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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시가 난해하다고 말한다. 얼핏 이해할 수 없는 낱말들이 나열된 것을 보고 추상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시가 난해한 것은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시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는데도 아무런 의미를 끄집어내지 못했다면, 그것이 너무도 구체적이라서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불의의 사고로 자식을 잃고서 슬픈 감정을 유리창에 빗댔다고 하자. 그때 그 감정을 드러내는 유리창은 우리 주변에 널린 사물일지언정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시인에게 유리창은 유리창이 아니다. 이는 누구나 유리창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뜻하기도 한다. 그것이 꼭 유리창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자식을 잃고 유리창을 떠올리는 행위는 일반적이라 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이때 유리창은 특수한 개체가 아니며 고정된 사물이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쩌면 그럴수록, 우리가 유리창을 대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고 섣불리 단정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알고 보면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다. 너와 나는 그렇게 다르다. 시의 가치는 그 다름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시를 추상적이라 여기고 그것을 이유로 자신이 시인이기를 마다하는 자세는 결코 옳지 않다.

 

그렇다면 시의 구체는 시의 핵심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단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시란 모든 것을 포괄하고 정돈하는 '특수성 < 일반성'의 회로를 벗어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단독성 = 보편성'의 회로를 회복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말한다. 좋은 시가 의지의 문제라고 할 때, 구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은 시를 쓰는 기술보다 시를 쓰는 태도와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시()가 곧 시작(詩作)인 것이다. 그로부터 저자는 언어의 숙명과 시인의 소명을 논한다. 고로 시를 사랑하는 철학자 강신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단연 김수영이다. 그가 좋은 시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김수영의 정신을 강조한 데서 익히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아예 그것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람들이 시작보다 시를, 그러니까 과정보다 결과를 보고 시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따른 못마땅한 속내를 드러내면서. 그런 까닭에 그가 다소 거친 어조로 김춘수보다 김수영이 위대하다고 말할 때 눈살을 찌푸린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오해하지는 말지어다. 김수영의 시가 김춘수의 시보다 월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관한 것임을 이 책의 부제가 일찍이 밝히고 있다. 저자는 김수영이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기실 인문학 정신은 시가 아니라 시작에 가깝. 그러므로 저자의 목표를 감안할 때, 그런 비교는 제법 타당하다. 더군다나 이 책은 시평이 아니다. 시를 사랑하는 한 철학자의 순수한 고백이다.

 

저자가 이렇게 시인 김수영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이유가 까? 그것이 한 권의 책으로 설명되어 있는 셈이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사람들이 갈수록 시를 읽지 않는다는 데 주목하고 싶다. 이는 제2의 김수영이 등장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알다시피 오늘날 시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해마다 신춘문예를 통해서 시인은 계속 탄생하고 있고, 달마다 따끈따끈시집이 서점에 새롭게 진열되고 있다. 그러나 시는 널리 읽히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점점 시()에서 시작(詩作)을 떠올리지 못한다. 시는 그저 시를 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전유물이라 여긴다. 이를테면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표현에 감탄하면서도 소설을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 달리 시를 읽고 시를 쓸 생각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 않은가. 시는 단순한 낱말 놀이가 아니거늘 울림이 없는 겉멋에만 현혹되거나 울림을 내면화하지 못하는 꼴이다. 사람들이 시가 담고 있는 것을 자기 삶의 놀이터로 끌어들이지 못하는데, 시는 그런 현실에 아랑곳없이 홀로 비약을 꿈꾼다. 서정주처럼 아름다운 표현을 구사하거나 이상처럼 형식적인 실험을 선보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김수영은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그를 인문학의 자긍심으로 추앙하는 저자의 고백은 많은 이들에게 시의 가치를 일깨우는 일이 될 것이. 그런 의미에서 책의 제목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김수영은 1921년에 태어난 '김수영'인 동시에 시를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김수영'을 가리킨다.

 

 

 


 

 

 

이 책에 언급되는 시들 가운데 두 편의 시에서 나는 특히 김수영의 얼굴을 보았다.

아래의 시를 되뇌면서, 우리 모두 제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자.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이 되자. 눈밭에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거미(1954) -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 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

 

 

 

서시(1957) - 김수영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 왔다

나는 정지의 미(美)에 너무나 등한(等閑)하였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성장(成長)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 온 일

정리(整理)는

전란(戰亂)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 놓은 일

그래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영혼은

그리고 교훈(敎訓)은 명령(命令)은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

 

지지한 노래를

더러운 노래를 생기 없는 노래를

아아 하나의 명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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