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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도 괜찮아 - 성폭력 피해를 입은 어린이가 들려주는 이야기 어린이 성교육 시리즈 2
제시 지음, 권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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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서문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의 약 20%가 13세 미만의 유아 및 어린이를 대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전체 성폭력의 80% 가량이 아는 사람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피해자가 유아나 어린이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의 경우, 동네 사람, 친척, 유치원이나 학원 관계자 등 주변인에 의한 피해가 가장 높게 나타나며, 전체의 25%가 미성년 가해자에 의해 발생합니다.


어린이 성폭력의 대처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피해 상황을 빨리 인지하여 더 이상 피해가 지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는 아직 성폭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가해자로부터 비밀유지의 위협을 받아 부모나 주변인에게 알리지 못하기 때문에 피해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폭력은 침묵 속에서 은폐되면 가해행위 자체가 중단된다고 해도 후유증은 성인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습니다.


피해 사실이 드러났을 때 보호자를 비롯한 주변인의 태도 역시 중요합니다. 피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보호자들은 아이에게 일어난 일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가해자가 가까운 사람일 경우 당황한 보호자는 아이의 말이나 반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러한 태도와 함께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거나 “여성으로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태도 역시 피해 어린이의 입을 다물게 하고, 이후 어린이가 건강한 삶을 찾아가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보호자나 어린이 스스로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치유의 첫걸음입니다. 이 책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하는 것 자체가 어린이에게 얼마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피해 어린이의 목소리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린이가 피해 사실을 말하면, 우선 어린이의 말을 믿고 안심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언어보다는 행동과 태도를 통해 자신의 피해 사실을 말하기 때문에 어린이가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거나 퇴행 행동을 보일 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린이가 피해 사실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어린이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따뜻하게 보듬어 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아이를 보호해 주지 못한 책임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겨 심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어린이 성폭력은 결코 보호자의 책임이 아닙니다. 부모 자신이 받은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성폭력 피해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데 가장 큰 힘은 치유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책은 어린이에게도 피해를 극복할 힘과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힘은 어린이가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어린이 스스로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있는 환경, 그것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준다는 측면에서 예방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피해 상황에 대해 대처하고 적절한 치유를 가능케 한다는 측면에서 어린이 성폭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처방안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가는 일은 우리 사회 전체의 책임입니다. 이 책은 어린이 나아가 모든 사람이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적지 않게 기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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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 1 이화한국문학연구총서 2
정형지 외 옮김 / 보고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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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열어보기 전에『17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이라는 제목에서 언뜻 17세기를 살았던 여성들의 일상을 직접 접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17세기로 돌아가 직접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탐방하듯이 말이다. 책의 목차에서 이 책이 사대부 남성들이 여성들‘에 관해’ 쓴 글의 묶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살짝 실망했던 건 아마도 그러한 나의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개념어로 가득한 사회 과학 책만을 편독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던지라, 문학 작품을 접하는 것 자체가 신선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이 독특했던 건 다차원적 독해 경험을 안겨주었다는 점이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사대부 남성들의 눈을 통해 17세기 여성들의 ‘실제’ 모습을 읽어내야 한다는 (무)의식적 언명이 작동하는 것을 감지했다. 사실 ‘17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이라는 책의 제목에 충실한 독서를 하기 위해서 텍스트와의 거리두기, 다차원적 독해라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유교 가부장제 사회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사대부 남성의 목소리를 통해 표현된 여성들의 삶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그 글들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또 다른 삶의 모습들을 상상해 보고, 다시 여성들의 삶을 바라보고 언어화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인 글쓴이들의 시각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다층적 차원의 읽기가 요구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송시열, 이세백, 조성기, 김수항 등이 써놓은 행장, 묘표, 제문 앞에 역자들이 제시한 간략한 소개말은 그러한 의식적 노력을 자극하여 다차원적 글읽기의 재미와 사유의 깊이를 더해 주었다.


