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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리차드 세넷 지음, 조용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5월
평점 :
절판
Rico의 딜레마를 보다 포괄적으로 규정한다면 단기 자본주의 때문에 그의 인간성, 특히 다른 사람과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지속 가능한 자아(sustainable self)의 의식을 간직하는 인간성의 특징들이 훼손될 위기에 천한 것이다...(중략)...그가 말하는 문화적 보수주의는 과거를 답습하자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면서 잃어버리고 있다고 느끼는 일관성을 유지하자는 것 뿐이다.
- 리처드 세넷의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중에서 -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에서 리처드 세넷은 급속한 이익 실현을 바라는 이른 바 '조급한 자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에 대한 통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노동자들은 자신이 남의 노동에 기생해서 먹고 사는 신세가 아니라는 것(기생충 이데올로기)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온갖 부류의 지식은 물론 사업 개념, 제품 디자인, 경쟁 기업 정보, 자본 설비 등의 신뢰 수명(credible life span)이 점점 단축 되고 있는"(존 코터) 이 신경제에서 "자신의 일을 통해 도덕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늘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인간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상품의 신뢰 수명이 짧아진 만큼 인간의 자기 신뢰나 인간 간의 상호 신뢰의 수명은 더욱 짧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무엇일까? 양자는 각각 어떤 가치를 추구하기에 그런 단어로 자기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일까? 리처드 세넷은 그가 훈련받은 학계의 건조한 사회과학 학풍에도 불구하고 '낮은 곳으로 임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글을 계속 생산해 왔다. 1970년대 초 조나단 콥과 함께 미국의 노동 계급을 분석한 [계급의 숨겨진 상처(The Hidden Injuries of Class)]라는 책에서 그는 시내 중심가 사무 빌딩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엔리코'와 인터뷰 했고,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에서는 그때 인터뷰했던 엔리코의 아들 '리코'와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탈리아계 이민자이자 블루 칼라 노동자인 엔리코의 공부잘하는 자랑스런 아들 리코는 미국 사회 중산층 진입에 성공한 중견 컨설턴트가 되어 있었다. 공항에서 우연히 리코와 만난 리처드 세넷은 리코가 끼고 있는 '명문가 출신임을 표시하는 인장 반지'를 보고는 리코가 '자신의 아버지를 배신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나는 리처드 세넷이 들려준 이민자 출신 블루 칼라 노동자 계급에서 아메리칸 드림이자 가족의 염원인 계급 상승의 꿈을 실현한 리코에 대한 이야기에서 '진보'와 '보수'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블루 칼라 노동자의 아들 리코가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아버지 세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자본주의적 상황에서 한 단계 계층 업그레이드를 하고, 그 계층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문화적 보수주의자'고 규정해 가는 과정은 눈여겨 볼 만하다. 매순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으면 언제든 아웃당할 수 있는 지속적 긴장의 상황, 변화에 적응가능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변화까지도 창출가능한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사람들은 그 이데올로기를 추구하지 않으면 생존자체가 힘겹다. 일터의 평등과 우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언제든 박살날 수 있다. 리처드 세넷은 개인의 능력으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는 우애와 평등, 신뢰라는 인간성이 심하게 훼손된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인지적 불협화음(cognitive dissonace)'라는 개념을 통해 멋지해 분석한다. 승자만을 위한 시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험을 하느냐 마느냐'라는 모험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어떤 갈등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주의력은 멀리 내다보기 보다는 임박한 환경에 고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집중을 사회심리학에서는 의미 파악에서 갈등적 심리 상태를 뜻하는 '인지적 불협화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초점 고정은 모든 고등 동물에게서 발견되는 위험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가령 토끼의 눈은 여우의 발톱에 고정된다"
신자유주의의 '유연한' 변화 요구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순간 자신의 생존 가능성에 대해 불안해 하면서 그 변화의 요구에 열심히 부응하게 만든다. 토끼는 "너의 가치는 네 변화 능력에 있거든!"이라는 주문을 외는 여우의 입에 고정되고, 토끼들은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면서 그 주문의 요구에 따른다. 이렇게 보면 결국 리코의 보수주의는 위험 상황에 종속된 자들의 역설적인 자기 보호 본능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역설적인 것은 위험 상황을 만든 원흉의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일종의 반작용이기 때문이다. 한편 리코의 보수주의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자신의 훼손된 인간성 앞에서 지속가능한 자아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즉 케인즈경제학이 폐기처분되고 신자유주의가 등극하면서 '지속 가능한 자아'는 위협받게 되었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인간성의 파괴 상황에서 상처받는 자아, 훼손된 자아, 트라우마를 갖게 된 자아들은 '보수'라는 이름으로 자아의 지속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심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이러한 심성 자체가 만들어내는 역설은 부당 해고, 노동 착취 등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제물이 되는 상황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잃어버린 자존감에 대한 향수를 꿈꾸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회복'이니 '잃어버린'이니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일견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회복이라는 것, 잃어버렸다는 것은 과거에는 그것을 향유했다는 것,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자기 신뢰와 인간 간의 상호 존중과 신뢰의 가치를 경험한 바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했던 방식으로 그것을 되찾길 꿈꿀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성장하고 자란 신세대, 새로운 기성세대들이 그것을 과거에 어떤 방식으로 경험했을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이제 자본주의적 급이 만들어내는 상처는 분명 과거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대량생산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불법노동착취와 저임금으로 고통받던 풍경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신분으로 등장한 정규직의 노동력 착취와 노동쟁의 일체에 대한 불법화로 전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성 자체의 출현 양상이 변화되고 있다. 지속가능한 자아와 상호존중의 인간성을 그리워하는 심성은 '보수'라는 이름을 표방하고 있긴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급진적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그리워하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할 뿐이다. 이제 여우의 입에 고정된 시선을 거두어 더 멀리 더 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