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가 늙어버린 여름 - 늙음에 대한 시적이고 우아한, 타협적이지 않은 자기 성찰
이자벨 드 쿠르티브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김영사 / 2021년 9월
평점 :
늦은 밤에 책을 펼치고 덮었음에도 바로 잠들지 못하고 이토록 정립되지 않은 글자들을 타이핑하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지금도 늙어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책의 존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젊었을 적 빛났던 나를 동경하던 주변인들, 아기 새처럼 나를 따르던 조카들, 비관적인 나와 나의 우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피하던 지난날들. 과연 멀고도 먼 형태의 삶인가? 내가 가장 바라던 젊음은 이런 것이다. 빛남을 알고 빛을 활용하는 삶. 내가 바라지 않는 늙음은 이런 것이다. 꺼져가는 빛을 수긍하지 못하는 삶. 하지만 나는 바라지 않는 늙음을 택할 테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비참히 무너지더라도 끝없이 저항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나는 노화 앞에서도 반기를 흔들겠다고.
우리의 빛은 왜 꺼져가는 것일까.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거라고들 말한다. 썩 반기는 말은 아닌 게, 당장 오늘부터 살지 말고 죽어가자고 권할 수는 없잖아. 듣기 좋은 말을 사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건데 그렇게 초를 치면 곤란하다. 그렇다면 늙음은 어떤가? (당연한 말이지만 죽음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다 같이 늙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문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던 과거의 나보다 10초는 나이를 더 먹었다. 배라도 불러준다면 숨이라도 참아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내 성취와는 더더욱 상관없이 시간은 흐른다. 아, 또 10초 흘렀네. 겨우 10초 가지고 늙었다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느껴진다. 하지만 100년 역사도 시작은 지금이다.
우리를 멍청이의 길로 이끄는 건 시간이다. (멍청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젊은 멍청이는 대게 꼴값이라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 지나가는 누군가의 주름살이 깊어 보이며 오늘 아침 자리를 양보한 노인의 등이 유독 굽어 보인다면 떠올려라. 너는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니? 노인은 태어날 때부터 노인이 아니다. 그들도 나를 스쳐왔고 나의 언니와 나의 엄마와 나의 할머니를 스쳐갔음을. 결국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흐르는 건 시간이고 노화를 수긍하는 인간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기에. 고개를 열심히 저어가며 세상을 부정해도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정말 속도 없고 절도 없이 지나간다. 노화가 자연스레 가까워지면 우리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겨 되는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달라진 대우에 대한 적응은 나중의 일이다, 하지만 결국 내 몫이다.
어제의 나와 10년 전의 나는 한 끗 차이 같은데, 남이 바라보는 10년 전의 나는 이미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변하는 건 그런 거고, 가장 자주 변하는 건 나이니까. 살다 보니 몇십 년이 흘렀을 뿐인데 나의 기반을 딛고 선 모두가 나를 늙은이 취급한다면 당신은 과연 가만히 수긍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가 수긍하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점이 가장 곤란하다. 결국 이어지는 건 체념이다. 뭘 더 바랄 수 있겠는가. 성찰과 반성? 우리는 이미 충분한 수고로움에 둘러싸여 남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권리를 확보하느라 소리를 내고 글을 쓰고 동의를 더하는데. 자신의 늙음을 목격했다는 것은 어쩌면 잘 살아왔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은 어떤 색으로 꿰어졌나. 색 실의 개수나 헤아리며 뿌듯함을 느끼면 된다. 잘 했다고.
나는 늙지 못한 초가을에 혼자 서있다. 나이가 어려서?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나는 이 작가처럼 나도 모르게 선뜻 다가온 부정할 수 없는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다시 모든 계절을 건너 늙어버릴 여름으로 향한다. 동경하는 작가의 뒷모습을 쫓아. 늙음을 쫓아.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