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아이 -상 영원의 아이
텐도 아라타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의 미덕은 어느 누구도 일방적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들지 않으면서 극심한 폭력과 그로 인한 후유증을 앓는 인간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 인간 조건의 딜레마와 거기서 비롯되는 비극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일게다. 폭력의 피해자들은 후유증을 앓는 것이 아니라 후유증을 산다(live)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들의 인생 자체가 과거의 끔직한 사건이 자신의 육체에 그리고 정신에 새겨놓은 그 상흔을 지우려고, 잊으려고,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놓은 마음의 감옥 아니 자신의 인생 자체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투쟁하는 것일테니까.

우리는 가족은 가혹한 바깥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는 마지막 안식처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들 역시 인간의 존엄성, 성장, 인간 관계의 가장 기초적인 신뢰가 이미 깨져버린 가족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행복한 가정의 신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적어도 겉으로는 모든 것이 정상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가장하고 보여주기 위해 침묵한다. 비밀과 거짓말. 이것만이 이미 콩가루가 되어버린 가족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잘못되거나 자신을 학대하면 자기 자신을 탓한다. 자신이 겪은 분노가 설명되지 않을 때, 자신이 겪고 있는 슬픔이 표현될 수 없을때, 자신이 갖는 그 모든 정서가 부정될 때, 그것은 결국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라는 자기 존재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엄마가 담뱃불로 온 몸을 지진 흉터가 전신에 기린 무늬로 남아있어 지라프(기린)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료헤이, 부모의 이혼과 벽장 속에 갇힌 끔직한 경험으로 인해 어둠에 갇히는 것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해서 모울(두더지)라는 별명을 얻은 쇼이치로, 친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유키.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않은 고통을 살아내야 하는 이 3명의 어린 생명들에게 17년 동안 삶의 버팀목이 되었던 건 12살 어느 무렵 소아 병원 근처 숲속에서 녹나무 구멍 속에서 주고 받았던 말, '살아 있어도 괜찮아. 너는....살아 있어도 괜찮아. 정말로, 살아 있어도 괜찮아' 였다. 모든 것을 침묵당한 아니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이들에게 이것은 그 얼마나 큰 위안이었을까.

살아있기 위하여 함께 공모했던 '그것'의 비밀이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면서 드러나면서, 독자들은 비밀과 거짓말로 둘러쌓이 가족의 실체를 낱낱이 파악하게 되고, 그것이 가져오는 또 다른 비극의 연쇄고리를 깨닫게 된다. 주인공들은 부모에게 혹은 그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 빌어먹을 부정을 넘어서기 위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유키는 노인과 병동에서 자신의 사생활과 즐거움을 희생한 채 과로로 쓰러질 만큼 헌신적으로 일하고, 료헤이와 쇼이치로는 각자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일에만 매달려 젊은 나이에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의 즐거움과 그들 자신의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무엇인가를 보상받기 위한 것이고, 그 무엇인가를 잊기 위한 것이고, 그 누구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정은 행복하다. 모든 가정은 안식처이다. 모든 부모는 완벽해야한다.가족에 대한 이러한 '신념'들은 결국 모든 가정은 행복해야하고, 안식처이어야 하고, 모든 부모는 완벽해야만 한다는 '규칙' 혹은 '규범'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결국 가족의 상실과 붕괴를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가족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 탄탄한 신화와 신념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비밀과 거짓말, 위선으로 가득한 현실을 직시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과거의 귀신과 악몽에 쫓기지 않고, 현재를 제대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핍과 상실의 아픔을 살아내고 있는 수많은 유키, 료헤이, 쇼이치로'들'에게 그들의 마땅히 누렸어야 할 분노와 슬픔, 애도의 권리를 되돌려주고 그들의 삶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되찾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