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창비시선 305
박후기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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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광

아버지, 검은 입 벌린 채 눈감았다

나는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진달래꽃보다 늦게 병원에 도착한 나는 아버지 다리가
녹슨 레일처럼 구부러지지 않게 두 팔로 힘껏 무릎을 눌
렀다

막장은 벽만 있을 뿐, 바닥이 없었다.
발밑을 파내려가도 눈앞엔 검은 벽, 바닥은 어느새 궁륭
이 되었다.
아버지는 앞만 보고 살았지만, 언제가 뒤가 무너졌다

나는 뻬치까 옆의 카나리아, 연탄가스를 마시며 놀았다
구멍보다 틈이 무섭다는 것을 나는 안다

죽음의 생가(生家)가 텅 비어 있다.


겨울잠 모드에서 벗어나 열공 모드로 전환하기 위해 간만에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동안 놓고 있던 공부를 하다 보니, 그것도 왠 종일 영어로 된 딱딱한 사회과학 서적만 읽다보니 온 몸에 물기가 다 말라버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물기’를 찾아서 서가의 신간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손에 잡힌 책. 시인 박후기의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창비). 제목이 맘에 들었던 것. 밤에 잠자리에 누워 한권을 다 읽고 나서, 그냥 잠이 깨어버렸다.

그의 시는 하나같이 아픔을 담고 있다. 자신의 가족사부터 시작해서, 세상의 온갖 아픔들을 가져와 재료로 삼고 있다. “시라는 게, 문학이라는 게, 세상에 대해서 언어로 세상에 복수하는 거잖아.” 시를 공부하는 한 지인이 이렇게 말하더라. 그 언어가 복수를 향하고 있건 치유를 향하고 있건, 어쨌거나 박후기의 시는 치열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세상의 틈, 바닥, 난간, 모서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앞만 바라보고 살았지만, 언제가 뒤가 무너졌던” 아버지의 삶은 곧 시인 자신의 그것이기도 한 것 같다. ‘검은 입’이라는 단어에서 20대에 읽었던 기형도의 시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왜 그 ‘꽃다운 나이’에 하필 꿀꿀하기 그지없는 기형도의 시를 찾아 읽었을까? 물론 당시 그의 시집이 베스트셀러 반열로 오른 탓도 있을테지만, 어쩌면 사방이 무너져 내릴 듯한 위기감과 불안감에 압도되었던 그 시절, 그의 시가 주는 어떤 위안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나만의 고통이라는 생각은 바로 그 생각 때문에 소외감과 외로움을 자극한다. 그러나 기형도의 시를 읽었을 때, 수많은 세상의 비참에 눈을 뜨면서 오히려 내 고통이 작아지고, 사소해지고,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정당화되는 경험을 했던 것 같다.

마흔이 넘어 20대 내 기억 속의 기형도를 불러오는 박후기의 시를 읽고 나니,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 삶의 무게에 겸허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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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캐피털리즘 - 표류하는 개인과 소멸하는 열정
리차드 세넷 지음, 유병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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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리처드 세넷은 자본주의 질서에 따라 인간의 주체성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경제적 질서와 작업장의 변화와 관련하여 인간성의 변화를 언급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인간’이란 주로 일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즉 노동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초 미국의 노동 계급을 분석한 <계급의 숨겨진 상처(The Hidden Injuries of Class)>, 급속한 이익 실현을 바라는 이른바 '조급한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의 성격(character)이 어떻게 훼손되는지를 조명한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The Corrosion of Character, 1998)>. 이 책, ‘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은 앞서 나온 저서들과 동일한 학문적 궤도(academic trajectory)의 연장선에 있다.

<신자유주의와 인간성 파괴>에서 그는 ‘다른 사람과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지속 가능한 자아(sustainable self) 의식을 간직하는 인간성의 특징들이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부당해고와 노동착취 등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보수적인 심성을 갖게 된다. 그것은 이 위기 속에서 ‘자아의 일관성 혹은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이 책에서는 앞서 ‘지속 가능한 자아의식’의 단절 혹은 훼손이라고 명명한 인간성의 변화를 제도 혹은 ‘관료제’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일터, 노동의 가치 및 성격 변화를 추적하면서 색다른 시각에서 조명한다. 그는 최근의 자본주의 문화가 그 이전과는 매우 다른 유형의 ‘신인류(new man)’를 출현시켰다고 본다.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에서는 기존의 조직이나 관습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독립적 개인, 불안정한 현실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카멜레온처럼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이상적 인간형으로 규범화된다. 기실 이런 분위기에서는 하루 하루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차곡 차곡 자신의 세계를 쌓아가는 사람은 사회 부적응자 혹은 좀 심하게 말하면 (요즘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말로) 루저가 되기 십상이다.

