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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20주년 기념판 양장본)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24년 10월
평점 :
헬렌 한프는 뉴욕 출신의 작가이자 극작가로, 당대에는 성공을 이루지 못한 “실패한 작가”로 여겨졌습니다. 글에 대한 열정은 깊었으나 희곡을 무대에 올리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헌책에 대한 깊은 사랑과 희귀한 서적에 대한 집념이 그녀를 런던의 헌책방인 '마크스 & Co.'와 연결시키며 편지를 통해 우정을 나누게 됩니다. "채링크로스 84번지"는 헬렌의 이런 서신이 모여 출판된 책으로, 후에 드라마와 영화, 연극으로도 각색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책을 깊이 이해하는데 있어서 20세기 중반 런던과 뉴욕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생각하며 읽으면 좋습니다. 당시 영국은 전쟁 후 배급제가 이어지던 시기로서, 헬렌이 보낸 식료품 선물이 런던의 서점 직원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책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대와 달리 이 시대의 책이란 독자들 사이에서 귀한 소장품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헬렌이 런던의 헌책방에 의지하게 만든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채링크로스 84번지"는 헬렌 한프와 영국 런던의 헌책방 직원들이 1949년부터 20년에 걸쳐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엮은 작품입니다. 전후 영국의 물자가 부족했던 시기에, 헬렌은 고서에 대한 특별한 열정으로 마크스 서점에 책을 주문하면서 서점 직원들과 서서히 친분을 쌓아갑니다. 오랜 서신 교환으로부터 형성된 이 우정은 마침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중한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 당시 편지는 오늘날의 문자나 이메일과는 달리 세심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는 시간이 필요한 수단이었기에, 헬렌과 프랭크의 편지 교류는 단순한 책 주문을 넘어 따뜻한 인간애가 깃든 특별한 소통의 방식이 되었습니다.
작가는 책과 편지를 통해 문화와 거리, 언어를 초월한 인간애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헌책방과 고객으로 시작한 관계가 진정한 우정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특히 디지털로 쉽게 소통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 잃어버린 낭만과 인간적 유대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헬렌의 서신은 그녀가 외롭고 힘든 상황에서도 문학과 인간 관계에 대한 애정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편지로 오가는 이야기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가득하며, 헬렌과 프랭크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지만 오랜 대화와 선물로 진심을 나누게 됩니다. 책을 통해 만난 두 사람의 우정은 비록 서로의 나라와 문화를 뛰어넘은 관계였지만, 결국 자신들의 일상을 나누고 아낌없는 애정을 전하며 진정한 유대감을 쌓아갑니다.
📌"가엾은 프랭크, 제가 그분을 너무 못살게 굴죠. 늘 뭔가 트집을 잡아 가지고 호통을 쳐대니 말이에요. 그저 재미로 조금 놀리는 것뿐이에요."
헬렌의 유머와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구절로, 프랭크와의 관계가 단순한 거래 이상의 우정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헬렌이 프랭크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감정을 드러내며, 책과의 인연이 얼마나 깊은지 느끼게 합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도 없고요."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를 잘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각자의 삶이 서로에게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한 문장씩 천천히 적어나가며 서로를 알아가고, 기나긴 기다림 끝에 답장을 받아볼 수 있었던 그 시대의 우정은, 오히려 우리의 일상에 잃어버린 정겨움과 낭만을 상기시킵니다. 책을 읽으며, ‘말이 아닌 글로 소통하는 힘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로를 알기 위해, 진심을 나누기 위해 글로 대화를 이어간 그들에게서, 시간과 거리의 제약을 넘어 서로에게 다가서는 대화의 깊이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헬렌의 책에 대한 열정입니다. 헬렌은 책의 판본과 번역 상태를 세세하게 따지며, 오직 원하는 책을 찾기 위해 바다 건너 런던의 헌책방에 고집스레 주문을 합니다. "새책에는 낭만이 없다"는 그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헌책을 통해 이전 소유자가 남긴 메모와 흔적에서 삶의 온기를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 전해집니다. 이처럼 헬렌이 책을 통해 느끼는 기쁨은 프랭크와 서점 사람들에게도 전해져, 서로를 향한 따뜻한 선물로 이어지며 소설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헬렌과 프랭크가 나눈 편지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겪는 사소한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서로에게 깊은 위로가 되어줍니다. 특히 헬렌이 적은 마지막 편지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큰 감동을 줍니다. “혹시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라는 문장은 채링크로스 84번지와 마크스 서점을 향한 헬렌의 애정이 묻어나는, 진한 아쉬움의 표현입니다.
