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구하러 온 초보인간 - 낯선 세계를 건너는 초보자 응원 에세이
강이슬 지음 / 김영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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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련자가 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다. '입문'과 '초보'. 들어서야 나아갈 수 있고, 나아가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은 수백 년이 흘러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가벼운 일상과 무거운 결정도 마찬가지다. 사안의 경중은 초보자와 숙련자를 나누는 데에 영향을 줄 수 없기에. 작은 용기를 이용해 새로운 라운드에 들어설 수 있고, 높아지는 레벨은 또 다른 세상과 그 안의 경험으로 나를 이끈다. 경험은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는 것, 미래의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나는 오늘도 초보의 길을 나선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눈물을 글썽이게 되고, 시작을 수백 번을 후회할지라도!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개인적인' 경험을 서술한 에세이 장르를 선호하지 않는다. 보편적이지 않은 경험에는 호기심이 생기지 않더라. 물론 저자에 따라 보편적인 경험을 풀어낼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내가 접해본 바로는 그렇고, 내가 알아낸 나의 취향은 이렇다. 안타깝지만 본인 무의식과의 원활하지 못한 소통 덕분에 대체 어떤 이유에서 남의 창작물을 부정하고 보는지, 혹시 낯선 경험에 대한 동경 때문에 타인의 삶을 애써 무시하게 되는 건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튼.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부터다. 이 책은 뭔가 다르다. 통제가 어려운 나의 집중력마저 음소거를 시킨다. 작가의 감정이 나의 것과 연동된 것처럼 흘러간다. 운이 좋게 성격과 성향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랬을까? 내가 방금 뱉은 문제에 대한 해답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는 운전면허 기능 시험을 80점으로 통과했다. 100점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전공 자격증 시험과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노빠꾸 스트레이트 1일 4시간 연수를 뒤로하고 일주일이란 텀을 둔 채로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10분 전에 배우고 10분 후에 쳐도 불안한 판에, 일주일? 솔직히 진심으로 떨어질 줄 알았다. (본문에서 내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문장을 읽었을 때 정말 소름이 돋더라) 나는 실격을 받자마자 재응시료를 내려고 초록색 체크카드를 뽑아 패딩 왼쪽 주머니에 넣어두고 지퍼를 채웠다. 쉬고 있어. 좀 있으면 돈 나갈 거니까. 근데 붙었다. 축하합니다, 합격입니다.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도 안전벨트를 풀지 않았고 면허학원 관계자가 나의 빛바랜 차로 다가와 '내리셔도 됩니다.'라며 말을 걸 때까지도 얼떨떨했다. 내가 기능을 통과했다고? 다룰 줄 아는 기능이라고는 돌발 상황에 누르는 깜빡이 타격밖에 없는데.


그래서 도로주행 일정을 미뤘다. 진심으로.


시기가 시기인지라. 수능이 끝난 학생들과 이번 겨울을 놓치면 20년 뒤에나 운전면허를 딸 것이라는 저주를 들은 사회인 등 제각기의 사연이 모여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운전면허학원에 경쾌한 카드 결제 완료 신호를 채워주었고, 나는 그 핑계로 한걸음 물러나서 일단 집에 갔다, 일단. 다음 수업 예약을 잡아보자는 제안이 안내 데스크를 넘자마자 '전화로 다시 연락드릴게요!'라는 외침을 학원에 버려둔 채 무작정 집으로 출발했다. 근데 웃긴 게 겨우 기능 시험을 통과한 주제에 내 옆을 스치는 모든 기계 덩어리가 가소로워 보이는 거다. 집으로 가는 동안 머리를 몇 번이고 휘저었다. 이런 멍청한 인간이 다 있나. 방금까지 그렇게 떨어놓고. 생각을 환기해 보려 주변인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모두가 바란 적도 없는 방향으로 입을 모으더라. '100점이나, 80점이나 합격한 건 똑같아.' 맞는 말인데. 지금 내가 믿을 수 없는 건 그게 아니라고!


