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디스크] 신화 8집 - State Of The Art : Digital Disc - Digital Disc
신화 노래 /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Stone Music Ent.)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이동중에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른바 워크맨이 대표적인 시절이 있었고, 그 후론 CD, 이제는 mp3가 대중화된 시대가 되었다. 최근의 mp3같은 경우에는 다양한 곡을 방대하게 담을 수 있고 사이즈도 초미니로 나오는 경향이라서 그만큼 휴대하기도 편하다는 점이 매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CD에는 여전히 그 매체만의 매력이 있는 법이다. 디지털 디스크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선 또 다른 매체라고도 할 수 있겠고, CD의 매력을 기본으로 휴대성과 편리함을 더한 매체라는 생각도 든다. mp3만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CD의 매력을 고스란히 느끼는 사람들에게 플레이어 없이도 편하게 재생되는 디지털 디스크(DD)는 무척 매력적인 존재일 것이다. CDP를 들고 다니자니 부피가 부담되고, mp3플레이어를 구입하자니 또 마땅치않은 경험을 한 분들도 있을테니까. 그것도 단순히 재생, 되감기, 빨리감기만 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다양한 기능까지 담고 있어 아주 금상첨화다.

직접 받아보기 전에 화면으로 볼 때는 CD케이스 같은 것에 바로 이어폰을 꽂아서 듣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막상 케이스를 받아보니, 그 안에 가로 6, 세로 4정도의 정말 컴팩트한 사이즈의 DD가 들어있어 깜짝 놀랐다. 이런 조그만 매체에서 자체 음악 재생이 가능하다니! 이런 기술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어메이징~ AAA사이즈 건전지 무게를 빼면 무게감이 거의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가볍고, 전곡반복, 일반재생, 한곡반복, 랜덤듣기, 구간반복기능까지 가능하다. 곡이 몇분중 몇분쯤 재생되는지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재생 파일의 길이를 100구간으로 나누어 구간재생이 가능한 것도 참 매력적인 기능인 것 같다. 조작법도 의외로 간단하고, 뒷면 디스플레이창에 상태가 표시되는 것도 편리하다.

기본적으로 풍부한 음감에 5가지 종류의 이퀄라이저 모드도 가능한데, 이퀄라이저모드 마다 각각 많은 차이가 느껴진다. 예를 들어 ‘Once in a life time’의 경우 다른 모드보다 클래식 모드가 더 풍성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기능 중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선택한 곡들만 반복재생 시킬 수 있는 모드가 없다는 것, 건전지 잔량이 표시되지 않는 것도 좀 아쉽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것은 ‘음반’에 가까운 것이니까, 너무 과도한 기능을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재생기기에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모르겠지만, 일상적인 수준을 추구하는 경우에는 이정도면 기능상으로도 만족할만한 수준이 아닐까싶다.

노래는 잔잔한 곡 빠른 곡, 비트있는 곡들이 고루 잘 섞여있고, 멤버들의 목소리 하나하나를 잘 느낄 수 있는 곡들이라 더 좋다는 느낌이다. CD의 경우 편리함도 있지만 소장욕이라는 것을 충족하는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DD에도 mp3를 다운받았을 때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가사집과 화보수준의 영상집들도 고스란히 들어있어, 단지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한 가수의 음반과 그와 부수적인 것들까지 소장하는 의미를 아는 분들에겐 더없이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44페이지의 영상집, 여기에 적힌 멤버들의 땡스투며 멋진 화보들도 참 만족스럽다. 현란한 주황색이라 살짝 부담도 되지만, 목에 걸수 있는 목걸이까지 함께 주는 센스!!

