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 Vol.2 - 문명의 기둥 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 2
다니엘 카사나브 그림, 김명주 옮김, 유발 하라리 원작, 다비드 반데르묄렝 각색 / 김영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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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부터 '만화로 보는-' 등의 수식을 받는 베스트셀러의 만화 버전 책을 많이 읽었다. 글을 읽기 싫어했던 것도 아닌데 유독 그림과 함께 스토리를 각색한 책을 많이 선물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주위 어른들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림책을 크게 선호하지 않는 취향이 확고한 어린이였다. 남아도는 나의 상상력만 발휘해도 충분히 이해가 잘 되는데, 남의 손을 거친 그림이 내 독서에 참견을 한다니.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어리지 않은 덕분인지, 글로만 이루어진 책이 만화와 그림을 통해 재탄생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오로지 글로만 전달하기엔 어려운 내용도, 전달받기 어려운 사람도, 성장을 기다려주기엔 너무 중요한 사실도 있는 법이라고. 나는 이게 결코 사소하지 않은 배려라고 생각한다. 창작자로서 자신의 작품을 재구성하기로 마음먹기란 쉽지가 않다. 형식을 바꾸는 선택이라면 더욱.

만화 형식이고, 이해하기가 쉽다. 어린 아이가 원작자 유발 하라리를 비롯한 주변 지식인들에게 설명을 들으며 역사와 문명의 발전을 이해하는 설정이기 때문에 나까지 다정한 설명에 젖어든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물어보고 싶게 만든다는 거지. 사실 나는 사피엔스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부끄럽지만 어려운 책은 거부하고 보는 일차원적 사고의 소유자이기 때문인데 이 책 덕분에 사피엔스와 한 발 가까워졌다. 사실 다 읽은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형식이 만화일 뿐이지 원작을 기반으로 한 거니까. <사피엔스>는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쓴 문명서 아닌가. 한 번쯤은 정신 다잡고 읽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이렇게 재밌고 유익한 방식으로 해결될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세상은 속절없이 변하나 누군가는 8세를 살고 누군가는 34세를 살며 누군가는 89세를 살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으로 미디어 콘텐츠를 접하는 전체적인 연령대가 많이 하향평준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야 접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초등학생이 본다면 어떨까? 이해하기 어렵겠지. 대체 이걸 왜 읽어야 하는 거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이 책은 효과적인 해결책이 되어준다. 핵심만 담은 만화는 원서 전체보다 나은 이해도를 추구한다.

시작하자마자 '파우스트'의 내용을 빌려 농업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과연, 충격 받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 들어있다. 우리의 먼 조상은 결국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계약을 했으며 그게 바로 농업혁명이라고. 계약 상대는 웃기게도 밀이다. 사실 인간의 노력만 있다면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농사는 무조건 유익한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니 사각지대라는 게 생겼다. 식량이 늘어나면 먹여야 하는 입도 늘어난다. 모든 것은 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듯 하나, 결코 그렇지만은 않고.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농업혁명은 사람이 많은 개선을 이루도록 했고 그 개선은 모여 결국 원형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하는 단차를 만들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문명의 발전을 이룩하는가. 돌아봤을 때 돌아갈 수 없는 선택임을 아는 상태라면 과연 지속할 수 있을까.

과거의 무언가를 보게 된 날이면 괜히 그런 생각이 든다. 현재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나온 시간과 지나갈 시간만이 존재하는 거라고 하던데. 지금의 시대를 바라보는 미래의 세대는 과연 어떤 안타까움에 젖어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을까- 하고. 밀 농사를 지으며 채집과 수렵을 그리워하던 과거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도 언젠가는 무엇을 그리워하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제 발로 걸어들어갔음을, 더 나은 것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유를 잃는 선택을 했음을 깨닫는 날이 올 텐데. 조금은 두렵지만 지금 고민해 봤자 달라지는 게 있나? 차라리 후손들에게 제2의 농업혁명과 제2의 사피엔스를 선물해 주자는 결심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시간을 뛰어넘은 누군가는 나를 한심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나는 되는대로 나의 삶을 살겠다고. 역사에서 쟁취한 인생의 이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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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처럼 양자역학하기 - 직관과 상식에 맞는 양자이론을 찾아가는 물리학의 모험
리 스몰린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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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회 현상이 넘쳐난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인간이 저지른 일이니까. 나는 인류애를 실컷 잃어가면서도 그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오늘도 착실히 인생을 따른다. 우리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 인간을 분해하면 그 안엔 얼마나 대단한 사념이 숨겨져 있는가? 이 책은 인간을 그리 대단히 여기지 않는다. 인간도 결국 과학으로 증명 가능한 자연의 일부, 한낱 물질들의 연속이므로. 인간은 그냥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낱 생명체에 불과하다. 자의식이 대단하지만,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 그런 인간들이 모여 분석하고 조립하고 분해하고 덧붙여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원리를 쫓아 헤매는 것.