처음이라는 사실은 대체 어디까지 면죄부를 주는 걸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초보라는 사실만으로 내게 주어지는 혜택이, 아무리 초보라도 이건 아니지! 와 같은 태세 전환 분노와 아주 가까이 맞닿아있다는 사실이다. 마음을 편히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초보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선을 넘으면 미친 인간이 되는데 그 선을 예의주시하기엔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지나치게 많다. 내 바퀴가 연석을 밟으면, 뭣도 모른 채 중앙선 너머의 차선을 구경하면, 최저나 최고 속도를 지키지 못하거나 차에 기본적으로 탑재된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쩌나- 하는 걱정만 늘어나고.


그치만 시간이 조금 지나 생각해 보면 정말 별일이 아닌 것만 같다. (그 당시에는 정말 떨려 심장을 뱉어버릴 작정이었음에도) 5초 내에 방향 지시등을 켜지 못할까 하는 걱정은 대체 왜 내 잠을 방해했는가? 의문이 들다 못해 헛웃음이 난다. 대체 나는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길래 초보 중에서도 극히 일부가 되어 피폐함을 직접 만들어 견뎠던 것인지. 모르면 배우면 된다. 익히지 못했다면 시험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고,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잉크가 마르지 않은 운전면허증을 붙잡고 도로 중간에서 오열할 일도 없다. 초보의 두려움은 상상력에 한계가 없고 겁에 깊이가 없어서 새로운 도전 자체를 막아선다. 이해할 수 없지만 사실 그 모든 건 나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이해할 수 없었던 나와의 소통에 박차를 가한 뒤 초보력에 제동을 걸어보거나 자신이 초보임을 깨닫기 전에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기능 시험을 통과한 뒤에서야 정리한 몇 가지 생각 중 한 가지. 더 이상은 초보 신분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초보 단계를 단축하는 방법은 자신이 초보자임을 인정하고 초보력을 누리는 것이다. (이 부분은 정말 장담할 수 있다.) 물론 자기 객관화가 안되는 사람 몇 명이 우리의 마음가짐을 흐려내곤 하지만, 누구나 초보였던 시절이 있고 나 또한 어느 숙련자가 되어 다음 초보자를 지켜볼 경험이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그때 그에게 내가 해줄 말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나도 초보였는데 하다 보니 되더라? 따위의 무책임한 말들. 전하고 싶은 건 이거다. 초보라는 사실만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사서 겁먹기 전에 외압이 너를 떨게 만들 것이다. 그전까지 초보가 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해 봐! 왕초보에서 초보로, 그 중간을 한참 넘어서서 베테랑에 닿기까지 많은 수없이 많은 초보 자격을 얻겠지만, 그 속에서 누릴 것을 누려보자고.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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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욕심이 생겼어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고향옥 옮김 / 김영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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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가끔은 진지하고 가끔은 가볍게 생각해 봐도 욕심이라는 건 분명 궁극적인 발전을 위한 마중물인 것 같은데 우리는 왜 의식적으로 욕심의 존재를 무시하게 되는 걸까. 사실 이유를 알 것도 같은데 이 또한 의식적으로 무시하게 된다. 욕심의 크기는 대체 무엇에 따라 갈리고, 표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하길래.

 

이 책은 보편적인 에세이집의 형태와는 다르게 글이 풍부하지 않다. 하지만 그 사이 한적한 공간을 센스 있는 삽화가 채우고 있고, 이해는 쉽지만 내뱉기가 어려웠던 나의 욕심이 그 위를 꾸민다. 쉽게 말해, 이 책은 사소하다. 사소한 욕심을 나열하고, 그로 인해 사소하게 느껴지는 나의 일상까지를 예측한다. 누구나 경험했겠지만 글자로 묘사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과연 욕심은 당연하고 일상적인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의 욕구는 어디까지 인정받을 수 있는가?

인생과 하루는 그 누구의 평가를 받을지언정 결국 주체의 의지대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의지조차 굳건하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인간이라 인위적임을 느끼고, 또 제 손으로 인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욕심을 내는 상황 자체를 의뭉으로 취급하게 된다면 우리네 일상에서 사소한 욕심은 거대한 이기심이 되어 다가온다.


욕심이란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을 뜻한다. 여기서 기억하고 싶은 부분은 결국 이 또한 마음이라는 것. 주체의 감정이거나, 기분이거나, 생각일 뿐이라 누구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물론 과한 욕심을 실행에 옮긴다면 재단할 필요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나의 조그만 욕심을 부려 사소하고 별것 아닌 욕심으로 소재를 제한하기로 한다.