"채링크로스 84번지"는 특히 편지나 손글씨의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추천드리고 책입니다. 편지를 통해 타인에게 다가가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과정은 아날로그적 따뜻함을 물씬 느끼게 합니다. 서점 주인과 한 작가가 책을 통해 서로의 삶에 스며드는 이야기는,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계와 소통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또한 이 책은 헌책의 매력과 고서적이 가지는 특별함을 잘 설명하고 있어, 책 애호가들에게도 즐거운 독서 경험이 될 것입니다. 헬렌이 영국의 헌책방으로 책을 주문한 이유처럼, 한 권의 책을 공유함으로써 느끼는 동지애와 호기심은 우리가 책을 통해 얼마나 더 넓은 세계와 만나고 공감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헬렌의 편지로부터 전해지는 진솔한 감정은 책이 단순한 소유물이 아닌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매개체임을 보여주며, 마크스 서점과 헬렌 사이의 따뜻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우정과 사랑이 담긴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독자들의 서가에서 빛나는 고전으로 남아 있으며, 헬렌 한프와 마크스 서점의 이야기는 편지를 통한 소통의 매력을 잃어가고 있는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큰 의미와 감동을 전달해 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원작으로 한 영화 <채링크로스 84번지 (84 Charing Cross Road, 1987)> 도 같이 추천합니다. 이 영화는 원작의 서신 교환을 그대로 옮긴 감동적인 작품으로, 책이 전달하는 문학적 감성과 인간적 유대를 따뜻하게 그려냈습니다. 앤 밴크로프트와 앤서니 홉킨스가 주연을 맡아 헬렌 한프와 프랭크 도엘의 섬세한 관계를 훌륭하게 연기해 냈습니다.
▶책은 헬렌과 프랭크가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독자에게 문학과 인생의 깊이를 전달합니다. 이를 통해 문학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두 사람을 가까이 이끌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 영화는 편지 속 이야기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두 인물이 실제로 마주하지 않아도 교감이 얼마나 깊고 따뜻했는지를 화면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책은 1949년부터 1969년까지 편지 속에 담긴 인물들의 감정과 시대 상황을 글로 전달하지만, 영화는 20세기 중반 영국과 뉴욕의 풍경, 당시의 복고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해 줍니다. 책에서 느꼈던 시대적 감성을 영화의 시각적 표현을 통해 한층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책은 헬렌과 프랭크의 글을 통해 서로의 성격과 감정 변화를 보여줍니다. 특히 헬렌의 유머와 프랭크의 차분한 성격이 대비되면서도 서로 보완되는 관계가 돋보입니다. 영화를 통해 배우들의 표정과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지는 감정을 보다 명확하게 느낄 수 있어 원작에서 다소 모호할 수 있는 감정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책은 편지로 표현된 헬렌과 프랭크의 내면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하고, 영화는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를 통해 두 사람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두 가지 매체를 비교하면서 같은 이야기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는지 체험할 수 있으며, 감동을 배가시킬 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상상하던 채링크로스의 헌책방 풍경, 헬렌의 아늑한 작업 공간 등이 영화에서는 실제로 구현되어, 독자의 상상과 영화의 재현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영화 속 책방의 따뜻한 분위기와 뉴욕의 소박한 일상이 눈앞에 펼쳐지며, 헬렌과 프랭크가 사랑한 책과 문학의 낭만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거나, 영화를 감상한 후 책을 읽으면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마음속에 더 깊이 남을 것입니다. 영화와 책의 차이점을 느끼고, 휴일에 각 매체가 주는 고유의 감동을 즐겨보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