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쓰는가?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지은이: Paul Auster

옮긴이: 김석희

 

이 책은 폴 오스터가 80년대와 90년대에 쓴 여섯 편의 글들을 모은 짧은 에세이집이다.

 

이 글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작가가 된 계기를 담은 자전적인 에세이들과 그가 발표한 사회적, 정치적 글들을 포함한다. 그의 소설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개인적이고 인간적은 면모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날 밤 이후, 나는 어디에나 연필을 갖고 다니기 시작했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주머니에 연필이 들어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 연필로 뭔가를 하겠다는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싶었다. 빈손일 때 한 번 당했으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작정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세월은 나에게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히 가르쳐 주었다. 주머니에 연필이 들어 있으면, 언젠가는 그 연필을 쓰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크다.

내 아이들에게 즐겨 말하듯, 나는 그렇게 해서 작가가 되었다.

(pg. 41, 1995년, '왜 쓰는가?' 중에서)

 

나는 아침마다 그를 위해 기도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책을 한 권 썼다는 이유는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책을 쓰는 것은 내 일이기도 합니다. 역사의 변덕과 운명의 장난 때문에 나도 그와 같은 처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니라 해도 내일은 그렇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같은 클럽에 속해 있습니다. 단독자, 은둔자, 괴짜들, 작은 방에 틀어박힌 채 종 위에 글을 써넣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인생의 태반을 보내는 자들의 비밀 결사인 것입니다. 그것은 기묘한 생활 방식이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자만이 그것을 천직으로 선택합니다. 그것은 너무 힘들고, 대가는 형편없고, 실망이 거듭되는 생활 방식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작가들은 다양한 재능과 야심을 가지고 있지만, 제 몫을 하는유능한 작가라면 모두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할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지금까지 쓴 모든 글에서 그 자유를 행사했고, 살만 루슈디도 만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형제로 만들어 주었으며, 그의 곤경이 곧 나의 곤경이기도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pg. 87-89, 1993년, '살만 루슈디를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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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남자
정경윤 지음 / 동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2012년 11월 23일에 종이책으로 읽다.

 

 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고 몇 해 전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신, 모든 것이 평범하다 못해 모자라기만한 이지영. 스물아홉의 대기업 임원 비서인 그녀는 한 남자를 지난 삼 년간 짝사랑하며 가슴앓이를 해왔다.


그녀의 짝사랑의 대상은 눈이 부신 외모와 체격, 남부러울 것 없는 학벌과 능력에 재벌2세라는 배경까지,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남자, 윤승주 상무.

12월 25일에 태어나 생일마저 예수님께 빼앗긴 지영의 작은 소원은 윤승주 상무와 마주보며 자신의 생일날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것.


가을이 끝나가던 어느 날, 윤승주 상무를 멀리서 바라만 보던 지영에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고 그녀는 그의 전속 비서가 된다. 그리고 무표정하고 무심하기만한 윤승주 상무가 변하기 시작한다.

 

이어서 고개를 돌려 조용한 집무실 안을 돌아본 그는 지금까지와는 뭔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회색 카펫, 말끔히 정리된 손님맞이용 소파 테이블과 집무 책상, 화초들, 그리고 무표정한 자신까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어제와는 달랐다. 이 안의 뭔가는 확실히 변해 있었다.

창가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어제보다 약간 더 밝았고, 공기엔 차가운 바깥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회색 카펫엔 지영이 진공청소기로 청소했던 흔적이 아주 조금 남아 있었으며 소파 테이블과 집무 책상 위엔 어제 보지 못했던 보라색 소국 꽃병이 놓여 있었다. 화초들은 어제보다 한층 더 싱싱해 보였고, 그 안에 동양란 한 촉은 밤새 꽃망울이 터졌던지 수줍게 꽃잎을 벌리고 있었다.

하루 만에 문득 자신을 둘러싸 모든 것이 생소하게 보이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중략)

변한 것은 주위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에야 '똑같은' 일상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않나.

그저 비슷하게만 보일 뿐, 조금만 신경 써서 봤더라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조금씩 다른고 그 안에 소소한 재미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텐데, 지금껏 자신은 삶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거다. 아니, 오히려 피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거울 안에서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얼굴은 아직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이제야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인 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스스로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지영."

'관심'이 생겼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도, 그리고 한 여자에게도.

