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포
지그프리트 오버마이어 지음, 강명순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내가 보기에, 그 남자는 신을 닮고 싶어 하네

당신 옆 자리에 바짝 붙어 앉아서

당신의 달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남자 말이네

당신 역시 그 남자에게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네

그걸 본 내 심장이 놀라움으로 얼어붙어버렸네

당신을 힐끗 쳐다만 봐도

혀가 마비된 사람처럼

목소리가 나오질 않네

미열이 나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네

내 눈이 멀고, 내 귀에서는 환청이 들려오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네

내 사지가 떨리면서 마른 풀잎처럼 창백해지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네……


<질투> 또는 <욕망>이라고 흔히 불리는 사포의 시다.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이것이 시에 나오는 여인인 ‘당신’을 사랑하여 질투하는 사포의 마음을 담은 내용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인즉(지그프리트 오버마이어의 소설에 의하면) 사포가 폭 빠져 있던 미론(남자)이 다른 여자(당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자 질투심에 불타 지은 시란다. 내 오해와 편견을 리셋하기 위해 다시 찬찬히 시를 들여다본다. ‘당신을 힐끗 쳐다만 봐도’에서 쳐다보는 이는 사포다. (프랑스어본에서는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혀가 마비되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미열, 부들부들, 환청, 땀, 창백, 죽음은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었던 것. 미론에 대한 사랑이자 당신에 대한 미움의 표현인데, 어쩜 증오와 사랑의 단어들이 이렇게 감쪽같이 분별이 안 가게 쓰일 수가 있단 말인가. 저 단어들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리하여 참으로 강렬하구나, 라고 느꼈던 이유가 거기 있었나 보다.

 

알고 있던 가장 격정적인 시를 내게서 앗아가고 이천 육백 년 전 환상의 삶을 지상으로 확 끌어내린 이 책. 읽고 앎의 대가가

얄궂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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