가장 최근에 부린 욕심이 무엇인가? 또는 가장 최근에 참아낸 욕심은? 너무 사소한 일이었는지 죄다 잊어버려, 마치 인생에 욕심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순수한 상태가 되었지만 지금 당장도 욕심을 만들어내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인간에 그치므로, 앞으로의 욕심 또한 해소하지는 못할지언정 언급조차 금한 채 삼켜내지만은 않기로 한다. 감정을 기록하고 묘사하는 행동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매일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하루들이지만 그 사이 욕심을 숨기지는 말자. 하루와 하루를 잇는 나의 솔직함을 매몰시키지는 말자.


이 책에 동조하며 살짝 생겼을 욕심은 우리를 환기 시킨다. 무엇보다 가볍지만 누구보다 효과적이다.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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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철 전 카이스트 총장의 대한민국 과학기술 미래전략
신성철 지음 / 김영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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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타오른 불꽃은 빠르게 꺼진다는 말이 있다. 근데 그건 타오를 장작이 없을 때나 하는 말이고. 계속해서 연료를 집어넣는 상황에서도 불이 빠르게 꺼질까? 아닐 걸 알지만 그건 해봐야 아는 거라고 하니까, 지금 우리는 장작이 잘 타오를 수 있는 구조를 찾아내야 한다. 영영 꺼지지 않는 불꽃이 계속해서 우릴 밝힐 수 있도록 불길이 나아갈 방향을 예측하는 것.

 

트렌드는 향유하는 자가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모순적이게도 우리는 사회의 트렌드를 읽어내려고 한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미래를 예측해야만 하는 것이 사회 발전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둬버리면 언젠가 불꽃은 꺼진다. 그제야 가능성을 찾기엔 이미 어두워진 뒤라. 가장 빛날 때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미래다.

 

개인이 아닌 국가 단위의 미래는 어떤 식으로 예측할 수 있을까? 개인의 미래보다 상상하기 어려운 이유는 비단 개인의 집합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차적으로 구성원 개인이 오류에 대한 책임을 지기가 버겁고 우리의 곁을 구성하는 모든 선택지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에 정답이 나와있는 것처럼 보여도 쉽게 추려내기가 어렵다. 내 생각이 옳지 않다면? 만약의 만약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기술에 힘을 싣는다. 기술은 우리를 표면으로 끌어냈고, 이제는 우리의 차례라. 상공으로 띄워줄 기술을 향해 찬사를 보내고 새로운 도약에 대한 기대를 건다.

 

미래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다양한 분야로부터 영향을 받아야만 한다. 일상의 불편함과 결합된 발전은 또 다른 혁신을 구축하고, 그 혁신은 또 다른 혁신의 토대가 되어 단단한 길을 만든다. 대상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발전에는 끝이 없으므로 계속해서 성장하는 사회와 국가에 속도를 맞추어 더한 편리와 더한 접근성을 갖추게 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미래를 향한 전략을 수립하는 것과 같다.

 

당장의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대변혁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예측하진 못하지만, 누군가의 열정에서 비롯된 과학기술과 미래전략에 대한 지지는 여전할 자신이 있다. 잘 생각해 보면 그 자체가 신뢰에서 비롯된 예측이 아닐까 싶기도.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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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여행하는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
마이크 둘리 지음, 권경희 옮김 / 김영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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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선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시공간적 배경에 대한 통일은 바랄 수 없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서 '출발'하게 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출발과 내가 원하는 출발선이 명확히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좌절을 경험한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떼지 못했을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얼마나 막막할지, 상상조차 두려운 상황이다. 그렇다고 외면하기엔 내게 너무 가깝고.

 

인간은 대체적으로 자신이 경험해 본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산다. 그것이 역사가 기록되는 이유고, 다음 세대의 눈부신 발전을 장려하는 지름길이기에. 게다가 누군가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할 책임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겠지. 부모나, 스승.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나보다 작은 이에게 전해야 할 책임이 따르는 사람.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과 확신이 늘 맞고, 늘 같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른에게 철학을 요구한다. 경험을 통해 얻어낸 선구자의 교훈과 메시지를 이제야 세상을 배워나가는 사람이 꼭 습득하여 괜한 고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작은 마음에서. 여기 그 모든 걸 모아 사랑하는 딸에게 편지를 쓴 사람이 있다. 그 편지를 엿볼 기회도.