양자역학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보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는 어디선가 배웠던 기억도 어렴풋 떠오른다. 그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의 얼굴만 선명하다. 신나 보이던 표정도. 과학자들은 왜 이렇게까지 양자역학에 격렬한 반응을 보일까? 사실 나도 몰랐는데 다음 문장을 보자마자 몸 안에서 어떤 뜨거운 게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 중 절반밖에 얻을 수 없다.

대체 왜? (이걸 쉽게 이해했다면 나는 전공을 바꿔야 하겠지만 아직은 어려워서 전과는 보류하기로 한다.)


양자역학에 따라 저 문장을 조금 더 풀어보자면, A 집단의 특성을 파악하게 되면 비가환성의 원리에 따라 B 집단의 특성은 영영 알지 못하게 된단다. 뒤늦게 B를 골라봤자 B 집단은 이미 무작위로 변한 뒤라 우리는 본래의 값을 영원히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조작을 이용해, 처음의 선택으로 알게 된 A 집단의 특성을 잊을 수만 있다면 B 집단의 원래 값 또한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또 감정적으로 굴 수밖에 없었다. 좋자고 사는 인생인데, 둘 다 좀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생각해 보니 웃겼다. 양자역학이 옆집 거북이 애칭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우리도 이토록 기이한 학문에 갇혀 있는 신세인데. 나는 대체 누굴 향한 원망을 품고 있는가?


책의 내용을 곱씹을수록 무언가 수긍하기가 어렵다는 느낌이 몸집을 불린다. 여기서 저자는 말한다. 양자의 움직임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양자역학에 무언가 중요한 요소가 누락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렇기에 지금의 양자역학은 완벽하지 않다고. 나는 과학적 사실이라 함은 무조건적인 정답이 따르는 거라고 여겼는데,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 당연하게 여기는 수많은 과학적 사실도 무가치함이 팽배했던 당대의 주류 가설을 깨부수며 나타났으니. 과학도 기술의 발전과 인간의 진화에 따라 조금씩 증명되고 정립되는구나 싶었다.


