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뱅의 책을 읽고 별점을 4점을 주었다가 다시 5점을 주었다가 4점을 주었다가 또 다시 5점을 주었다. 시인이 쓴 글을 보면 도대체가 자기도 잘 모르면서 나불대는 것만 같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궁시렁대면서 의식 불명의 상태로 문장들을 따라가는데, 어느 순간 환상의 세계가 펼쳐졌다. 내가 있던 작은 방의 풍경은 사라지고,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찬 시간의 방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이제는 책에서 나와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려운 일이다. 무용한 독서에서 유용한 거짓으로 건너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中
책을 읽으면서 생긴 변화 중 하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가소로워졌다는 것이다.
2
지난 번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크게 다툴 뻔 했다. 전세가가 폭등한 게 너무 다행한 일이라는 거다. 최근에 전세 계약을 맺고, 같은 건물의 갱신 계약 건 가격과 우리의 계약 가격을 비교하고 머리에서 열불이 나던 차였는지라 마음 같아선 친구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눈을 부라리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친구는 그 전까지만 해도 부동산이나 주식에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근데 그게 얼마나 중요한 지 이번 일로 깨달았다는 것이다. 자기는 돈을 모아 집부터 장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자 돈에 초연한 척 굴었던 내 발언들과 순간적으로 분노에 차 눈을 부라린 모습이 동시에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나는 물질엔 관심없는 척 굴면서도 누구보다도 돈을 원하는 속물인 게 분명했다.
3
주식을 한다. 부동산 정보를 찾아본다.
사업 아이템을 생각해본다.
같은 날, Hotel Califormia를 들으면서 보뱅의 책을 읽는다.
Mirrors on the ceiling,
The pink champagne on ice
And she said, 'we are all just prisoners here, of our own device'
And in the master's chambers,
They gathered for the feast
They stab it with their steely knives,
But they just can't kill the beast
- The Eagles, <Hotel California> 中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 신 혹은 사물들을 피난철 삼는 삶이다. (중략)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中
우리는 그렇게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사이를 진동한다.
왼쪽에서는 부양해야할 영혼들이 등을 떠밀고
오른쪽에서는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 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의 것도 있는 듯 하다.
4
유용함이 우리를 돕던 과거의 시절을 지나,
이제 우리는 무용함이, 무해함이 위로하는 시기를 겪고 있다.
다행한 것은, 그 무용한 것들은 언제나 곁에 있으리라는 것이다.
당신은 꼼짝하지 않는다. 기차가 하나씩 출발하는 모습을 본다. 당신은 기차에 오르는 사람들, 비즈니스맨들, 존재감 없는 창백한 인간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기차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눈다. 돈과 관련된 따분한 이야기다. 당신은 그들 바로 곁에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한 소리가 그것들을 집어삼킨다. 종이 위에서 사각대는 펜 소리. 글 쓰는 이가 무슨 일에 끝없이 몰두해 있는 듯,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 약속의 땅 러시아, 작은 나무집 위로 내리는 눈처럼,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소리다.
-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中
우리가 글을 써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