세넷은 과거 사회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노동 윤리가 내포하는 양가성을 인정하면서도 개인의 능력과 가치를 과거의 업적과 경력에 따라 평가하는 ‘장인정신(craftmanship)’이 실종된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그것은 이것이 새로운 노동 윤리, 즉 과거의 업적을 무시하고 미래의 잠재력을 중시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로 대체되면서, 노동 안정성이 붕괴되는 것은 물론 노동자의 인간성 역시 부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책에서 저자는 작업장과 노동자의 정체성 변화를 ‘훼손된 자아의 일관성’을 되돌리고자 하는 반작용, 즉 인간 심성의 보수화로 설명했다면, 이 책에서는 그것을 ‘서사적 삶(narrative life)’의 상실로 명명한다. 세넷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들려주고자 하는 욕구와 능력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하는 사람이 자신이 겪은 경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행위(narrative agency)’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narrative)’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제도화된 시간, 즉 일터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이 짧아지면서 노동 윤리는 이러한 불안정성을 규범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변화되고, 구성원들 간의 소속감은 약화된다. 또한 제도가 주는 귀속성과 안정감을 상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설계해야할지 몰라 허둥지둥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나중의 보상을 위해 절제하던 근검․절약의 노동윤리는 뒷전으로 밀려나게’(p216) 된다는 것이다. 진단과 분석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서사적 삶’의 상실이라는 명명에는 선뜻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의 말대로 서사적 삶을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과 경험들이 축적되는 것’(p218)으로 정의한다면, 서사적 삶의 단절이라는 진단은 적절하다. 그러나 문화적 실천으로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는 더 활성화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정의한 대로, 이야기하는 행위(narrative agency)가 ‘이야기하는 사람이 자신이 겪은 경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라면, 삶이 파편화되고 부유하는 상황이야말로 그 의미를 파악하거나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적극적 행위가 발생하는 시점이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세넷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천박한 문화'는 지속될 수 없다고 본다. 사람이 자신의 일에 헌신할 수도, 일을 통해 스스로 쓸모 있는 존재라고 느낄 수도 없고, 일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경험의 축적이 가능하지도 않는 상황,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의 연속선상에 존재할 수 없는 상황.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아의 서사를 이어나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아의 연속성을 추구하는 문화적 실천이 ‘인간 심성의 보수화’처럼 반동적인 것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세넷은 현재 시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인간임을 느끼게 해주고, 사회적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몇 가지 가능한 대안을 제시한다. 고용 불안정 속에서도 노동자들에게 서사적 삶이 가능하도록 일자리 알선을 포함해 각종 사회복지기능을 담당하는 노동조합, 일자리 나누기, 젊은이들에게 일정한 자립 비용을 제공하는 제도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개인들이 사회에서 밀려나 부유하지 않도록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체(polity)로서 국가와 노동조합에 주목한다.

비판적 논의가 늘 그러하듯 이 책에서도 역시 분석적 논의에 비해 대안은 허약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리처드 세넷의 미덕은 역시 경제학 논의가 간과하는 일상적 삶, 인간성의 양상이 자본주의 질서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조건으로서 ‘서사적 삶’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조명한 것만으로도 이 책은 많은 통찰력을 던진다.

사족. 세넷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그의 글은 생각보다 집중이 잘 안 된다. 왜 그럴까. 이 책에서는 유난히 인용이 많다. 학문의 범주를 넘나들며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동원해 논의를 풀어나가는 건 세넷의 장점이긴 한데, 무릇 모든 것이 그러하듯 과하면 부족한만 못하다. 대중적 글이건 학문적 글이건 인용이 너무 많아지는 건 경계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인용이 저자 자신의 서사를 압도해버리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읽는 사람 입장에서 좀 불만스러운 부분도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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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386 2010-01-0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잘 읽고 갑니다. 세넷에 대한 서평을 종종 모아서 보는 중이라 제 블로그로도 퍼갑니다 (번역가 김홍식의 블로그입니다. http://hsalbert.blogspot.com)