평범하기만 한 이름이지만, 그 이름을 되뇌어 보는 승주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pg. 120-121) 

 

재벌 2세인 완벽한 남자와 그의 전속 비서인 평범한 여자라는 뻔한 설정과 사내 연애라는 흔한 소재를 가지고 참 기분좋고 유쾌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특별한 악역도 없고 극적인 사건도 없지만 무심하고 무뚝뚝한 남자가 마음 따뜻하고 착한 여자를 만나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특히 이야기 전반 곳곳에 뿌려져 있는 톡톡 튀는 유머가 유쾌하다.  

  

"네. 그럼 오늘로 잡아 두었던 레스토랑 예약은 바로 취소하겠습니다."

메모를 하려고 서둘러 책상 위의 연필을 집어 들던 지영의 귀에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어요."

"......?"

"이지영 씨, 오늘 저녁에 시간 있습니까?"

툭.

메모지에 닿은 연필심이 부러지며, 지영의 이성도 함께 부러졌다.

(pg. 128)

 

뒷부분이 연재 때와 많이 달라졌는데 개인적으로 참 좋았다. 유쾌하고 따뜻한 이야기의 기분좋은 뒷마무리. 크리스마스 이브, 함께할 연인이 없는 분들께 추천드린다. 혼자서도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지영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던 하얀 홑이불이 눈 밟는 소리처럼 사라락, 허리께로 흘러내렸다.

"태어난 이래...... 최고의 생일이에요."

입술을 슬쩍슬쩍 떼며 중얼거리는 지영에게 승주가 속삭였다.

마침내 소원을 이룬 크리스마스.

기적처럼 연인이 된 두 사람을 축복이라도 하듯, 세상은 온통 화이트크리스마스였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pg.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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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고 라운드 - Navie 291
심윤서 지음 / 신영미디어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2012년 11월 9일에 종이책으로 읽다.

 

이 글은 특이하게도 이메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 남녀가 서로에게,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메일들로 이야기가 이어져 간다.  

 

화사한 분홍의 표지만큼이나 화사하고 달콤한 글이다.

 

작가의 말에도 나와 있듯이 이 글은 ‘봄 같은 사랑 이야기’이다.

‘얼굴이 잘 붉어지는 봄꽃 같은 여자’, 윤은홍과 ‘무미건조하지만 사실은 아주 섬세한 남자’, 이각모, 이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참 평범하지만 따뜻한 이야기이다.

 

꽤 괜찮은 광고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외삼촌의 가구 공방에서 전통 가구 제작하는 일을 배우는 연홍은 어느 날 반강제로 선을 보게 된다. 그녀의 선 상대는 로펌 대표이사인 부친이 점찍은 변호사로 이각모란 남자. 각모는 그의 보스가 자신의 딸과 선을 보라는 말에 망설이다 결국 선 자리에 나가게 된다.

 

두 사람은 막 봄이 시작되는 때에 삼청동 민속박물관 제2전시실 느티나무 단층 머릿장 앞에서 처음 만난다.

     

 

단층머릿장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웹 

 

그 이름만큼이나 보들보들하고 순수한 연홍과 그 이름만큼이나 각이 지고 딱딱한 각모는 그렇게 선을 보고 만남을 거듭하고 서로를 알아간다. 

 

처음 연홍을 멀리서 본 각모는 그녀의 수줍게 얼굴 붉히는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고, 반면 연홍은 각모를 보고 ‘평안도 숭숭이 반닫이’ 같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평안도 숭숭이 반닫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크기가 크고 전면의 장식이 섬세하다고 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건조하고 메라른듯 하지만 그 속은 누구보다도 섬세한 각모를 연홍은 제대로 알아본 것이다.  

 

만남을 거듭하고 서로를 알아가던 두 사람은 결혼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말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가정과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다.  

 

  

숭숭이 반닫이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웹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른 이 두 사람은 선 본 이들 사이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따뜻하고 정겨운 자신들만의 가정을 가지고 싶어한다는 점. 그리고 그 꿈이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 같은 순간, 모든 것을 뒤흔드는 일이 생기고 두 사람은 거듭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된다.  

      

왠지 추운 겨울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귤이나 군고구마를 먹으며 읽으면 참 좋을 것 같은 글이다. 가족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화사하고 달콤한 이야기에 마음이 저절로 따듯해진다.

 

부레풀은 아교보다도 접착력이 더 강해서 성질이 전혀 다른 두 개의 나무를 붙일 때 많이 사용한대. 가구의 뼈대가 되는 소나무와 마감이 되는 괴목 사이에 부레풀을 바르고 마끈으로 칭칭 동여매서 다시 6개월을 기다리면 소나무와 괴목은 한 몸인 것처럼 달라붙는 거지. 연리지처럼 말이야.

