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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 여성주의로 본 유교
이숙인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5년 2월
평점 :
기원을 찾아간다는 것은 ‘현재’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현재의 발생적 시초를 이해하게 해 주는 동시에, 현재에 대한 발본적 해석과 개입의 지점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다.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의 6장과 7장은 동아시아 고대의 인간 생존 시스템, 국가의 통치 체제와 이념, 혼인 및 가족 제도, 정체성이 어떻게 서로 맞물려 형성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어쩌면 이 책은 ‘성별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문명적 인간’의 기원에 대해『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가 보여준 훌륭한 통찰력을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집중 조명한 책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 생산된 개념과 지식 체계를 통해 한국 사회를 그리고 ‘나’를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은 한국 사회와 개인을 구성하고 있는 국지적․이데올로기적 사상의 기원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고대의 혼인 사상을 살펴보면 사회 체제가 유교 가부장제를 중심으로 하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의 전후 맥락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책에서 제시된 중국 고대 사회의 혼인 사상을 간략히 요약해 보고자 한다. 춘추시대의 혼인 풍습에서는 남자가 여자의 동부 자매 및 동족의 자매들과 동시에 혼인 하는 ‘제잉제’가 합법적이었고, 아버지의 여자 또는 친속의 처와 사통하는 형태의 ‘증보’가 공공연하게 일어났다. 또한, 이혼을 가리키는 용어도 다양한 것으로 보아, 그 시대에는 이혼이 일상화되어 있고 혼인 관계의 성립과 해체가 자유로웠던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춘추 시대의 혼인 풍습을 보건데 이 시기에는 ‘동성불혼, 중매혼, 처첩 분변’ 등 혼인상의 질서 확립에 주력했던 종법제가 아직 자리 잡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시기의 특수성은 문명화 이전의 ‘무질서한 원시’와 유교적 질서가 자리 잡히는 ‘문명화된 시기’와의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유교 가부장제의 정착으로 향하는 이행 단계로서 이 시기엔 원시 군혼의 풍습이 부권적 전통에 부합하도록 변형되어 가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송조린’에 따르면, 이 시기의 과도기적 성격을 혼인 풍습과 원시 시대 군혼(공부, 공처)과의 차이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부’, ‘공처’ 등 원시 군혼제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원시시대 군혼과는 달리 배타성을 지닌다. 둘째, 성적 대상이 일부일처제에 비해 고정적이지 않다. 셋째, 여자가 남자에게 시집오는 혼인형식을 지향하는 과정 중에 있다. 즉 당시 지배층이 혼인을 정치적 세력 확장을 위해 적극 활용했던 ‘제잉제’는 공부나 공처라는 군혼의 풍습을 부권적 전통에 부합하도록 변형한 것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웠던 점은 고대인들이 원시 고대 사회를 ‘무질서와 혼란’의 시대로 규정한 이유는 남녀 및 부부 사이의 질서가 갖춰지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았고, 문명과 질서는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상군서], [여씨춘추], [관자], [백호통]의 저자들은 문명과 미개의 차이가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가”의 여부라고 보았다. 당시 혼인의 목적이 계보를 이어줄 자손을 얻는 것이었으며, 혼인과 가족 제도는 부계 가문의 번영과 혈통의 계보를 중시하는 제도와 사상이 범국가적 통치 체제로 자리 잡게 되는 토대와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해 지는 시점은 사유재산, 가족, 국가의 발생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본 엥겔스의 통찰력이 연상되는 부분이었다. 엥겔스는 인간의 생존과 주거 방식이 유목채집에서 농경목축의 정착형으로 변화되면서 사유재산이 생기고, 이를 물려주기 위한 부계가족제도가 형성되면서 부계혈족을 유지하기 위한 여성의 성과 재생산에 대한 통제가 시작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禮에 표현된 고대인의 혼인 사상은 부계의 계보를 확인하고 생산하는 것이 그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은 엥겔스의 주장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국가의 통치 체제와 이념이 가족 제도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점에서도 맞닿아 있다.
유교 가부장제의 혼인 및 가족 제도가 자리 잡는 바로 이 시점에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질문이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었다. 원시 군혼제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한 의식과 관념이 생겼고, 그 중요성은 혼인의 목적을 부계 가문의 번영과 혈통의 계보를 잇기 위한 것으로 보는 의식에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혼인 제도와 함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한’ 남녀 관계에 대한 규율과 통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즉 이 시점은 남성의 자아에 대한 전근대적 내러티브와 여성의 인격에 대한 이분화와 성통제가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혼인을 통해 여성의 존재는 남편의 가문을 이어줄 자식을 낳고 기르는 역할을 중심으로 규정되었고, 혈통과 재산을 상속해줄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여성의 순결과 정숙함, 인격에 대한 상세한 도덕율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춘추좌씨전]에서 볼 수 있듯이 나쁜 여자의 여러 유형이 제시되고, 여성의 몸가짐과 순결을 중시하는 여성성의 규범이 정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혼인제도와 가족제도를 규율하는 질서 개념과 도덕률은 한편으로는 인간 개인을 설명하는 내러티브의 중심축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통치 이념의 근간이 된다는 점이다. 우선 이 시기의 혼인 사상과 가족 사상을 살펴보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전근대적 개인성의 설명 체계, 즉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아버지를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oo 가문의 oo대 손으로서...”라는 방식의 자아 내러티브의 기원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혼인관계로부터 만들어진 남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규정, 거기에서 파생된 ‘군신.붕우.상하 등’의 남성성 개념이 국가 질서의 근간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7장에서 보여준 바, 부계혈족에 근간한 가족 제도와 가족 성원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인간관계의 규범들을 주축으로 하는 이른바 가부장제 가족의 탄생은 “군주는 나라의 지존이고 아버지는 가정의 지존”이라고 하는 국가 경영 이념과 연결선상에 있다.
서구의 사회과학 학문 시스템에서 사회(the social) 및 개인(the individual) 개념은 서로 따로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는 구성적 개념으로 설명된다. 이 책의 미덕은 방대한 동아시아 고대의 자료를 통해 근대 학문 체계에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는 인간 개인의 성별성과 자의식, 그리고 도덕률이 어떻게 가족 및 국가 체제의 형성, 통치 이념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주 세밀하고 정교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통해 생긴 질문은 엥겔스가 경제적 관점으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과 더불어 성별성을 설명했듯이, 만약 ‘경제’라는 프리즘을 통해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을 살펴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만약 유교 가부장제를 그러한 프리즘으로 새롭게 조명한다면, 매우 흥미로운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2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발판으로 삼아 유교 가부장제에 대한 다양한 조명과 분석의 글들이 생산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