솔직히 시디 두 장 정도의 가격이니만큼 가격적으로 부담은 되지만, 케이스부터 여러모로 값어치있는 패키지인 것 같다. 거기다 컴팩트한 디자인으로 CD보다 휴대가 용이해서 가질 수 있는 장점들도 많다. 따로 충전할 수 없고 건전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번거롭지만, 사이즈가 작아서 건전지가 심하게 닳지도 않을 것 같다. 특히나 불법복제방지에 기여할 수 있는 매체라고 하니, 그런 면에서도 음반계와 구매자들 모두 Win-Win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닐까 싶다. 최소한 하나정도라도 DD라는 매체를 소장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앞으로 DD가 더 많이 발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겉으로 보여지는 이미지에만 휘둘리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쓰레기 처리장에 살고 있는 데쓰조는 파리를 기른다. 남들은 세균이 득시글대는 더러운 것을 기른다며 인상을 찌푸리지만, 막상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쓰레기통 같은 환경 속에서 파리를 기를 수밖에 없던 데쓰조의 현실이 가슴아프다. 데쓰조 뿐만 아니라 쓰레기처리장 근처에 사는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넝마주이라는 놀림을 받기 일쑤고, 선생님들에게도 무시당하고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 그러나 고다니가 데쓰조를 좋아해주니까 자신들도 고다니가 좋다고 말하고, 말주변도 없는 데쓰조를 위해 자꾸만 말을 걸어주고, 데쓰조를 어떤 편견도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맘속으로 아껴주는 것은 모두들 더럽고 위험하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처리장 아이들이다.

데쓰조의 담임이 된 고다니는 처음엔 지저분하고 거칠기만 한 데쓰조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고다니가 더러운 데쓰조를 탓하기만 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깨끗하게 씻겨준 후 데쓰조는 고다니의 흉내를 내서 자신의 개 기치를 열심히 씻어준다. 결국은 사람의 손길이 그리운 사람의 자식 데쓰조. 누군가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신도 사랑을 주고 싶은 아이. 말도 하지 않고 글씨도 쓸 줄 모르던 학교에서의 데쓰조는 고다니의 말 그대로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었지만, 드디어 그 데쓰조가 깨어났다. 고다니와 함께 파리이름이 적힌 카드로 글씨를 연습하고, 파리 실험도 같이 한다. 여전히 말수는 적지만, 데쓰조가 2학기 글짓기 시간에 쓴 ‘고다니 선생님 조아’라는 글을 봤을 땐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이 시큰해졌다. 데쓰조가 쓴 그 말엔 어떤 미사여구도 없기에 그만큼 솔직하고 의미있게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초짜선생 고다니는 아직 완벽하게 준비된 선생님은 아니지만, 처음의 편견을 버리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동안 데쓰조와 처리장 아이들을 비롯한 아이들 각자가 지닌 사랑스러움이나 그안에 품고 있는 보석같은 재능들도 발견해내게 된다. 까마귀가 모아놓은 쓸모없는 물건들을 가리키는 말인 까마귀 저금. 그 까마귀 저금같은 물건으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고, 구김살 없는 마음을 크게 키워나가고 있는 아이들. 마치 똥을 거름으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듯 척박한 환경을 배경으로도 아이들은 생명력과 재능을 꽃피운다. 편견에 눈이 멀어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뿐이지, 아이들은 이미 그 안에 저마다의 보물창고를 그득그득 품고 있을게다. 함께 부대끼고 진실되게 다가서려는 과정 속에서 고다니선생은 선생님이란 역할에 대해서는 물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새롭게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데쓰조를 비롯한 아이들의 성장기면서 바로 선생님인 고다니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처리장 사람들과 아이들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사건들에 관심을 기울이다보면 어느덧 억지로 등을 떼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변화해 가는 아이들과 주위 사람들의 모습에 마음이 뜨끈해진다. 마냥 아름답게만 포장하여 동화 속 같은 해맑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아닌데도, 힘든 과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순수하고 따뜻한 기운이 흠뻑 느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이 결정나고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출발하는, 이것이 시작이라는 느낌의 마무리가 무척이나 맘에 든다. 그들의 활기찬 발걸음에서 희망이 느껴지고, 앞으로 펼쳐질 더 무한한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어 한편으론 벅차면서 또한 설레기까지 한다.