 

마법의 소라고둥이라는 소재를 아는가? 모 만화에서 등장한 장난감인데, 장난감을 작동시키면 그 안에 녹음되어 있던 문장 중 하나가 무작위로 재생된다. 문장들은 대체로 질문에 대한 답변의 형태를 가지며, 질문자는 그 대답을 듣고 사건의 앞날을 예측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디까지나 장난감이니까. 같은 맥락으로 고민에 대한 해답을 내려주는 일명 '마법의 책'이 유행한 적도 있었는데, 이 모든 물건들의 공통점을 고르자면 이전의 대답이 현재의 고민을 결정해 준다는 점이다. 녹음과 인쇄는 과거에 이루어진 일이나, 그 내용들은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준다.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것은 주체자의 의지지만.) 실제로 나도 해당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아주 반신반의하며 책의 페이지를 펼친 경험이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붕 뜬 소리를 하고 어쩌다 한 번은 마음에 쏙 드는 말을 해주더라.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나의 판단으로 이루어지기에 결국엔 이 마법의- 시리즈를 통해 나의 속마음을 판별해 내는 것이지.

 

<우주를 여행하는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는 제목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드러낸다. 누구에게나 오늘은 처음이고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이라지만 나보다 조금 더 오래 산 사람에게 나의 하루는 교정해 주고 싶은 시간의 연속으로 비칠 것이다. 그 친절이 과하면 참견이 되고, 지나치게 멀리 서있으면 방임이 되고 마니 우리는 그 선을 철저하고 세심하게 지켜나가야만 한다. 꽤 독립적으로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나의 기준에서도 이 책은 세상을 살아가며 필수적으로 겪게 될 감정 소모의 이벤트에서, 일종의 마법의 소라고둥이 되어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독 인상 깊게 다가왔던 포인트는 당장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아이가 어린 탓도 있겠지만) 누군가를 위한 조언을 남길 때 흔히들 서술하게 되는, 내가 네게 편지를 남기는 이 시점의 경제 상황은 이러하고 사회 전체의 학업 분위기는 이러하니 내 생각에 너는 이쪽 진로를 택하는 게 앞으로의 삶의 영위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와 같은 현실적이고 따분한 조언이 아닌, 어딘가 붕 떠있는 감정적 조언과 행운을 위주로 서술하는 일종의 부적 같은 느낌이었다. 책을 가만히 쥐고만 있어도 직관적이고 일차원적이어서 다듬기가 어려운 보호자의 무한한 사랑이 전해지는 느낌.

 

