통치 이념의 근간이 된다는 점이다. 우선 이 시기의 혼인 사상과 가족 사상을 살펴보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전근대적 개인성의 설명 체계, 즉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아버지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oo 가문의 oo대 손으로서...”라는 방식의 자아 내러티브의 기원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혼인관계로부터 만들어진 남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규정, 거기에서 파생된 ‘군신.붕우.상하 등’의 남성성 개념이 국가 질서의 근간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7장에서 보여준 바, 부계혈족에 근간한 가족 제도와 가족 성원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인간관계의 규범들을 주축으로 하는 이른바 가부장제 가족의 탄생은 “군주는 나라의 지존이고 아버지는 가정의 지존”이라고 하는 국가 경영 이념과 연결선상에 있다.


서구의 사회과학 학문 시스템에서 사회(the social) 및 개인(the individual) 개념은 서로 따로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는 구성적 개념으로 설명된다. 이 책의 미덕은 방대한 동아시아 고대의 자료를 통해 근대 학문 체계에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는 인간 개인의 성별성과 자의식, 그리고 도덕률이 어떻게 가족 및 국가 체제의 형성, 통치 이념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주 세밀하고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통해 생긴 질문은 엥겔스가 경제적 관점으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과 더불어 성별성을 설명했듯이, 만약 ‘경제’라는 프리즘을 통해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을 살펴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만약 유교 가부장제를 그러한 프리즘으로 새롭게 조명한다면, 매우 흥미로운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2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발판으로 삼아 유교 가부장제에 대한 다양한 조명과 분석의 글들이 생산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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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나의 것 - 어린이 성폭력 예방의 첫걸음 어린이 성교육 시리즈 1
린다 월부어드 지라드 글, 로드니 페이트 그림, 권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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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어른들에게


어린이 성폭력 예방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해하는 일에서 출발합니다.


이 책은 성폭력은 누구에게나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이 문제를 화재나 교통사고처럼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어린이 안전의 문제로 접근합니다. 이러한 접근은 어린이들에게 불특정 다수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을 심어주지 않으면서도, 발생가능한 문제에 대해 효과적인 대응력을 키워줄 수 있습니다.


가해자가 낯선 사람이 아니라 주변 사람일 경우, 그리고 선물이나 회유 등의 수단을 이용할 경우, 어린이는 이를 ‘폭력’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어린이 성폭력은 아는 사람에 의해서 발생하기 때문에 반복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따라서 어린이 성폭력 예방을 위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조치는 피해 초기 단계에서 어린이와 보호자가 이를 빨리 인지하여 피해를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사건 발생 초기 단계에서 어린이와 보호자의 성폭력 대응력을 키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첫째, 어린이 스스로 성폭력 문제를 감지할 수 있는 인지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구체적으로 자신의 몸에서 다른 사람이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는 곳이 어느 곳인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거기', '아래', '밑' 같은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어깨', 팔', '다리'처럼 신체 부위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지칭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여성과 남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보지', '자지'라는 단어는 욕이나 비속어로 사용되어 불쾌감을 일으키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잠지', '찌찌', '고추'처럼 성기를 지칭하는 '아기말'이 대신 사용되기도 합니다. 아이가 직접 자신의 성기에 특별한 이름을 붙여 주거나 보호자와 함께 이름을 지어 함께 사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물론 이렇게 자신이 직접 붙인 이름은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사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어린이에게는 자신의 성기에 대한 인지와 함께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 감각을 부여해 줍니다. 성기가 이름이 없는 모호한 곳으로 남아 있는 한 어린이는 성기와 관련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지하거나 표현하기 어려우며, 성기가 아이에게 부끄럽고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남아 있는 한 어린이는 성폭력이 발생하더라도 도움을 요청하기 어렵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줄리는 자신의 성기와 엉덩이는 자기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곳이며 다른 사람이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나만의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나의 것’ 즉, 소유 개념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인격, 결정권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차원의 훈련입니다.


둘째, 어린이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과 의견을 먼저 이해하고 존중하도록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대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거나, 친한 사람인 경우, ‘싫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린이에게 무척 어렵습니다. 또한 상대방에 대한 좋은 감정과 신체 접촉에 대한 거부감 사이에서 어린이는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성폭력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지속되거나 악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책은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신체 접촉에 대해 어린이가 혼란을 느끼는 상황을 제시하고 그런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보여 줍니다. 줄리 부모님처럼 어린이의 감정과 인격을 존중하는 환경이 갖추어질 때 성폭력은 예방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의 몸과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일, 그것은 성폭력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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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도 괜찮아 - 성폭력 피해를 입은 어린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어린이 성교육 시리즈 2
제시 지음, 권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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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서문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의 약 20%가 13세 미만의 유아 및 어린이를 대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전체 성폭력의 80% 가량이 아는 사람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피해자가 유아나 어린이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의 경우, 동네 사람, 친척, 유치원이나 학원 관계자 등 주변인에 의한 피해가 가장 높게 나타나며, 전체의 25%가 미성년 가해자에 의해 발생합니다.


어린이 성폭력의 대처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피해 상황을 빨리 인지하여 더 이상 피해가 지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는 아직 성폭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가해자로부터 비밀유지의 위협을 받아 부모나 주변인에게 알리지 못하기 때문에 피해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폭력은 침묵 속에서 은폐되면 가해행위 자체가 중단된다고 해도 후유증은 성인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습니다.


피해 사실이 드러났을 때 보호자를 비롯한 주변인의 태도 역시 중요합니다. 피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보호자들은 아이에게 일어난 일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가해자가 가까운 사람일 경우 당황한 보호자는 아이의 말이나 반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러한 태도와 함께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거나 “여성으로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태도 역시 피해 어린이의 입을 다물게 하고, 이후 어린이가 건강한 삶을 찾아가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보호자나 어린이 스스로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치유의 첫걸음입니다. 이 책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하는 것 자체가 어린이에게 얼마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피해 어린이의 목소리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린이가 피해 사실을 말하면, 우선 어린이의 말을 믿고 안심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언어보다는 행동과 태도를 통해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하기 때문에 어린이가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거나 퇴행 행동을 보일 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린이가 피해 사실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어린이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따뜻하게 보듬어 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아이를 보호해 주지 못한 책임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겨 심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어린이 성폭력은 결코 보호자의 책임이 아닙니다. 부모 자신이 받은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성폭력 피해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데 가장 큰 힘은 치유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책은 어린이에게도 피해를 극복할 힘과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힘은 어린이가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어린이 스스로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는 환경, 그것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준다는 측면에서 예방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피해 상황에 대해 대처하고 적절한 치유를 가능케 한다는 측면에서 어린이 성폭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처방안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가는 일은 우리 사회 전체의 책임입니다. 이 책은 어린이 나아가 모든 사람이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적지 않게 기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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