갑아.

그 지난한 작업을 바라보며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아니?

전혀 다른 인격의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 일심동체를 이루려면 그 사이에 무엇이 필요할까, 였어. 현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부레풀 같은 사랑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pg. 66-67, To 연갑 from 윤은홍)

 

이모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세상에 내가 원하는 남자는 없다는 거야. 세상엔 자기 나이만큼 살아온 ’그냥 남자‘들만 있을 뿐이지.

은홍.

연애란 말이지, 그렇게 살아온 ‘그냥 남자’ 속에서 네가 원하는 걸 찾아내는 거야. 보물찾기처럼. 아무도 없는 주차장에서 좌회전 깜빡이를 켜는 모습이 유통성 없고 답답해 보일 수도 있고, 반대로 배려 깊고 반듯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네 관점에 따라 ‘그냥 남자’는 특별한 남자가 될 수도 있고 찌질한 남자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그렇게 하나하나 찾아내다 보면 어느 날 ‘그냥 남자’는 ‘너의 남자’가 되는 거지. 어쩌면 이각모라는 남자는 네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감추고 있는지도 몰라. 물론, 아닐 수도 있고.

(pg. 95, To 윤은홍 from 우아린)

 

“잘 자요.”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는 남자의 어깨를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저 어깨를 한번 토닥여 줘야지, 생각했어요.

이모.

예전에 제가 짝사랑했던 남자들과는 언제나 마지막을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남자는 계속 내일을 생각하게 해요. 그래서 바쁘다고 연락도 없는 남자를 자꾸 용서하게 되나 봐요. 내일…… 만나면 되니까.

(pg. 148-149, To 우아린 from 윤은홍)

 

“나두요. 나두 달 같은 사랑이 좋아요.”

그네가 높이 솟아오르자 오월 양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말했어.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만 또 언제나 다른 모습이잖아요. 채워지고, 비워지고, 그러다 다시 채워지고. 모습이 달라져도 알 수 있잖아요. 언제나 거기에 달이 있다는 거요. 화내고 짜증 내고 싸워도 언제나 거기에 사랑이 있다는 걸 서로 느낄 수만 있다면, 그건 꽤 멋진 관계가 될 거 같아요.”

그네가 솟아오를 때마다 오월 양의 목소리도 허공으로 높게 흩어졌어. 가슴 깊숙이 물방울이 맺히듯 왠지 간절한 목소리라는 생가도 들었어. 어디선가 라일락 향기도 날렸지. 오월 양의 펄럭이는 스커트자락을 바라보다 문득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거 같아 그넷줄을 잡아챘어.

(pg. 181, To 이준모 from 이각모)

 

갑아.

가슴 한가운데, 심장이 뛰고 있는 그곳에 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닿았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너무 놀라 숨을 내쉬지도 들이마시지도 못하는 그 순간에 고작 내가 생각한 거라고는 ‘땀 냄새 나면 어쩌지’였어.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샤워하고 어떤 브래지어를 했더라’하는 앙큼한 생각도 했어.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아무리 갑이 너라도 말할 수 없어.

키스를 받을 수 있는 곳이 그렇게 많다는 걸 처음 알았으니까. 내가 키스 받은 곳을 모두 알려 주고 싶지만, 네가 너무 괴로워할까 봐 생략할게.

허락할 테니 마음껏 상상해 봐.

 

스물여덟 곳에 키스를 받은 은홍.

(pg. 376-377, To 연갑 from 윤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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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고등학교 1
은태경(계란토스트) 지음 / 발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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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12년 11월 2일에 종이책으로 읽다.

 

소설은, 특히 장르소설은 취향을 많이 탄다고들 하지만 그 말을 이번처럼 공감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비싼 돈 주고 구입한 책이고, 힘들게 쓰신 분을 생각해서 꼭 한 번은 읽어야겠는데 책을 다 읽기가 정말 힘들었다.

일단 한 번 다 읽고 난 소감은…… 한 마디로 표현해서 대략난감이다. 나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이 책은 로맨스소설이 아니라 인터넷소설이다. 소재와 설정, 인물들과 에피소드들, 거기에 더불어 문장들까지 십대들이 쓰고 읽는 인터넷소설 같다.

