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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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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교 2013>이라는 드라마가 세간의 화제였다. 오늘날의 학교를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한 학급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구성원이 서로 다른 문제를 안고 있어 학교라는 시스템에 대해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크게 의미를 부여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중에서 나는 주인공이 맡은 반장의 역할에 대해 잠깐 생각해본 적이 있다. 고남순에게 부여된 회장이라는 직책은 그가 원한 것도 아니고 다른 이가 지지한 것도 아니다. 그는 어쩌다 대표가 된 것이다. 대표로서의 능력 같은 건 없어도 그만이다. 이 드라마에서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는데 정작 힘을 합쳐 저항할 마음은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감정을 표출할 뿐이다. 그러니 대표라고 해서 별다른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대표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각각의 문제는 그저 개인의 문제에 머문다. 이것이 학교의 현실이다. 학교뿐 아니라 학생들조차 학급을 대표하는 이에게 약간의 임무만 기대할 따름이다. 더 이상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없다. 학교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엄마가 쪼르르 달려오는 풍경은 이제 자연스럽다. 학교에서 학생이 고객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학교가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비단 학교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왜 대표를 선출하고 대표를 이용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매튜 A. 크렌슨과 벤저민 긴스버그는 정치가 시민을 동원하지 않는 현상에 주목했다. 평범한 시민들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동원해야만 정부를 운영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 미국의 민주주의가 이른바 ‘다운사이징’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집단적 정치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정책 목표는 달성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뿐더러 사회 전체에 상당한 피로감을 동반한다. 그래서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이 자의 반 타의 반 등장했다. 특별한 정치적 지위에 있는 미국인들은 유권자의 정치적 지지를 조직하지 않고도 시장, 법원, 행정절차 및 그 밖의 여러 채널을 활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정치 동원이 없으면 정치 참여가 불가능했던 시민들은 점차 사라졌고, 그 대신 소송과 로비 등의 개인적인 접근이 늘어났다. 이는 시민권의 본질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엘리트들은 비엘리트들은 동원할 유인이 사라졌고, 비엘리트들은 서로 함께할 유인이 사라졌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점점 유권자 확대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대중의 정치 참여를 주변화했다. 집단 이익의 표출이 아니라 개인 선택을 장려하는 정책 집행 장치들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정부와 정치에서 각자 그와 관련한 제도적 영토를 구축했는데, 이는 한국의 상황과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민주당은 정부 사회 서비스 기관과 규제 기관, 소위 지원금 경제로 서로 엮인 비영리단체, 공공 기관 및 유사 공공 기관, 일군의 공익단체와 뉴스 매체의 주요 부문에 진지를 마련했다. 한편 공화당은 군사 및 국가 안보 기관, 이와 관련된 민간 기업과 민간 부문 이익집단, 종교단체, 그리고 보수 성향의 신문, 잡지, 싱크 탱크 및 라디오 방송국을 포괄하는 대중매체 부문에 기반을 건설했다. 이로써 2000년대 이후로는 정당 간의 치열한 갈등과 유권자의 낮은 참여가 정치계의 큰 특징으로 대두됐다. 게다가 대중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공공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으로서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했다. 민영화와 탈집중화를 바탕으로 공공 정책을 구성하면서 대중을 동원할 수 있게 했던 슬로건들을 약화시켰다. 말하자면 우리는 정책의 책임을 어디에 물어야 할지 모르는 곳으로 내몰렸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것은 민주주의의 중심이 입법부에서 사법부로 넘어간 점이다. 이제 시민들은 자신이 속한 환경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사법부를 적극 활용한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사법부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법정의 원칙적 판결에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시민들은 소송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었다. 그로부터 투표권, 소비자와 노동자 보호, 여성과 장애인 인권, 환경문제, 종교적 자유의 보장 등 다방면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소송을 통해서 권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송이라는 이 확실한 무기는 민주정치의 유일한 대체물이 되었고, 시민들이 더 큰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경쟁하기를 꺼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법정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익들만 다뤘다. 시민이 아니라 시민의 대표자가 소송을 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일련의 단체들은 실질적으로 회원을 응집하지도, 그들의 의견을 제대로 듣지도 않으면서 소송의 수혜자가 되었다. 대변자가 정책을 결정하려 할 때 소수를 위한 개인민주주의는 다수를 위한 대중민주주의에 자연스레 우위를 점한다. 과연 민주주의는 점점 작아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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