세상에 정답이 존재한다면 이토록 어지러운 과학적 원리를 이해하기가 쉬워질까? 또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서 쉽게 체념하게 된다. 사이에 끼어들진 못하지만 멀리서나마 과학자들의 지식 배틀을 응원하는 쪽을 택하는. 이 책을 정독한 지금도 사실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섯 번쯤 더 읽으면 가능성이 보일까 싶기는 한데. 한 가지 명확한 건 저자는 확신이 있다. 시원하고 긍정적이며 어렵지 않은 단어들로 가장 의아한 부분을 골라 무지한 독자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 이토록 다정하고 속 시원한 과학서가 또 탄생할 수 있을까?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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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에게 구원이었을 때
박주경 지음 / 김영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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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간절할 때 내 손을 잡아채는 누군가의 온기를 느껴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사실 나는 세상을 덤벙거리며 살아가는 편이라 지금껏 쉽게 넘어지고 쉽게 부딪히는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어딘가에 간절히 의지하여 무릎을 털 일이 많았고, 우울함에 허우적거리며 발버둥 칠 일이 많았다. 하지만 벗어날 순 있더라. 당장 그뿐일지언정. 깊은 수렁에 빠져 그곳을 벗어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라 단정 짓곤 할 때.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나의 감정을 가장 버리고 싶을 때. 떠올리기도 싫은 시간을 가장 가까이서 감싸준 건 언제나 주변인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도 나를 구하더라고. 사실 놀랐다. 지구를 구하는 히어로나 초능력자가 아니어서 그랬다. 내게 관심도 없어 보이던 사람이 문에 부딪히기 직전의 나를 붙잡아준다. 그러고는 '조심하세요.' 한 마디하고 핸드폰을 보며 자리를 뜬다. 그 사람에게는 별일 아니고, 내게는 몇 년을 살아갈 힘이 되는 구원.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건 참으로 간단하고 보편적인 것인가. 사실 구원은 쉽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나 기억하지는 못하는 이치. 내게는 평생 들어서지 않을 것만 같던 고난도 당장 내일 아침의 해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고, 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슬픔도 지는 달과 함께 자취를 감추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구원은 나의 근처를 머물며 끼어들 틈을 찾는다. 누군가의 손을 빌려서, 구원은 나를 스치는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구원자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은 잘못된 가치관을 가졌는가?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살아가기에 너무도 복잡한 옵션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시비에는 한 발 물러서 은은한 웃음을 지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안전은 몇 번을 되새겨도 모자란 개념이지만 우리가 위험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리는 상황은 세상 모든 경우의 수에 존재한다. 그게 어떤 의미의 위험이든. 그럴 때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내민다. 당사자와 구원자가 어떤 인간이든 간에, 우리 일단은 살아서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자고. 어떤 상황이든 이 선택으로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크게 고려하지 않은 채로. 대담과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지만 의인들은 늘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한 일을 했단다.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딨지, 그들의 용기는 세상이 굴러가는 방향을 잡는 키가 된다.

우리는 대체 언제 서로의 구원이 되는가. 절체절명의 재난 속에 빠진 누군가에게 구원이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고, 단순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 누군가에게도 가벼운 구원은 감사를 부른다. 가치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그럴 자격도 없지만) 우리에게 늘상 필요는 하다는 것. 언제 어디서나 구원을 찾고, 언제 어디서나 구원자를 찾는 우리. 우리가 서로의 구원이었을 때? 오늘이랑 내일. 어제도 그랬고. 이 책이 펼쳐진 틈을 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말한다. 나의 구원은 너고, 너의 구원이 나이길 바라며 잠에 들겠다고.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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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늙어버린 여름 - 늙음에 대한 시적이고 우아한, 타협적이지 않은 자기 성찰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김영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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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에 책을 펼치고 덮었음에도 바로 잠들지 못하고 이토록 정립되지 않은 글자들을 타이핑하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지금도 늙어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책의 존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젊었을 적 빛났던 나를 동경하던 주변인들, 아기 새처럼 나를 따르던 조카들, 비관적인 나와 나의 우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피하던 지난날들. 과연 멀고도 먼 형태의 삶인가? 내가 가장 바라던 젊음은 이런 것이다. 빛남을 알고 빛을 활용하는 삶. 내가 바라지 않는 늙음은 이런 것이다. 꺼져가는 빛을 수긍하지 못하는 삶. 하지만 나는 바라지 않는 늙음을 택할 테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비참히 무너지더라도 끝없이 저항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나는 노화 앞에서도 반기를 흔들겠다고.

우리의 빛은 왜 꺼져가는 것일까.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거라고들 말한다. 썩 반기는 말은 아닌 게, 당장 오늘부터 살지 말고 죽어가자고 권할 수는 없잖아. 듣기 좋은 말을 사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건데 그렇게 초를 치면 곤란하다. 그렇다면 늙음은 어떤가? (당연한 말이지만 죽음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다 같이 늙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문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던 과거의 나보다 10초는 나이를 더 먹었다. 배라도 불러준다면 숨이라도 참아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내 성취와는 더더욱 상관없이 시간은 흐른다. 아, 또 10초 흘렀네. 겨우 10초 가지고 늙었다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느껴진다. 하지만 100년 역사도 시작은 지금이다.