 

여자주인공인 김수영은 집안의 사정-사실 제 정신이 아닌 모친의 광기 탓-으로 어릴 때부터 남자로 키워진다. 그리고 남자주인공인 최민우는 중학시절부터 그런 그녀의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킨다. 두 사람은 함께 남자중학교를 다니고 남자고등학교로 진학을 한다. 두 사람의 또 다른 절친인 승욱과 강도 함께 학교를 다닌다.

아무리 특이하고 황당한 설정이 로맨스소설에서 나쁘지 않고 흔하다고 하지만 이건 조금 너무했다.

일단, 두 집안 모두 재벌이다.

여자주인공 김수영은 웬만한 또래 여자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뒤지지 않는 미모를 가지고 있지만 남자로 훈련되어서 키워진 덕에 못하는 운동이 없고 싸움 실력 또한 출중하다. 남자주인공 최민우는 말이 필요 없다. 그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 외모, 두뇌, 집안은 물론이고 김수영 하나만을 보는 일편단심까지.

나를 더 황당하게 했던 것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에피소드들이다. 수영이 고등학교의 축제 때 여장을 하고 활약하는 모습이나 민우가 웨이터 차림으로 인기를 끄는 모습. 여장을 한 수영과 일일 웨이터로 가장한 승욱과 강이 함께 파티에 참석해서 민우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감시하는 장면들. 이 모두가 순정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장면들이다.

게다가 뒤에 밝혀지는 수영 모친의 사연은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이 없다. 군데군데 억지스러운 설정을 뒷받침하려는 긴 설명이나 해설도 보인다.

 

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연재 때도 그렇고 출간해서도 인기를 끈 것으로 안다. 작가님의 필력 또한 나쁘지 않았다. 일인칭 시점, 수영의 눈으로 이어가는 이야기들이 흡인력이 있다. 하지만 너무도 억지스러운 설정이나 뻔하면서 황당한 에피소드들에 정말 내 취향은 아니었다.

      

“김수영.”

“나 남자 안 좋아한다.”

“으응.”

“여자도 안 좋아한다.”

“야, 그럼 뭐냐?”

“김수영만 좋아해.”

낯이 뜨거워 미치겠다. 야, 너무 닭살스럽잖아. 민우의 시선이 너무 부드러워 얼굴이 더 달아오른다. 지금이 저녁인 것이 천만다행이다. 바람이 좀 더 불었으면 좋겠다.

“남자라서, 여자라서, 그런 이유가 아니라 김수영이라서 사랑해.”

얼굴이 불에 탈 것 같다. 너 원래 이런 인간이었냐. 너무 좋긴 한데 돌겠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작 녀석의 발끝만 보며 숨을 골랐으나 날 끝까지 궁지로 몰고 갈 작정인지 턱을 잡아 올리는 민우 녀석. 내 얼굴 열기를 감지한 모양이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녀석이 갑자기 재수 없어진다.

(pg.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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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지던트
이서윤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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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설정이 너무 부럽습니다. 늦더라도 딱 이대로만 되었으면 좋겠다는.......

 

2012년 10월 22일에 종이책으로 읽다.

 

1993년 남북 합의에 의한 평화통일

2000년 세계 경제 5위권, 군사력 3위권으로 도약한 통일한국

2004년 통일한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2009년 이강유, 통일한국 3대 대통령으로 최연소 당선

 

이상의 내용들을 바탕으로 한 이 글은 정말 안타깝게도 판타지로맨스다.

 

헌정 사상 최연소인 34세에 통일대한민국의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강유. 수백만 여성 유권자들을 팬으로 거느린 미혼인 젊은 대통령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지난 구 년간 스치듯 마주치기를 거듭했던 한 여자가 점점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그를 흔들어 놓는다.

 

반면, 강유의 가슴은 바람을 맞아 더욱 썰렁해져 갔다. 왜 이렇게 가슴속이 허한지 스스로는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게 외롭다는 감정일까?

잘 모르겠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데, 그럼에도 문득문득 가슴이 허할 때가 있었다.

흠, 외롭다면 결국 연애가 하고 싶은 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추진하기 위해 정신없이 살았다. 20대를 지나고 30대로 넘어온 지도 많이 지났건만, 아직까지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던 그 일이 퍼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떠오른 영상 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거친 모래 바람 속에서도 강인함을 잃지 않던 한 여자의 얼굴.

강지후…….