굳이 명시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과정의 불운과 불행은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되고, 그들을 삽으로 파내어 버린 뒤 빈 구멍을 멀쩡한 감정으로 채워내는 것은 모두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과정 자체가 버겁고 역겹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의 조언이 힘이 될 때가 많다. 아주 가볍고 가볍고 또 가벼울지라도. 저자는 자주 힘들고 가끔 행복할 생일지라도 자신의 길을 당당히 걸어나갈 딸을 위해 펜을 들었다고 한다. 근데 내가 느끼기엔, 딸의 탄생으로 존재 의미를 찾은 아빠의 삶도 이 책의 원고를 작성하며 완성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랑을 주고받고 지금의 사랑을 미래의 딸에게 전하는 과정은 이토록 소중하니. 딸을 위해 행운과 마법의 소라고둥이 된 아빠의 조언을 함께 나누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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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야망을 가진 당신에게 - 여성은 리더가 되길 주저하는가
이은형.유재경 지음 / 김영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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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오든, 생판 남 같은 분야보다는 내가 흥미를 품고 있는 분야인 게 좋겠지. 남은 생의 방향 키를 맞춘 채 나아가고 싶은 곳, 나의 이름을 또박또박 새기고 싶은 곳에서 인정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쉬운 말로 정의가 된다는 건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므로 아직 사회의 초년을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그림의 떡으로만 느껴지지만, 나의 목표를 대신 달성한 롤 모델은 지금도 생겨나고 있으므로 끝없이 노력한다면 희망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성과와 인정에서 작용하는 잣대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설마, 성별? 설마는 아직도 사람을 잡고 다닌다. 대체 언제까지. 뒤집어서 생각해 보자.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의 성과는 '무능력'하기 때문에 도태되는 것일까?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의 성과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인가? 우리는 인정의 유무를 따지기 전에, 내게 닿은 결과물과 그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이 속한 구조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인정을 위한 단상에 오르지 못한 이유. 고개 숙여 명예와 훈장을 거절하고 그늘에 주저앉는 이유. 올바른 곳에 맞춰내는 초점은, 생각보다 많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성은 어디서나 겸손을 탑재한다. 이게 긍정적인 현상인지 부정적인 현상인지 알아보기엔, 나도 여자라 여자 편을 들 수밖에 없다. 사회에 입장하기 직전, 대학생의 시선에서 보기엔 일단 부조리하다. 그것도 엄청나게!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이 문제는 결코 일부의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성장 환경을 이렇게 조작한 건 사회다. 여성들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해 과한 두려움을 갖고, 책임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충분한 리더십을 갖추었음에도 자신을 무한정 깎아내리며 일생의 기회를 놓치곤 한다. 마치 그것이 정석이라도 되는 양. 사실 나조차 지금 당장은 여성의 나아감을 장려하지만, 무언가 대단한 제안을 받을 때마다 한 걸음 물러서는 습관이 있다. 어디서 배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 최악의 버릇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책임지지 않을 일을 맡는 사람이 넘쳐난다. 감당하지 못할 일임을 알면서도 판을 벌리는 사람이 남아돈다. 우리는 내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의무적으로 길러내, 도전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하고 싶은데도 하지 않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남부럽지 않은 능력과 경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경우는 수많은 기회를 불투명하게 만들기에. 물론 예외란 존재하는 법이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언제 어디서나 겸손의 늪에 갇혀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자신감과 야망을 가진 여자를 손에 꼽을 수 있는 이유가 뭘까.

나는 이 상황이 결코 여성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서는 것은 남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포트를 하는 건 여성이. 언제부턴가 고착화된 사회 구조와 정형화된 분위기를 개선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의 책임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전혀. 그렇다고 나중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거지. 우리는 합의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 책임을 고려하나, 결국엔 긍정적으로 명예를 받아들이자고. 물론 어렵다. 그러니까 전통인 것마냥 남아있는 문제 아니겠는가. 하지만 여기 안주해서는 안 된다. 안되고, 안 된다. 같은 분량과 같은 퀄리티의 성과를 동시에 냈음에도 일부만 인정을 받는다는 건 현실 사회의 문제다. 겸손은 본인의 선택 아니냐고? 인간의 주체성은 타의로 접히기도 한다.

여성은 지금도 물러선다. 능력에 따라 마땅히 주어지는 명예와 지위에서 자의적으로 벗어나 책임의 그림자에만 종속된다. 근거가 완벽하지 않은 칭찬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작고 적은 글을 작성하는 나조차 나의 성과를 사는 말을 들으면 쥐구멍으로 숨게 되고, 마치 여성이 가지는 야망과 자신감은 다른 사람의 것과 다른 것처럼 굴고는 한다. 당당한 여성이 되면 누군가의 비난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냥 잘난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어떤 조각을 쥐고 있는 것인지.

여성은 여성에게 영향을 준다. 우리는 내 뒤를 이을 여성을 위해서라도 내가 가진 야망을 세상에 전시할 필요가 있다. 또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게 되지만 그조차 한 걸음이 될 거라고. 한 세대씩 고쳐나가다 보면 멀지 않은 미래에는 동등한 야망으로 지휘봉을 잡을 나의 동생들이 새로운 개혁을 꿈꿀 것이다. 성별에 겁먹어 찬스 앞에 물러서지 않고, 우리도 욕심이란 걸 부리며 리더의 자리에 올라 세상을 휘두를 수 있다고. 나를 깎아내리는 건 외부의 존재로써 충분하다. 나의 능력을 후하게 평가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음을 부디 잊지 않기를. 건강한 욕망을 실현하는 건 인간으로서 존경스러운 일이다. 일과 성과에 대한 야망이 넘친다고 해서 숨지 말자. 나를 위해, 과거와 미래의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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