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괴 1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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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이상하게 타는 바람에 책무더기가 산을 이룰 지경인데 <결괴>를 읽고 나서 다음  책을 선뜻 손에 들지 못하고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그만큼 센 작품을 내 놓은 거 맞다. 1천 쪽도 안 되는 주제에-_-; 낭만주의 언저리에만 정통한 줄 알았던 작가가 현재사회를 예리하게 파헤친다. 무기는 날카로운 칼이건만 충격은 망치 같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칼에 베는 순간의 충격이 욱신욱신 쨍- 한 게 망치와 크게 다름은 없을 수도 있겠다. 줄거리와 스포일러 없는 리뷰가 가능할 것인가 과연.


1.


“(…)문제는 단 하나, 살인이 나 자신에게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야. 그게 바로 평화라는 것의 기만적인 정체야! 평화가 평화로 느껴지려면 평화롭지 않은 현실이 불가결하지. 어디에 얼룩을 찍을 것인가? 어디 먼 곳,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에서 살인이 일어난다면 기가 막히게 이상적이지!(…)”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의 핵심을 그대로 읽는 듯한 이 문장은 현대의 범죄자, 사이코패스라는 병명을 가진 ‘환자’가 하는 말이다. <죄와 벌>을 염두에 두고 착상했다는 이 작품 <결괴>는 현대의 죄가 질병이며 그것의 치료는 행복을 위한 것임을 짚고 있다. 그러나 행복이란 것이 상품광고에서나 가능한 허상임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곪은 속을 얼마나 잘 포장하느냐, 자신조차 기만할 정도로 얼마나 더 능숙하게 거짓말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테러범들의 경고 동영상을 연상시키는 스너프 필름 속에서 환자-살인자는 다름 아니라 저 행복에 관해 질문한다. 소위 ‘행복 파시즘’에 대한 도전이자 폭로인 셈인데, 피해자는 목숨을 걸고서도 허상을 지키고 싶어 한다. 


2.


일관적이며 완결적인 하나의 ‘나’를 상정하기란 어렵다. 구체적인 나, 즉 어제/오늘/내일의 나, 너/그/그녀와 있을 때의 나, 거기/저기/여기에 있을 때의 나, ‘대학 친구와 고등학교 친구를 우연히 한꺼번에 마주치면 왠지 좀 어색’한 나, 복수형의 ‘나들’이 히라노가 말하는 ‘분인(分人, dividual)’ 개념이다. 이러한 개인을 밖에서 볼 때 당연히! ‘알 수 없다.’


“인간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 윤곽이 풀린 정보 다발이야. 살아가는 한 내 정보는 계속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여러 장소, 여러 시간에 편재하는 나라는 인간의 정보를 모두 파악하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해! 게다가 입수되는 정보는 항상 우연적이고 단편적이고 이차적이며,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십인십색이지! 그렇게 수집된 정보와 정보원(情報源)인 나 자신은 절대로 완전히 일치할 수 없어!(…)”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해와 왜곡이 더해지기까지 한다.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는 모르는 선정적인 신문, 시체에 꼬이는 파리들 같은 방송, 어떤 경우는 가해자보다 더 심한 상처를 주는 파렴치한 미디어들의 행태 말이다. 파리 떼가 시체를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은 본능이니 이들이 반성하거나 변화하는 것은 진정 돌연변이를 기대하는 수준이 될까. 과도한 정보와 원치 않는 감동들을 조금 덜 느끼고 조금 덜 알 순 없나, 좀 덜.


3.


<장송>에서도 느꼈지만 죽음과 부재의 분위기를 어쩌면 이렇게 잘 표현할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병으로 희미해져 가는 존재의 선, 희박해지는 쇼팽의 호흡에 얼마나 저릿했던가. <결괴>에서는 갑작스런 부재다. 이안 감독의 <색, 계>에서 ‘댕-’하는 시계소리 한 방 같은 그런 부재. 현학적인 다카시(주요인물)의 무수한 문장들이 있지만 가장 허전-한 장면은 요시에(죽은 이의 아내)와 그들의 아이가 나오는 지점이다.


순간 요시에는 하마터면 ‘아빠 오면 혼내주라고 한다!’라고 말할 뻔했다.


저 막막한 놀라움 너무 잘 알겠다. 할머니의 장례식에 가서 다 그대로인 것 같은데, 도대체 뭐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하다가 바보처럼 ‘근데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라고 입을 떼는 대학생(내 얘기다)처럼. 그제야 가슴 가득 할머니의 부재가 스며들던 경험. 있던 사람이 더 이상 없음, 그 생기를 가져간 본인 몸 안의 질병에게서도 변명을 듣고 싶은 심정인데 하물며 타자의 병-살인자에게 희생당한 경우라면 어떻겠는가. 용서라는 크고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용서한다는 건 결국 끝낸다는 것이 아닐까? ……잊을 수 없다면 용서하고 끝내는 수밖에 없어.(…)”


용서가 끝내는 것이라면, 결코 잊지 않고 끝내지 않기 위해서는 용서를 행사할 권리가 있는 사람의 단호한 죽음 밖에 다른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디에서 봤더라, 자살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어느 정도는 세상과 타협한 것이라는 말. 서로 통한다. 용서하고 잊어 세상과 타협할 것인가 결코 잊지 않고 용서하지 않으며 끝내 타협하지 않고 죽을 것인가.


현대사회 3부작의 첫 작품이라는데 벌써 기대 이상을 봐버렸다. 좀 소름 돋지만, 고백할 수밖에 없겠다. 히라노 씨, 팬입니다. <결괴>를 읽은 지금 이 순간의 제가 말입니다.


 

**결괴 (터질 결決, 무너질 괴壞) : 물에 밀려서 터져 무너지게 되다, 둑이나 방죽 따위가 물에 밀려서 터져 무너짐 (다음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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