먼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단상들을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7세기 사대부 남성들이 제문, 묘표, 행장, 제문 등의 형식으로 고인이 된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다. 타자의 죽음을 의미화하는 방식은 망자의 총체적 삶에 대한 압축적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을 바라보는 사대부 남성의 의식 세계를 응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당대 양반 여성들의 삶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의미화될 수 있는 측면들의 압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행장, 묘표, 제문 등에서 읽어낸 바, 당시 양반 여성들의 삶에 대해 내가 느낀 점은 이렇다. 먼저 이 글에서 여성들은 ‘홍씨, 박씨’ 등 성씨로 불릴 뿐 구체적 이름이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름도 성도 없는 비천한 신분보다야 낫겠지만, 당시 지배적 담론 체계에서 여성들은 망자가 되어서도 개인으로 기억되기보다는 며느리, 딸, 아내라는 가문과 가족에서 그 여성이 놓였던 ‘자리’로서 명명되고 기억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대부의 목소리를 통해 표현된 양반 여성들은 (여성 일반이 있어야 할 ‘자리’ 혹은 ‘위치’로서 명명되는) ‘집단으로서의 여성’과 ‘개인으로서의 여성’의 경계를 오고간다. 망자의 공적과 덕행에 대한 찬양과 글쓴이가 그 여성에 느꼈던 감정의 표현을 보면, 당시 여성들이 딸, 아내, 며느리라는 ‘위치 혹은 자리로서의 여성’과 독특한 개성과 욕망을 소유한 ‘개인으로서의 여성’의 모호한 경계에서 살았다는 점을 짐작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당시 여성들의 삶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개별 여성의 삶을 총체적으로 구성하고 압도했던 삶이었던 것 같다. 며느리의 묘 앞에서 손자들이 건강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시아버지를 배려했던 며느리의 마음을 찬양한 송시열의 글은 양반 여성의 존재가 죽는 순간까지도 철저하게 가문과 가족을 위한 의무에 복속되어야 하는 존재로 상상되고 강제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며느리의 죽음에서 느꼈던 슬픔과 미안함, 자신을 봉양해줄 자식도 며느리도 없이 홀로 병든 노구를 이끌고 남은 생을 살아가야할 자신의 처지로 인한 두려움과 외로움이 전해지는 조성기의 글 역시 며느리에 대한 다양한 인간적 감정이 기실 가족 구성원들의 복지를 책임져야 했던 여성들의 역할과 그러한 역할 속에서 형성된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감정의 유형들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애정이 표현된 김수항의 글에는 다른 한편으로는 교묘하게 김수항의 가문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집요하게 맞물려 표현되어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7세기 사대부 남성들이 ‘여성’을 어떻게 욕망하고 상상했는가를 말해 주는 글인 동시에 지배적인 유교 가부장제 담론을 통해 여성들에게 허용된 자리는 어디였는가를 가늠하게 해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담론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사대부 남성들, 그 중에서도 특히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남성들이 쓴 제문 형식의 글이라는 점에서, 당시 공식적 담론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느끼는 감정들이 어떻게 여성에게 주어진 ‘자리’나 ‘역할’을 통해서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반면 이 글들에는 ‘위치로서의 여성’과 ‘개인으로서 여성, 즉 여성 자기 자신’ 사이를 오고 가면서 양반 여성들이 느꼈을 혼란과 긴장, 다양한 감정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물론 공식적 제문 형식의 글에서 허용된 감정의 경계와 표현될 수 있는 내용의 한계가 분명한 탓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이 남성들에게는 자신이 말을 걸고 있는 여성 망자들 개개인의 의식 세계에 대한 섬세한 상상력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성들이 직접 써내려간 글에 대한 자료를 읽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아마도 당시 여성들의 삶은 단순히 유교가부장제의 희생자로만 해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전략을 구사했으며, 어떻게 스스로 유교적 가치를 내면화했고, 그 안에서 허락된 권력을 어떤 방식으로 향유했는지,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는지, 그 욕망을 어떻게 개개인이 경험했는지 다양한 목소리가 드러나는 글을 읽고 싶다. 또한 이 책에서 역자들이 각 글 앞에 짧게 제시한 소개글처럼, 당시 여성들의 글과 현재의 역자와 독자들의 다양한 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입체적 독서를 가능케 하는 책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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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할머니의 행복한 백년
블레어 저스티스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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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요즘 내가 읽는 책들은 주로 마음의 평화와 행복에 관한 것들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최근 몇 년 사이 많이 변했구나. 예전에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 세상에서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은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중요했었다. 이 경쟁적이고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걸 증명하고자 고군분투했다고나 할까.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일이 훌륭하고 고상해 보여서였을까? 나의 에너지는 느끼는 일 보다는 판단하는 일에 주로 쓰여졌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 무언가를 비판하는 일이 재미없어졌다.

이성의 칼을 휘두르는 일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게 느껴졌고, 그런 일들을 내 몸과 마음이 점점 더 감당하지 못했다. 이젠 점점 더 자연에 눈을 돌리게 되고, 예전에는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이가 든 것일까? 내면의 평화와 행복을 찾는 일이 내겐 가장 중요해졌다.이젠 ‘의미’를 추구하는 일보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만큼의 소박하고도 작은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바이올렛 할머니의 행복한 100년.

이 책은 오랫동안 인간의 건강과 행복에 관해 가르치고 글을 써오면서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지속된 불행감과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70대의 어느 심리학 교수가 103살 먹은 할머니에게서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법]에 대해 배우게 되는 이야기이다.

103살의 나이에 78살의 소아마비 딸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이 할머니의 행복 비결은 도대체 뭘까? 감사하는 마음, 유머,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몰입,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하다는 삶에 대한 태도, 최선을 다한 후에는 신에게 온전하게 의지하는 것, 물질적인 행복보다는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등이 그 비결이었다. 알고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바이올렛 할머니가 3세기를 걸친 삶을 살아오면서 직접 실천하고 경험한 것이기에 마음 깊은 곳에 와닿는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상처와 불안을 치유하고 돌보는 일을 해오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그것들은 보살피지 못했던 저자의 자전적 고백과 성찰이 있기에 진심을 느끼게 해 준다.