stonewriter 2010-01-1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

albert386 2010-03-0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찾아왔나 모르겠습니다. 1월에 출판사 측에서 2월 출간 예정이라고 했거든요. 이 달에 곧 나올 것 같습니다만, 담당 편집인께서 많이 바쁘신지 저에게도 아직 답장을 주시고 있지 못하셔요. 번역가 김홍식 드림. http://goo.gl/93CF

stonewriter 2010-03-08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빠른 답변 감사합니다. 많이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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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XY 염색체에 내장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남성적 기질과는 동떨어진 ‘섬세한’ 성격을 타고난 공생원. 그는 가진 것 없어 남루하게 살아갈 처지였다가, 물질적으로, 정서적으로 탄탄한 기반을 가진 처가 덕에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면서 공처가로 거듭나게 됨. 돌팔이인지 명의인지 당췌 헷갈리는 의원으로부터 불임 판정을 받은 공생원은 불혹을 훨씬 넘긴 나이에 마나님이 임신하자 블랙리스트를 작성. 쪼잔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외도를 했을 것 같은 사내들을 하나씩 탐문 수사해 나가는 이야기.

작가는 이 책을 쓰면서 즐겁고 유쾌했다고. 읽으면서 어릴 적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읽었던 김유정의 소설이 기억이 났음. 어찌나 웃겼던지 새벽에 부모님이 깨어날까봐 이불 속에 고개를 처박고 키득 거렸더랬다. 문장 하나 하나에 장난기, 해학과 재치로 가득한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내 몸의 세포에서 해학과 재치가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내러티브와 함께 ‘몸의 즐거움’으로 기억된다. 김유정의 재치와 유머가 타고 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의 작가 김진규의 그것은 작가로서의 성실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읽고 나면 즐겁다. 그 즐거움은 내러티브와 감칠맛 나는 문장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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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언어
제인 정 트렌카 지음, 송재평 옮김 / 와이겔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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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언어

어느 입양인에게 추천받은 책이다. 이 책의 제목, ‘피의 언어’라는 것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족을 이루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이라고들 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의 아이에겐 그럴지도 모른다. 입양 가족의 아이에겐 자신이 가족의 일원임을 증명해 주는 지속적인 확인이 요구된다. 입양 부모는 입양 자녀가 게이임을 밝히거나 규범을 벗어난 행동을 하면 자신이 낳은 자녀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보다 더욱 비관용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자녀의 경우엔 어찌되었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지만, 입양 자녀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는 것. 그것은 그들이 직접 ‘선택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validation’. 입양부모와 입양 자녀의 관계는 ‘유효기간’이 전제된 잠정적 관계일까. 저자, 제인 정 트렌카는 감정 표현을 절제하는 부모에게 입양되어, 그들이 정말 갖고 싶었던 ‘진짜 아이’의 대용품이라는 느낌으로 살았다. 입양아에게 ‘부모가 선택한 아이’라는 말은 “선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이 무효화될 수도 있다”는 말로 번역되어 들린다. 이 책은 저자가 한국의 친어머니와 친자매들을 만나고, 암으로 죽어가는 어머니를 친자매들과 함께 보살피고, 미국의 지인들과 함께 평생 그리워했던 친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추도식을 하면서, 비로소 미국 땅에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네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더 좋았겠니?”  p289.

입양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까? 모르겠다. 그 질문은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해보라는 요구이다. p293.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해 보라는 요구'는 '추방당한 시인의 세계', 즉 입양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인 듯하다. ‘피’를 나눈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 그들과 나눈 ‘피의 언어’를 통해서, 저자는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더 이상 입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느끼게 된다. 저자는 ‘피의 언어’를 알게 되면서, 오래 전에 놓아버린 꿈, ‘글쓰기’를 시작한다. 이 텍스트를 “역시, 뭐니 뭐니 해도 피를 나눈 가족이 최고여!” 식의 고전적 독법은 이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섬세한 파장을 놓치게 만든다. 저자가 ‘추방자’라고 정의한 입양인의 경험을 당사자의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텍스트이다.