(pg. 60-61)

 

내전이 일어난 아프리카 아이센공화국에 종군한 여기자, 강지후.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정치부로 발령이 나고 청화대 출입기자가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오빠의 동기동창이자 스무 살 자신의 짝사랑이었던 이강유 대통령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지 말고……”

지후가 올려다본 강유의 눈빛은 고요했다.

“……나랑 연애합시다.”

강유를 올려다보는 지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마치 ‘밥이나 한 끼 먹읍시다’ 하는 말을 꺼낸 사람처럼 일상적인 강유의 표정으로 인해 지후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pg. 102)

 

“방금 강지후는 수백만 여인을 연적으로 돌려 버렸어요. 한순간이네요.”

(중략)

“그래서? 걱정하거나 후회하나?”

지후가 고개를 들었다. 똑바로 강유의 시선을 올려다보며 눈빛을 빛냈다. 열렬한 키스의 후유증으로 도톰하게 부푼 입술과 볼이 발갛게 상기됐다.

“강지후가 후회를? 천만에요.”

그래, 천만의 말씀이다. 대통령은 이 사람의 직위일 뿐, 이강유는 사람이고, 또 남자다. 이렇게 심장이 벌떡대고 뛰는데, 이대로 도망가면 아마 터질지도 모르겠다. 그래, 연애……할 거야. 연애할 거라고!

“대통령 오빠나 겁 집어먹지 마세요.”

지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나, 이제 스무 살 아니거든요.”

눈동자를 반짝이며 바로 그녀 스스로 발돋움하여 강유의 목을 껴안았다. 보기 좋게 늘어진 그의 입술을 다시 찾아드는 지후의 입가에도 웃음이 터졌다. 그녀의 지구 마을로 강유가 돌아온 날이었다. 서로의 마음에 상대가 가득 찬 느낌이 꽃망울처럼 화륵 피었다.

(pg. 130)

 

가끔 잠 안 오는 밤이면 이렇게 내 나라의 땅을 둘러본다는 사람. 답답하고 지칠 때면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되돌아보며, 다시 한 번 자신의 눈으로 아름다운 조국을 확인한다는 사람.

평양까지 오는 동안 나누었던 말을 떠올리며 지후는 천천히 강유의 팔에 몸을 맡겼다.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나른하고 행복한 기분이 몸의 중심에서 시작해 천천히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겁내지 말자, 강지후. 네가 본 이 사람을 믿고, 마음 가는 대로 한번 가 보자. 최선을 다해 좋아하면 되는 거잖아. 그러면 나중에라도 후회 따위 하지 않을 테니까.

(pg. 164-165)

 

이렇게 두 사람은 비밀연애를 시작하고,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이는 점점 깊어진다.

그러나 오래지않아 급변하는 아이센공화국의 내전 상황에 한국은 파병을 결정하고 서로의 입장과 신념을 굽히지 않는 두 사람은 부딪힌다. 결국 대통령 이강유는 전쟁을 시작하는 통일대한민국의 국군통수권자로 전쟁을 지휘하고, 기자 강지후는 전쟁터로 변한 아이센공화국으로 종군한다.

 

조심에 또 조심을 한다 해도 천운 또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구석에서 총알이 날아와 심장에 박힐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후는 자신이 운명처럼 되뇌던 말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의 역사는 우리의 손으로 전할 것이다. 자랑스러운 우리 국군이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이겼는지, 모조리 기록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강유……. 나의 대통령.

(중략)

내가 여기 있는 동안 내 걱정은 않겠다던 당신이……, 나를 잊을지도 모르겠다던 당신이 자랑스러워. 당신은 그 자리에서, 나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게 될 거야. 당신 말대로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돌아섰지만, 찰나를 영원처럼 TV화면에 비치는 강유의 얼굴이 지후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pg. 382-383)

 

통일대한민국에 대한 설정은 눈물 나도록 부럽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미혼의 대통령이라는 가정을 정말 로맨틱하다. 그리고 이런 뛰어난 남자 앞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자신의 신념이 확실한 여자주인공도 정말 좋았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글 중간 부분이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 든다는 것인데 조금 더 이야기의 강약이 더해졌다면 정말 뛰어난 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순전히 나만의 의견 내지 생각. 하지만 마지막 삼분의 일 분량은 와, 하는 감탄이 나오도록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자, 음…… 이대로 드라마 한 편 찍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과 왜 이 작가님은 이다음 이야기를 쓰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이 남았다. 이 뒤로 영부인이 된 지후의 모습을 담은 또 다른 이야기가 나와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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