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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김탁환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탁월한 스토리텔링의 힘에 감탄하곤 한다. 이번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서아 가비>는 근대 조선 고종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청나라 연행길에 수행 역관으로 따라갔던 아버지가 천자의 하사품을 훔쳐 날아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자 그녀는 도망 길에 오른다. 죄인의 가족으로 시골 관청의 노비가 되는 것을 피해 험한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
천하를 덮는 조롱이 등장한다고 해도 나는 그 조롱 너머로 날갯짓하리라. (pg. 23)
열아홉 살의 최월향은 따냐가 되어 압록강을 건넌다. 따냐는 칭 할아범이라는 미술품 위조범과 동업을 하고, 러시아에서는 저문 사기단의 일원이 되어 어리숙한 유럽 귀족들에게 러시아의 광대한 숲을 팔아치우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같은 조선인 사기꾼 이반을 만나 연인이 된다. 둘은 러시아를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에게 접근해서 도움을 주고 함께 조선으로 돌아간다. 조선에서 이반은 김종식이란 이름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피해 있는 고종의 역관으로 일을 하고 따냐, 최월향은 고종에게 노서아 가비 (러시아 커피)를 타서 바치는 바리스타가 된다.
매일 새벽, 나는 한 남자를 위해 내가 만드는 한 잔의 커피 오직 이것으로부터만 자극 받는다. 이 검은 액체가 전하의 혀끝에 닿는 순간을 상상하며 내 모든 감각을 깨우고 또 깨웠다. 사랑보다도 더 짙은…… 어떤 ‘지극함’을 배우고 익히는 나날이었다. (pg. 130-131)
따냐는 우연히 이반이 그녀의 부친에게 누명을 씌우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란 증거들을 찾게 된다. 그녀와 이반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그 와중에 고종의 환궁이 결정된다.
환궁 후 친러 세력에 대한 숙청을 예감한 이반은 마지막 큰 사기 한 판을 준비하고, 따냐는 그녀대로 마지막 한 수를 계획한다.
한 굽이를 지나면 또 다른 굽이가 오고, 그 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기다린다. 단숨에 돌파할 생각은 버려라. 삶도 사랑도 사기 치는 짓까지도 언제나 첩첩하다. (pg. 120-121)
이반은 나를 흔든 첫 남자였다. 러시아를 질주하는 갈범 무리의 보스 이반에게 어떤 여자가 끌리지 않을 수 있으리. 그러나 나는 남자의 사랑에 백이면 백 전부를 거는 여자가 아니다. 백 중 아흔아홉까지 마음을 준다 해도, 내게는 항상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최악을 대비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비관주의자다. (pg. 188)
경쾌하게까지 느껴지는 대담함으로 세상을 누비고 다니는 사기꾼 따냐의 쿨(?)한 이야기 위로 시종일관 노서아 가비의 짙은 향기가 배어 있는 것 같다. 간결한 문체와 담담한 서술, 하지만 긴장감 있게 꽉 짜인 이야기가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게다가 남성 작가가 쓴 여자주인공의 일인칭 서술이란 점도 흥미롭다.
“습관이 중요합니다. 저는 무조건 아침에 이야기를 만듭니다. 아침에 글을 안 쓰면 종일 우울하고 불안합니다. 일종의 결벽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는 머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손입니다. 발자크처럼 손으로 쉴 새 없이 집필하든 것, 과잉으로 소설 세계에 빠지는 것만이 뛰어난 소설가가 되는 길입니다.”
평생 74권의 소설을 썼다는 발자크를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로 꼽는 저자 김탁환은 그 성실과 노력만큼 최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의 최신작 <뱅크>가 무척 기대된다.
2013년 5월 2일에 종이책으로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