사족. 내가 읽은 입양인 작가들의 책에서는 유독 시가 많이 등장했다. 시적 언어는 역시 인간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고, 조각난 자아를 통합하고,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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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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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 출신으로 지식인이 된 사람 중에는 유년기 경험을 학문적 자원, 혹은 참조 지점으로 삼아 논의를 이어가는 학자들이 더러 있다. 바바라 에렌라이히의 『빈곤의 경제』, 리처드 세넷의 『신자유주의와 인간성 파괴』를 읽어보면 세상에 대한 그들만의 독특한 인식론을 엿볼 수 있다. 지식인 엘리트로서 이들이 계급의 경계를 넘는 과정에서 겪은 경험 세계, 부모 세대의 세상과 자신이 향후 소속될 세상 사이에서 겪은 혼란과 모순, 그리고 온갖 딜레마로 점철된 경계 영역에서만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세계관이 그것이다.

벨 훅스는 서문에서 그동안 이 책을 쓰는 동안 많이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비가시적이고 비언어적 상태로 남아있던 분열과 상흔의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이 저자에게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치열함’에 있다. 자신의 유년기 경험, 무엇보다도 계급적 경계 넘기가 보장되어 있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겪었던 소외감, 가족과 세상 사이에서 느꼈던 단절감 등은 단지 개인적 경험, 사적인 서사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계급, 인종, 정체성의 정치경제와 문화논리가 어떻게 서로 맞물려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참조 지점이다.

단상 1.

재분배(경제)와 인정(문화)의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적 구분이 개인의 경험 속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특히 타자화된 사람들의 경험을 살펴볼 때 그렇다. 벨 훅스는 빈곤, 계급의 문제와 인종의 문제를 결합된 방식으로 설명한다. 특히 12장에서 부동산과 인종 차별의 문제를 결부시키면서 제시한 대도시 주택 정책의 사례들을 통해 부동산 분야에서 자행되는 ‘인종차별적 계급 투쟁’의 문제를 신랄한 어조로 비판한다. 벨 훅스는 Mary Barefoot, Dennis Altman의 논의를 끌어와 백인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가 갖고 있는 지위 향상의 꿈이 유색 인종 퇴출의 촉매제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계급화와 인종화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미국의 주택 정책에 대한 분석은 한국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주목해 볼 만 하다.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이 논리를 한국의 상황에 이식시켜 분석해 보면,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바야흐로 전 국민을 사로잡은 ‘부와 권력에 대한 꿈’이 가난하고 불안정하고 타자화된 사람들로부터 삶의 터전을 빼앗고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격리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없는 자의 서러움은 이러한 퇴출과 추방 과정에서 발생하는 낙인 효과가 아닐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이렇듯 부동산을 통한 계급화 프로젝트를 통해서 구축되니까 말이다.

단상 2.

p55. 내가 자라면서 최고로 소중히 여긴 가지들이자 나의 가장 소중한 부분인 근면, 정직, 출신에 관계없이 모두를 존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도 학업을 마칠 수 있을지 언제나 의심스러웠지만, 결국 노동 계급에 대한 충성을 여전히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급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길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는 온갖 모순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계급 문제를 다루다보면 충돌과 대립을 피할 수 없다. 나는 언제나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다시 살펴보아야만 했다.

p59.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라는 신의 가르침과 매일 부딪히는 세속적인 상황은 필연적인 마찰을 낳았다. 현실에서 가난한 사람은 종종 수치심을 유발하는 괴롭힘과 굴욕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수치심’에 관한 내용이다. 가난한 사람들, 성적 소수자들이 자신이 속해 있던 계급 및 공동체를 배반하고 주류에게 동일시하는 현상. 저자는 계급 간의 연대가 가능하리라는 저자의 기대와 희망이 철저하게 무너진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인식의 틀을 구축한다. 그것은 바로 타자화된 사람들이 겪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동정과 멸시, 굴욕은 왜 그들이 계급 배반의 지향성을 갖게 되는가를 이해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것. 얼마 전 심리학자인 나의 지인이 영화화된 책 <더 리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겪는 부정적 감정의 근원에는 놓여있는 것이 수치심이라는 견해가 있다고 말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추측컨대 설득력이 있었다.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던 건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세상에 귀속됨으로써 쉽고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고,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그 모순과 분열의 경험을 독특하고 창의적인 인식론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벨 훅스의 ‘사유하는 힘’이 드러나는 지점이었다.

사족. 경계인의 인식론, 디아스포라 인식론을 이야기하는 서경식의 글을 읽을 때, 그의 논의가 주는 통찰력과 매력에도 불구하고 인식론적 특권을 주장하는 방식에 살짝 나르시시즘이 감지될 때가 있다. 벨 훅스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어쨌건 이 책을 읽고 벨 훅스에게 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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