이 작품의 원제는 ‘토끼의 눈’이다. 고다니가 좋아하는 절인 사이다이 절의 선재동자 조각상의 눈이 그윽하고 다정한 눈빛을 지닌 토끼를 닮은 눈동자다. 결국 처리장의 아이들도, 처리장의 사람들도, 그들을 걱정하는 선생님과 주위사람들도, 모두들 토끼의 눈을 가진 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쩐지 하이타니 겐지로야말로 진정 토끼의 눈을 가진 사람일 것 같다.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풀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도, 충분히 공감갈만한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풀어가는 하이타니 겐지로의 솜씨가 놀랍다. 그리고 이론만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진실을 담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해준 그에게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걸음마를 하기 전부터 나무를 가까이 했던 가브리엘라(가비)는 열 살이 되었을 땐 어떤 나무꼭대기라도 올라갈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나무소녀, 마야족의 언어로 ‘라 알리 레 하웁’이라고 불리는 가비와 하늘과 대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아온 마야족들. 가비의 15살 생일을 축하하는 킨세아녜라 의식이 끝나고 모두 춤과 술을 즐기며 유쾌하게 하루를 마무리해가던 때, 소총을 겨눈 군인들이 나타나 호르헤 오빠가 끌려가고 축복이 가득했던 생일은 비극의 시작이 된다. 그 후 대대로 토박이처럼 땅을 일구고 살아온 그들에게 권리증을 제시하라며 들이닥친 군인들. 떠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군인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 돌아온 것은 힘과 무력으로 굴복시키려는 이들의 처절한 응징뿐이다. 젊은 남자들이나 에스파냐어를 하는 사람들은 강제로 끌려가서 군인이 되거나 죽는다. 농사용 칼마저 압수당하고 금지당해 옥수수마저 직접 손으로 꺾어서 베어야하는 사람들에겐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최소한의 권리조차도 주어지지 않는다.

스페인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마야문명을 멸망시켰다. 백인들이 건너오기 전부터 자신들의 것이었던 땅을 내어주고 학대당하며 점점 척박한 곳으로 밀려난 후에도 자신들의 언어와 전통을 지켜가는 것조차 포기해야했던 마야족들. 종교, 관습, 이름까지 바꾸게 하며 인디오들을 자신들의 틀에 맞추려고 했던 라티노(에스파냐계 백인)들은 남은 종족들마저 최후의 순간까지 몰아붙인다. 명분이야 어쨌건 자신들의 이익이 되는 쪽에 서지 않으면 제거한다. 직접적인 관련도 없건만 전쟁에 휘말려 피해를 입어야하는 사람들, 이념과 신념의 대립으로 인한 총포 속에 쓰러져가는 것은 결국 애꿎은 민간인들이다.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운다는 내전의 명분은 과연 이들에게 어울릴 것인가. 정치권력을 다투는 정부와 반군들 사이에서 엉뚱하게 휘말리게 되는 사람들에겐 그저 농사나 조용히 짓고 살고 싶다는 소박함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종교적인 목적과 달리 약탈전으로 전락해 버렸던 십자군 전쟁이 떠오르게 하는 내전과 신대륙의 수많은 인디오들이 몇 세기동안 겪었을 설움은 어쩐지 우리의 슬픈 역사와도 겹쳐지는 것 같다.  

군인에게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는 오빠,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엄마. 딸과 아들을 차별하지 않고 혈통과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과거의 인습에 매이지 않던 아버지는 총에 맞아 차디차게 쓰러지고, 가비는 점점 세상에 홀로 남겨져 간다. 유대인 학살이나 난징 대학살을 떠올리게 할만큼 끔찍한 인디오 학살. 마을을 불사르고, 어린애들마저도 가차없이 학대하고 죽인다. 왜,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죄없는 이들을 몰아세워야하는 걸까. 공포스럽고 절망스러운 상황과 너무도 지독한 비극에 마음이 뻐근해진다. 광기어린 잔혹함과 점점 도를 더해가는 가혹행위들에는 눈을 돌려 외면하고 싶어질 정도다. 인간성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은 어디서 찾아야하는 것일까. 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 것일까. 희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제발, 더 이상의 비극은 없도록, 제발 여기서 그만둬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모든 것이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지만 깨어날 수 없는 지독한 악몽. 절망의 끝까지 향해가는 상황에 어떻게 당당히 운명과 맞설 수 있을 것인가.

