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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평점 :
때때로 우리들은 소설보다 현실이 더 소설 같다는 말을 한다. 이 책을 보면 그 말이 제대로 실감난다. 근대 조선-주로 1920년대와 30년대-를 배경으로 일어난 살인 사건들과 스캔들을 당시의 신문과 잡지 기사들을 중심으로 고증해서 짧은 이야기들로 엮은 책이다.
정통 역사서라기보다는 오락의 기능과 역사서의 기능을 겸한 책이라 가벼운, 그러나 꼭 가볍지만은 않은 읽을거리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좋을 것 같다. 특히 한반도의 마지막 왕조였던 조선과 이어지는 힘든 역사적 사건들 속에 끼여 그리 잘 알 기회가 없었던 근대조선 사회와 당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인문학에는 영웅과 역적, 천재와 둔재는 있어도 정작 ‘사람’은 없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사람 냄새가 그리웠다.
(중략)
그러나 조금 더 깊이 공부해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누구도 무엇인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지 않았다. 천재 예술가, 위대한 사상가, 영웅적 정치가에게도 사생활이 있었다. 단지 후대의 사가들이 기록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다행이었다.
(pg. 43, ‘에필로그-사람 냄새 나는 인문학을 그리며’에서)
당시의 엽기적인 살인 사건들에 대해 읽으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이 그리 많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살인마교 백백교 사건’을 읽으면서는 얼마 전 한 시사 프로에서 보도되었던 한 사이비 종교가 생각났다. 백 년의 시간, 수많은 경제적 기술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무지하고 절박한 사람들을 미혹시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사이코패드의 모습이 어쩜 그리도 똑같은 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외에도 3.1운동 33인 민족 운동가 중 하나였던 박희도 교장의 여 제자와 얽힌 추문은 혀를 차게 했고, 조선 최후의 황후였던 순정효황후(순종의 비)의 처가를 포함한 ‘조선 귀족’-일제에 의해서 내려진 작위로 만들어진-들의 모습에는 치가 떨렸다.
친일파의 후손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친일파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광복을 맞았을 것으로 믿고 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친일파의 재산은 대부분 일제 때 탕진되었다. 조상이 이미 탕진해 버린 땅을 국가가 되돌려 줄 이유가 없음은 법적으로 따져도 두말할 필요가 없다. 특별법을 제정하기 이전에 과연 친일파에게 남은 재산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다.
(pg. 249, ‘이인용 남작 집안 부부 싸움’에서)
이화여전 교수이자 당대 조선 최고의 테너로 추앙 받았던 안기영 교수-이화여대 교가를 작곡한 분, 여 제자와 바람나서 처자를 버림-나 여성운동가로 이름 높았던 박인덕 여사의 이야기는 한 인간이 공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세웠다 해서 사생활까지 뛰어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결국 엄청난 기술적 발전을 통해 물질적으로는 풍요해졌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물질적, 육체적 탐욕이라는 사실이 바뀌지 않는 이상 그 사는 모습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근대 조선의 사회와 21세기의 한국 얼마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조금이라도 달라지긴 한 걸까.
나의 관심을 끈 한 구절이 있었다.
삼승학교에서 박인덕과 절친하게 지내던 단짝 친구가 윤심덕과 김일엽이었다. 공교롭게도 이후 세 여인 모두 남자 때문에 비극적 삶을 살아야 했다. ‘사의 찬미’를 부른 가수 윤심덕은 극작가 김우진과 관부 연락선 위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했고, 소설가 김일엽은 네 차례나 결혼에 실패한 뒤, 수덕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pg. 302)
오백 년을 이어온 조선의 전통적 사고와 체계가 깨어지고 새로운 의식과 제도들이 싹트던 시절, 유교 조선을 깨고 처음 등장한 신여성의 대표 주자였던 이 세 명의 여성들의 삶이 참 극적이면서 비극적이다. 이들은 진정한 시대의 선각자들이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여성에게 주어진 삶을 깨고 새로운 이상을 향해 자신의 생과 목숨을 불살랐던. 이들의 삶을 조금 더 알고 싶어진다.
2013년 4월 17일에 종이책으로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