우리를 멍청이의 길로 이끄는 건 시간이다. (멍청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젊은 멍청이는 대게 꼴값이라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 지나가는 누군가의 주름살이 깊어 보이며 오늘 아침 자리를 양보한 노인의 등이 유독 굽어 보인다면 떠올려라. 너는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니? 노인은 태어날 때부터 노인이 아니다. 그들도 나를 스쳐왔고 나의 언니와 나의 엄마와 나의 할머니를 스쳐갔음을. 결국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흐르는 건 시간이고 노화를 수긍하는 인간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기에. 고개를 열심히 저어가며 세상을 부정해도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정말 속도 없고 절도 없이 지나간다. 노화가 자연스레 가까워지면 우리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겨 되는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달라진 대우에 대한 적응은 나중의 일이다, 하지만 결국 내 몫이다.

어제의 나와 10년 전의 나는 한 끗 차이 같은데, 남이 바라보는 10년 전의 나는 이미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변하는 건 그런 거고, 가장 자주 변하는 건 나이니까. 살다 보니 몇십 년이 흘렀을 뿐인데 나의 기반을 딛고 선 모두가 나를 늙은이 취급한다면 당신은 과연 가만히 수긍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가 수긍하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점이 가장 곤란하다. 결국 이어지는 건 체념이다. 뭘 더 바랄 수 있겠는가. 성찰과 반성? 우리는 이미 충분한 수고로움에 둘러싸여 남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권리를 확보하느라 소리를 내고 글을 쓰고 동의를 더하는데. 자신의 늙음을 목격했다는 것은 어쩌면 잘 살아왔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은 어떤 색으로 꿰어졌나. 색 실의 개수나 헤아리며 뿌듯함을 느끼면 된다. 잘 했다고.

나는 늙지 못한 초가을에 혼자 서있다. 나이가 어려서?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나는 이 작가처럼 나도 모르게 선뜻 다가온 부정할 수 없는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다시 모든 계절을 건너 늙어버릴 여름으로 향한다. 동경하는 작가의 뒷모습을 쫓아. 늙음을 쫓아.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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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어떻게 진실을 말하는가 - 넘겨짚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71가지 통찰
바츨라프 스밀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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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진실을 말한다며, 그렇다면 숫자가 아닌 것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제목에 확신이 섞인 책을 보고 있자면 묘한 반항심이 생긴다. 이분법적 사고에 절여진 1차원적 인간이기 때문이겠지.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다른 사회적인 이슈들이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누가 와도 변하지 않을 객관적 수치는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놀랍게도 우리는 이 책에서 언급되는 다양한 숫자들로 세상을 꾸릴 수 있다. 감성으로 꾸며진 하루들도 결국엔 다양한 돈과 시간과 통계와 수치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챕터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환경'이다. 늘 개선해야 할 행동과 지향해야 할 기준점을 재생했을 뿐 정확히 어떤 부분이 오염되었는지, 몇 년이 지나야 나의 흔적이 묻은 나무젓가락이 사라지는지는 잘 알지 못했는데 (사실 알아도 금방 까먹곤 했는데) 이렇게 숫자로 바꾸어 제시하니 알아듣기가 수월했다. 가장 가까운 숫자로 가장 먼 곳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느낌.



숫자는 돌멩이를 헤아리는 수단이기도, 코딩에 필수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문자이기도 하다. 일주일에 한 번 나의 행운을 시험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도 숫자공을 뽑아야 시작되고, 학기가 끝날 무렵마다 받아보는 성적표에도 우울한 숫자와 봐줄 만한 숫자가 공존하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목적과 의도를 가진 숫자에 둘러싸여 하루를 살아간다. 여기서 공통점은? 그들은 사실 그대로를 표현한다는 것. 누군가의 조작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왜곡과 과장은 없다. 주체는 인간, 대답은 숫자로. 주체의 올바른 선택은 이로운 숫자를 뱉는다. 광범위한 영역을 아우르도록 획기적이면서, 그 누구도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겸손하게 활약 중인 숫자는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진실을 고요히 전하고 있는가? 사실 모든 건 우리가 시작했고 숫자는 그를 현재에서 미래로 전하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르지.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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