토악질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끔찍한 학살을 어린나이에 두 눈으로 목격해야만 했던 가비가 사람들을 구하지 못해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끼며 눈물 흘리는 모습이나, 나무위에 숨어 혼자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다시는 나무에 오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슬픈 맹세에는 마음이 아프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억은 이미 아득하게 흩어져간다. 죽은 자들의 몫까지 짊어져야하는 삶의 무게감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과 고독. 몰살당한 마을과 사람들을 뒤로하고 북쪽 멕시코로 향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슬프고 가슴 아프다. 피난길속에 죽어가는 어떤 아줌마를 도와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돕지만, 생명의 탄생에 축복할 새도 없이 닥쳐오는 생명의 위기에 아기를 안은 채로 걸음을 재촉해야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추억을 곱씹을 새도 없고, 그저 끔찍한 기억에 지지않기 위해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아야 한다. 어린나이에도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결정들을 해나가야만 하는 가비에게 예전 마누엘 선생님이 해준 말이 많은 도움이 된다.

“가브리엘라,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자체가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란다. 그 결정에 따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걸 옳은 결정으로 만들 수도 있고 그른 결정으로 만들 수도 있어”

전쟁이 끝나고 가족들과 함께 고향에서 살고 싶다는  절박한 희망 하나를 품을 수 없는 상황에서 꿈도 자신도 잃어버린 지친 표정의 피난민들. 식량을 차지하는 것은 누군가의 주린 배를 의미하는 난민수용소 생활속에 누군가 살고 누군가는 죽는다. 그 가운데서 역사의 소용돌이를 몸소 헤쳐나가는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야기가 너무 아프다. 이런 일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주먹을 뒤에서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를 생각하면 훨씬 두렵고 기운이 빠진다. 그러나 생명의 빛을 힘겹게 이어가는 기적같은 모습들에 살아남는 것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아픈 기억속에 웃음마저도 잃어버렸던 아이들은 공놀이나 배움을 통해 마음속의 분노를 서서히 누그러뜨려가고, 다른 이들과 너무 가까워지려하지 않고 자신조차 내동댕이치려고 했던 가비는 더 이상 운명을 피하지 않고 진정한 자신과 마주한다. 점차 아이들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가비와 웃음과 목소리를 찾아가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 조금씩 마음이 푸근해진다.

수용소에서 마리오라는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 함께 수용소 내에 학교를 열고 인디오들을 가르치기로 한 가비는 자신의 배움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겠노라는 예전 부모님과의 약속을 실천한다. 그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앞을 향해서 나아가는 나무소녀의 이야기는 커다란 용기와 감동을 전해준다. 힘들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끝끝내 희망은 발견할 수 있다. 가슴 아픈 고통과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기에 인간은 아름답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희망은 힘겨운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더욱 따스하게 느껴진다. 마누엘 선생님이 구타당하고 피를 흘리면서도 생명의 줄을 놓는 그 순간까지도 아이들을 염려하던 모습이나, 가비가 무한한 신뢰를 품고 있는 나무와 숲이 아이들을 살리는 모습에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과 무한한 감동을 품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이상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무에 오르면 하늘에 더 가까이 갈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 다시금 그들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평화로운 삶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박사의 집으로 파출부를 나가기 전 ‘나’가 본 박사의 파출부 소개소 고객카드에는 고객불만으로 파출부가 교체될 때 찍는 스탬프가 이미 9개나 찍혀있었다. 할 일은 박사에게 점심을 차려주고, 청소를 하고, 장을 보고, 저녁을 챙기는 고작 이런 정도의 일일 뿐인데 그간 왜 그리 많은 파출부가 교체된걸까. 박사에겐 특수한 사정이 있었으니, 바로 17년 전 당한 교통사고 때문에 뇌에 장애가 생겨 기억이 딱 80분짜리 테이프 분량만큼밖에 유지되지 않는 것이다. 장을 보러 가서 80분안에 돌아오면 박사는 ‘잘 다녀왔냐’고 하지만, 1분이라도 초과한다면 곧 현관을 들어서는 ‘나’에게 언제나처럼 ‘신발사이즈가 몇이냐’라는 질문을 건넨다.

