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남자
정경윤 지음 / 동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2012년 11월 23일에 종이책으로 읽다.

 

 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고 몇 해 전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신, 모든 것이 평범하다 못해 모자라기만한 이지영. 스물아홉의 대기업 임원 비서인 그녀는 한 남자를 지난 삼 년간 짝사랑하며 가슴앓이를 해왔다.


그녀의 짝사랑의 대상은 눈이 부신 외모와 체격, 남부러울 것 없는 학벌과 능력에 재벌2세라는 배경까지,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남자, 윤승주 상무.

12월 25일에 태어나 생일마저 예수님께 빼앗긴 지영의 작은 소원은 윤승주 상무와 마주보며 자신의 생일날 커피를 한 잔 마시는 것.


가을이 끝나가던 어느 날, 윤승주 상무를 멀리서 바라만 보던 지영에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고 그녀는 그의 전속 비서가 된다. 그리고 무표정하고 무심하기만한 윤승주 상무가 변하기 시작한다.

 

이어서 고개를 돌려 조용한 집무실 안을 돌아본 그는 지금까지와는 뭔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회색 카펫, 말끔히 정리된 손님맞이용 소파 테이블과 집무 책상, 화초들, 그리고 무표정한 자신까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전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어제와는 달랐다. 이 안의 뭔가는 확실히 변해 있었다.

창가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어제보다 약간 더 밝았고, 공기엔 차가운 바깥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회색 카펫엔 지영이 진공청소기로 청소했던 흔적이 아주 조금 남아 있었으며 소파 테이블과 집무 책상 위엔 어제 보지 못했던 보라색 소국 꽃병이 놓여 있었다. 화초들은 어제보다 한층 더 싱싱해 보였고, 그 안에 동양란 한 촉은 밤새 꽃망울이 터졌던지 수줍게 꽃잎을 벌리고 있었다.

하루 만에 문득 자신을 둘러싸 모든 것이 생소하게 보이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중략)

변한 것은 주위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에야 '똑같은' 일상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않나.

그저 비슷하게만 보일 뿐, 조금만 신경 써서 봤더라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조금씩 다른고 그 안에 소소한 재미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텐데, 지금껏 자신은 삶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거다. 아니, 오히려 피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거울 안에서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얼굴은 아직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이제야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인 건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스스로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지영."

'관심'이 생겼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도, 그리고 한 여자에게도.

평범하기만 한 이름이지만, 그 이름을 되뇌어 보는 승주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pg. 120-121) 

 

재벌 2세인 완벽한 남자와 그의 전속 비서인 평범한 여자라는 뻔한 설정과 사내 연애라는 흔한 소재를 가지고 참 기분좋고 유쾌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특별한 악역도 없고 극적인 사건도 없지만 무심하고 무뚝뚝한 남자가 마음 따뜻하고 착한 여자를 만나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특히 이야기 전반 곳곳에 뿌려져 있는 톡톡 튀는 유머가 유쾌하다.  

  

"네. 그럼 오늘로 잡아 두었던 레스토랑 예약은 바로 취소하겠습니다."

메모를 하려고 서둘러 책상 위의 연필을 집어 들던 지영의 귀에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어요."

"......?"

"이지영 씨, 오늘 저녁에 시간 있습니까?"

툭.

메모지에 닿은 연필심이 부러지며, 지영의 이성도 함께 부러졌다.

(pg. 128)

 

뒷부분이 연재 때와 많이 달라졌는데 개인적으로 참 좋았다. 유쾌하고 따뜻한 이야기의 기분좋은 뒷마무리. 크리스마스 이브, 함께할 연인이 없는 분들께 추천드린다. 혼자서도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지영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던 하얀 홑이불이 눈 밟는 소리처럼 사라락, 허리께로 흘러내렸다.

"태어난 이래...... 최고의 생일이에요."

입술을 슬쩍슬쩍 떼며 중얼거리는 지영에게 승주가 속삭였다.

마침내 소원을 이룬 크리스마스.

기적처럼 연인이 된 두 사람을 축복이라도 하듯, 세상은 온통 화이트크리스마스였다.

메리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pg.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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