바이올렛은 밤늦게 신문을 보다가 조는 바람에 의자에서 떨어져 100살이 다 된 노령에 큰 수술을 받아야 했던 순간에도, ‘에이고,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한탄하기 보다는 ‘밤 늦게 책을 읽을 때는 졸다가 떨어지지 않게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서 읽어야 한다’는 걸 하느님이 유머러스하게 알려준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이 할머니, 얼마나 귀여운가? 불행하고 고통스런 상황을 한 순간에 코믹하게 만드는 능력, 자신에게 없는 것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에 감사할 줄 아는 그 소박함 속에서 할머니 자신뿐만 아니라 그녀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삶까지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창조적인 힘을 보게 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영혼의 풍요가 궁극적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이 책이 좋은 것은 이 글을 쓴 작가 자신도 70대이고, 주인공도 100살이 넘은 할머니라는 점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는 깊이와 따뜻함과 지혜가 있다. 젊은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교만과 후까시가 없다. 어머니와 화해하지 못했기에 자기 자신과 끊임없는 불화에 시달렸던 저자가 바이올렛 할머니의 삶과 만나면서 조금씩 있는 그대로의 어머니와 자신을 받아들이고 용서해 가는 과정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바이올렛 할머니가 가르쳐준 행복 비결들을 종이에 써서 냉장고에 붙여놓을 생각이다. 누가 아는가? 할머니의 비결들이 부적이나 마술처럼 내 일상에 행복감과 기쁨을 가져다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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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아이 -상 영원의 아이
텐도 아라타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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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자의 미덕은 어느 누구도 일방적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들지 않으면서 극심한 폭력과 그로 인한 후유증을 앓는 인간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 인간 조건의 딜레마와 거기서 비롯되는 비극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일게다. 폭력의 피해자들은 후유증을 앓는 것이 아니라 후유증을 산다(live)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들의 인생 자체가 과거의 끔직한 사건이 자신의 육체에 그리고 정신에 새겨놓은 그 상흔을 지우려고, 잊으려고,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놓은 마음의 감옥 아니 자신의 인생 자체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투쟁하는 것일테니까.

우리는 가족은 가혹한 바깥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마지막 안식처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들 역시 인간의 존엄성, 성장, 인간 관계의 가장 기초적인 신뢰가 이미 깨져버린 가족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행복한 가정의 신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적어도 겉으로는 모든 것이 정상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가장하고 보여주기 위해 침묵한다. 비밀과 거짓말. 이것만이 이미 콩가루가 되어버린 가족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잘못되거나 자신을 학대하면 자기 자신을 탓한다. 자신이 겪은 분노가 설명되지 않을 때, 자신이 겪고 있는 슬픔이 표현될 수 없을때, 자신이 갖는 그 모든 정서가 부정될 때, 그것은 결국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라는 자기 존재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엄마가 담뱃불로 온 몸을 지진 흉터가 전신에 기린 무늬로 남아있어 지라프(기린)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료헤이, 부모의 이혼과 벽장 속에 갇힌 끔직한 경험으로 인해 어둠에 갇히는 것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해서 모울(두더지)라는 별명을 얻은 쇼이치로, 친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유키.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않은 고통을 살아내야 하는 이 3명의 어린 생명들에게 17년 동안 삶의 버팀목이 되었던 건 12살 어느 무렵 소아 병원 근처 숲속에서 녹나무 구멍 속에서 주고 받았던 말, '살아 있어도 괜찮아. 너는....살아 있어도 괜찮아. 정말로, 살아 있어도 괜찮아' 였다. 모든 것을 침묵당한 아니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이들에게 이것은 그 얼마나 큰 위안이었을까.

살아있기 위하여 함께 공모했던 '그것'의 비밀이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면서 드러나면서, 독자들은 비밀과 거짓말로 둘러쌓이 가족의 실체를 낱낱이 파악하게 되고, 그것이 가져오는 또 다른 비극의 연쇄고리를 깨닫게 된다. 주인공들은 부모에게 혹은 그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 빌어먹을 부정을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유키는 노인과 병동에서 자신의 사생활과 즐거움을 희생한 채 과로로 쓰러질 만큼 헌신적으로 일하고, 료헤이와 쇼이치로는 각자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일에만 매달려 젊은 나이에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즐거움과 그들 자신의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무엇인가를 보상받기 위한 것이고, 그 무엇인가를 잊기 위한 것이고, 그 누구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정은 행복하다. 모든 가정은 안식처이다. 모든 부모는 완벽해야한다.가족에 대한 이러한 '신념'들은 결국 모든 가정은 행복해야하고, 안식처이어야 하고, 모든 부모는 완벽해야만 한다는 '규칙' 혹은 '규범'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결국 가족의 상실과 붕괴를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가족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 탄탄한 신화와 신념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비밀과 거짓말, 위선으로 가득한 현실을 직시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과거의 귀신과 악몽에 쫓기지 않고, 현재를 제대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핍과 상실의 아픔을 살아내고 있는 수많은 유키, 료헤이, 쇼이치로'들'에게 그들의 마땅히 누렸어야 할 분노와 슬픔, 애도의 권리를 되돌려주고 그들의 삶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되찾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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