17년간을 외롭게 숫자와의 교감만 하며 살아온 80분의 기억력을 지닌 박사,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20대 후반의 싱글맘, 어릴 적부터 남에게 그다지 안겨본 기억이 없이 자라온 10살짜리 아들 루트. 언제나 늘 조금쯤은 사람의 정이라는 게 고프고 그리웠던 이들의 어색했던 첫 만남부터, 이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관계로 나아가기까지의 이야기가 수식들과 함께 잔잔하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잊지 않기 위해 중요한 것들을 메모지에 적어 양복에 고정시켜두는 박사. 어느 날 박사의 소맷부리에 어린아이 낙서같은 얼굴 그림과 함께 ‘새 파출부’라고 적힌 메모지가 새로이 붙고, 그 후엔 ‘그의 아들 열 살’, 그 다음엔 그 옆에 루트표시가 차례로 적혀가는 과정에선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박사는 첫 별과 숫자들 사이의 아름다운 규칙을 사랑하고, 어린 루트를 사랑하고, 신이 감추어둔 수학의 비밀을 발견하는 기쁨을 사랑한다. 신발사이즈나 전화번호, 사소하게 보이는 주위의 숫자 속에서 규칙과 의미들을 찾아낼 때 그 아름다움은 박사를 무한한 기쁨 속으로 인도하고, 숫자에 대한 절대 감각을 가지고 그 속의 아름다운 규칙을 발견해내는 박사는 그 아름다움을 루트모자에게도 알려준다. 그리고 박사의 추억과 박사가 사랑하는 수식을 같이 공유하기 위해 박사가 좋아하는 야구선수에 대해 조사하는 루트와 박사가 내준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나’.  숫자들과 서로에 대한 신뢰 속에 함께 하는 동안 그들 사이엔 따뜻한 정이 넘쳐나고, 일 년 남짓이란 기간의 따뜻한 추억은 그들의 평생을 지지해주는 힘이 된다.

그들의 소박한 삶, 소박한 행복과 기쁨은 그 어떤 거창한 사연보다도 은은하면서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누구도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누구도 부럽지 않은 단단한 결속감의 그들. 그들의 행복한 세계에선 서서히 밝아지는 첫 별만큼이나, 밝아오는 여명만큼이나 희망적인 기운이 느껴지고 아름다운 빛이 난다. 과장하는 것도 억지부리는 것도 없이 묵묵히 흘러가는 이야기와 격렬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가는 여운. 담담하고 잔잔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박사의 마음과 ‘나’, 그리고 루트의 마음속에서 하늘을 수놓는 레이스같았던 수식만큼이나 아름답다. 문득 수식들이 아름답게 나비처럼 팔랑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이마고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어쩌면 올리버 색스라는 작가이름보다 영화 <사랑의 기적>의 원작을 쓴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더 친숙할지도 모르겠다.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사랑의 기적>, 살아있기는 하지만 나무토막처럼 감정도 움직임도 없이 그저 ‘존재’하기만 했던 사람들이, 열혈의사 로빈 윌리엄스의 처방으로 웃고, 말하고, 움직이며, 가족들과 부둥켜안는 모습에 감격에 겨워 울고, 그들이 다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 안타까워 울던 기억이 난다. 그 영화의 원작인 ‘소생’이란 작품을 썼던 올리버 색스가 써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우스꽝스러운 제목과는 달리 뇌의 우반구에 손상을 입어 신경장애를 겪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상실, 과잉, 이행, 단순함의 세계라는 4개의 큰 챕터로 나누어진 이 책은, 상상을 초월하는 증세를 겪는 이들을 꼼꼼이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정감어린 시선이 곁들여진 하나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선 겉으로 드러나는 병세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숨겨진 열망과 재능, 정신적 평온함을 찾아주기 위해 애쓰는 작가,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이루어내는 기적처럼 느껴질만큼 삶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이들의 이야기가 마음 따스하게 펼쳐진다. 어느날부터인가 몸이 ‘존재’한다는 현실감을 상실해서 신체부위를 직접 보며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여야 하지만, 애쓰고 또 애써서 삐걱대며 움직일 수 있게 된 크리스티너의 모습이나, 15년간 다른 이들과의 교류없이 갇힌채 살아오는 동안 하루에 20회이상 거듭되는 발작속에서도 그림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던 호세, 그가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해 이전에 그렸던 물고기 옆에 친구 물고기를 그려넣는 모습엔 마음이 찡해진다. 리베커와 마틴은 또 어떤가. 리베커의 지능은 고작 8세수준이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줄 알고 자연스레 시적인 표현들을 떠올릴 줄을 안다. 마틴은 비록 지능은 낮지만 한번 들으면 어떤 음악이고 잊지 않는 비상한 기억력을 자랑하며, 바흐의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 음악에 대한 정열까지 품고 있다. 시나 음악과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그들은 더 이상 저능아도, 결함투성이의 존재도 아닌 어엿한 한사람의 온전한 인간이 된다.

