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소녀 카르페디엠 8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박근 그림 / 양철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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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마를 하기 전부터 나무를 가까이 했던 가브리엘라(가비)는 열 살이 되었을 땐 어떤 나무꼭대기라도 올라갈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나무소녀, 마야족의 언어로 ‘라 알리 레 하웁’이라고 불리는 가비와 하늘과 대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아온 마야족들. 가비의 15살 생일을 축하하는 킨세아녜라 의식이 끝나고 모두 춤과 술을 즐기며 유쾌하게 하루를 마무리해가던 때, 소총을 겨눈 군인들이 나타나 호르헤 오빠가 끌려가고 축복이 가득했던 생일은 비극의 시작이 된다. 그 후 대대로 토박이처럼 땅을 일구고 살아온 그들에게 권리증을 제시하라며 들이닥친 군인들. 떠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군인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 돌아온 것은 힘과 무력으로 굴복시키려는 이들의 처절한 응징뿐이다. 젊은 남자들이나 에스파냐어를 하는 사람들은 강제로 끌려가서 군인이 되거나 죽는다. 농사용 칼마저 압수당하고 금지당해 옥수수마저 직접 손으로 꺾어서 베어야하는 사람들에겐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최소한의 권리조차도 주어지지 않는다.

스페인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마야문명을 멸망시켰다. 백인들이 건너오기 전부터 자신들의 것이었던 땅을 내어주고 학대당하며 점점 척박한 곳으로 밀려난 후에도 자신들의 언어와 전통을 지켜가는 것조차 포기해야했던 마야족들. 종교, 관습, 이름까지 바꾸게 하며 인디오들을 자신들의 틀에 맞추려고 했던 라티노(에스파냐계 백인)들은 남은 종족들마저 최후의 순간까지 몰아붙인다. 명분이야 어쨌건 자신들의 이익이 되는 쪽에 서지 않으면 제거한다. 직접적인 관련도 없건만 전쟁에 휘말려 피해를 입어야하는 사람들, 이념과 신념의 대립으로 인한 총포 속에 쓰러져가는 것은 결국 애꿎은 민간인들이다.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운다는 내전의 명분은 과연 이들에게 어울릴 것인가. 정치권력을 다투는 정부와 반군들 사이에서 엉뚱하게 휘말리게 되는 사람들에겐 그저 농사나 조용히 짓고 살고 싶다는 소박함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종교적인 목적과 달리 약탈전으로 전락해 버렸던 십자군 전쟁이 떠오르게 하는 내전과 신대륙의 수많은 인디오들이 몇 세기동안 겪었을 설움은 어쩐지 우리의 슬픈 역사와도 겹쳐지는 것 같다.  

군인에게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는 오빠,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엄마. 딸과 아들을 차별하지 않고 혈통과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과거의 인습에 매이지 않던 아버지는 총에 맞아 차디차게 쓰러지고, 가비는 점점 세상에 홀로 남겨져 간다. 유대인 학살이나 난징 대학살을 떠올리게 할만큼 끔찍한 인디오 학살. 마을을 불사르고, 어린애들마저도 가차없이 학대하고 죽인다. 왜,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죄없는 이들을 몰아세워야하는 걸까. 공포스럽고 절망스러운 상황과 너무도 지독한 비극에 마음이 뻐근해진다. 광기어린 잔혹함과 점점 도를 더해가는 가혹행위들에는 눈을 돌려 외면하고 싶어질 정도다. 인간성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소중함은 어디서 찾아야하는 것일까. 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 것일까. 희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제발, 더 이상의 비극은 없도록, 제발 여기서 그만둬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모든 것이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지만 깨어날 수 없는 지독한 악몽. 절망의 끝까지 향해가는 상황에 어떻게 당당히 운명과 맞설 수 있을 것인가.

토악질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끔찍한 학살을 어린나이에 두 눈으로 목격해야만 했던 가비가 사람들을 구하지 못해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끼며 눈물 흘리는 모습이나, 나무위에 숨어 혼자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다시는 나무에 오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슬픈 맹세에는 마음이 아프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억은 이미 아득하게 흩어져간다. 죽은 자들의 몫까지 짊어져야하는 삶의 무게감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과 고독. 몰살당한 마을과 사람들을 뒤로하고 북쪽 멕시코로 향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슬프고 가슴 아프다. 피난길속에 죽어가는 어떤 아줌마를 도와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돕지만, 생명의 탄생에 축복할 새도 없이 닥쳐오는 생명의 위기에 아기를 안은 채로 걸음을 재촉해야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추억을 곱씹을 새도 없고, 그저 끔찍한 기억에 지지않기 위해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아야 한다. 어린나이에도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결정들을 해나가야만 하는 가비에게 예전 마누엘 선생님이 해준 말이 많은 도움이 된다.

“가브리엘라,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자체가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란다. 그 결정에 따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걸 옳은 결정으로 만들 수도 있고 그른 결정으로 만들 수도 있어”

전쟁이 끝나고 가족들과 함께 고향에서 살고 싶다는  절박한 희망 하나를 품을 수 없는 상황에서 꿈도 자신도 잃어버린 지친 표정의 피난민들. 식량을 차지하는 것은 누군가의 주린 배를 의미하는 난민수용소 생활속에 누군가 살고 누군가는 죽는다. 그 가운데서 역사의 소용돌이를 몸소 헤쳐나가는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야기가 너무 아프다. 이런 일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주먹을 뒤에서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를 생각하면 훨씬 두렵고 기운이 빠진다. 그러나 생명의 빛을 힘겹게 이어가는 기적같은 모습들에 살아남는 것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아픈 기억속에 웃음마저도 잃어버렸던 아이들은 공놀이나 배움을 통해 마음속의 분노를 서서히 누그러뜨려가고, 다른 이들과 너무 가까워지려하지 않고 자신조차 내동댕이치려고 했던 가비는 더 이상 운명을 피하지 않고 진정한 자신과 마주한다. 점차 아이들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가비와 웃음과 목소리를 찾아가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 조금씩 마음이 푸근해진다.

수용소에서 마리오라는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 함께 수용소 내에 학교를 열고 인디오들을 가르치기로 한 가비는 자신의 배움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겠노라는 예전 부모님과의 약속을 실천한다. 그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앞을 향해서 나아가는 나무소녀의 이야기는 커다란 용기와 감동을 전해준다. 힘들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끝끝내 희망은 발견할 수 있다. 가슴 아픈 고통과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기에 인간은 아름답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희망은 힘겨운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더욱 따스하게 느껴진다. 마누엘 선생님이 구타당하고 피를 흘리면서도 생명의 줄을 놓는 그 순간까지도 아이들을 염려하던 모습이나, 가비가 무한한 신뢰를 품고 있는 나무와 숲이 아이들을 살리는 모습에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과 무한한 감동을 품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이상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무에 오르면 하늘에 더 가까이 갈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 다시금 그들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평화로운 삶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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