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박사의 집으로 파출부를 나가기 전 ‘나’가 본 박사의 파출부 소개소 고객카드에는 고객불만으로 파출부가 교체될 때 찍는 스탬프가 이미 9개나 찍혀있었다. 할 일은 박사에게 점심을 차려주고, 청소를 하고, 장을 보고, 저녁을 챙기는 고작 이런 정도의 일일 뿐인데 그간 왜 그리 많은 파출부가 교체된걸까. 박사에겐 특수한 사정이 있었으니, 바로 17년 전 당한 교통사고 때문에 뇌에 장애가 생겨 기억이 딱 80분짜리 테이프 분량만큼밖에 유지되지 않는 것이다. 장을 보러 가서 80분안에 돌아오면 박사는 ‘잘 다녀왔냐’고 하지만, 1분이라도 초과한다면 곧 현관을 들어서는 ‘나’에게 언제나처럼 ‘신발사이즈가 몇이냐’라는 질문을 건넨다.

17년간을 외롭게 숫자와의 교감만 하며 살아온 80분의 기억력을 지닌 박사,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20대 후반의 싱글맘, 어릴 적부터 남에게 그다지 안겨본 기억이 없이 자라온 10살짜리 아들 루트. 언제나 늘 조금쯤은 사람의 정이라는 게 고프고 그리웠던 이들의 어색했던 첫 만남부터, 이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관계로 나아가기까지의 이야기가 수식들과 함께 잔잔하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잊지 않기 위해 중요한 것들을 메모지에 적어 양복에 고정시켜두는 박사. 어느 날 박사의 소맷부리에 어린아이 낙서같은 얼굴 그림과 함께 ‘새 파출부’라고 적힌 메모지가 새로이 붙고, 그 후엔 ‘그의 아들 열 살’, 그 다음엔 그 옆에 루트표시가 차례로 적혀가는 과정에선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박사는 첫 별과 숫자들 사이의 아름다운 규칙을 사랑하고, 어린 루트를 사랑하고, 신이 감추어둔 수학의 비밀을 발견하는 기쁨을 사랑한다. 신발사이즈나 전화번호, 사소하게 보이는 주위의 숫자 속에서 규칙과 의미들을 찾아낼 때 그 아름다움은 박사를 무한한 기쁨 속으로 인도하고, 숫자에 대한 절대 감각을 가지고 그 속의 아름다운 규칙을 발견해내는 박사는 그 아름다움을 루트모자에게도 알려준다. 그리고 박사의 추억과 박사가 사랑하는 수식을 같이 공유하기 위해 박사가 좋아하는 야구선수에 대해 조사하는 루트와 박사가 내준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나’.  숫자들과 서로에 대한 신뢰 속에 함께 하는 동안 그들 사이엔 따뜻한 정이 넘쳐나고, 일 년 남짓이란 기간의 따뜻한 추억은 그들의 평생을 지지해주는 힘이 된다.

그들의 소박한 삶, 소박한 행복과 기쁨은 그 어떤 거창한 사연보다도 은은하면서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누구도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누구도 부럽지 않은 단단한 결속감의 그들. 그들의 행복한 세계에선 서서히 밝아지는 첫 별만큼이나, 밝아오는 여명만큼이나 희망적인 기운이 느껴지고 아름다운 빛이 난다. 과장하는 것도 억지부리는 것도 없이 묵묵히 흘러가는 이야기와 격렬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가는 여운. 담담하고 잔잔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박사의 마음과 ‘나’, 그리고 루트의 마음속에서 하늘을 수놓는 레이스같았던 수식만큼이나 아름답다. 문득 수식들이 아름답게 나비처럼 팔랑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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