우리는 병명을 알고 그 증세를 알더라도, 병마에 시달리는 인간의 내면은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른바 정신장애라는 것을 앓고 있는 사람을 보거나 그런 이야기를 접하면, 왠지 몸이 움츠러들지는 않는가. 하지만 단 몇 개의 단어만으로 어떤 사람의 병을 설명할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진료카드 한 장으로 그 사람과 그가 겪고 있는 병, 그리고 그 내면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까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물며 그 인간의 깊은 곳에 숨겨진 열망과 재능을 들여다 보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저자가 환자들을 보면서 느낀 감상을 노트에 메모하곤 하는데, 그 구절들이 참 맘에 와닿으면서 가슴아프기도 하지만, 관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더 나은 인간의 삶과 앞으로 나아가야할 바를 모색하는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조금만 이해심을 가진다면 그들의 숨겨진 재능이 꽃피게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저 무의미한 존재가 되버리게 하고 만다. 인간적인 눈길로 이들의 내면까지 관찰하고 이해하며 더 나은 곳을 향해가려는 연구는 그래서 더 가치있다.

이미 쓰여진지는 20여년도 더 지난 책이라, 그 사이에 이 병들의 치료법이 발견되었을런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뇌의 우반구에 관심을 갖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들이 쌓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감안해 볼 때, 이 책이 쓰여진 시점과 지금의 의학적인 수준의 갭이 전혀 동떨어지지는 않을 거 같은 기분이다. 이 소설이 쓰여진 80년대에도 이미 100여년전, 몇십년전에 제기된 이론이나 근거자료들조차 증명의 사례나 기술이 부족할 뿐 이론은 그때부터도 탄탄한 느낌이니. 물론 20년이란 세월 속에 과학기술이나 의학적인 진보, 많은 사례와 연구들이 녹록치않게 쌓였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지만, 과학적인 ‘기술’이 진보할수록 인간에 대한 ‘관심’은 외려 부족해지기 마련이니, 무엇이 얼마나 변했을지는 감히 자신하지 못하겠다.

논문을 다시 옮겨 싣고 한 것이 많아서, 학술적인 분위기도 나고 가끔 어려운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전문적인 용어와 지식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하며 골머리를 썩일거라는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작가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 참으로 편안하고,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인용문이나 그림들도 이해에 도움을 준다. 특히, 작품전체를 아우르는 독특한 삽화들은 산만하게 마구잡이로 그려낸 듯 하지만, 너무나 절묘하게 이야기들을 표현해내는지라 정말 딱이란 느낌이다. 인간미가 흠뻑 묻어나고 훈훈한 온기가 느껴지는 작품, 이 작품이 정말 가슴 따뜻하고 감동적인 것은, 바로 인간적인 접근을 해나가는 연구자와, 자신의 상황을 극복해내려고 애쓰고 또 애쓰는 인간들의 의지와 희망을 느낄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위대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