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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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젠가 오스카 와일드에 빠져 있을 때, 나는 M에게 이 문장이 세상의 진리라고 했다.

‘이 세상의 비극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M의 대답, “참, 너답다.”

지금 생각해보면 와일드의 문장보다 M의 대답이 나를 만들었다.


캘로의 만화 한 컷에 매료된 세스에게 체트가 다름 아닌 저 경지를 보여주길래. 

“그래, 멋지다. 음, 그렇네… 너랑 스타일이 비슷한 데가 있어.”

한참 열정에 들떠 있는 세스에게는 너무 미지근하게 느껴질지언정, 저 반응은 상대를 잘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하고 정 돋는 말임을 이제는 안다. 덤덤하게 대꾸해놓고는 얼마 후 그 희귀한 캘로 만화 한 쪽을 찾아 툭 전해주는 사람.


‘좋아 미칠 것 같은’ 작가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 나는 참 좋아 미치겠는데, 거기에는 늘 어떤 아련함, 쓸쓸하고 허전하게 아름다운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I Wonder’의 카타르시스가 싹 씻어준 아련함에도 불구하고 <서칭 포 슈가맨>도 결국 내가 미쳐서 좋아하는 저 허전한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세스는 진정 그것의 진수. 설경 속의 기차여행, 이상한 이름의 마구간이나 어릴 때 본 만화에 관한 상념들, 그이의 동네를 하염없이 거닐고, 유년 시절을 보낸 집의 벽과 나무를 만져보고, 자신의 기억을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아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영혼, 애니. 여운이 아프고 길게 스며들게 하는 장(章)의 맺음이 정말 멋지다.


세스의 여정은 유난스럽지 않고 궁상맞기도 하며, 소위 큰 사건도 없고 마구 허전하다. “어쨌든 순수한 열망이 없었다면 우연으로 점철된 이 믿기지 않는 길을 따라 캘로의 집까지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열망씩이나 가진 주제에. 이런 우연을 운명이라 해석하곤 하는 거 아니겠나.

세스에게 캘로는 ‘카툰 쪼가리’ 몇 장, 짤막한 몇 가지 증언, 나머지는 모두 빈 공간이다. 주변인들로부터 그 공간을 조금씩 채워보지만 무한대의 우주에 별을 아무리 찾아내어도 공백은 여전할 것. 아마 생전의 캘로 자신도 그 공백은 어찌 할 수 없었으리라. 사실인즉 캘로의 딸도, 친구도, 어머니도 캘로를 온전히 알지 못하며 그들의 공백을 오히려 세스가 채워주기도 한다.

 

“제가 알고 있는 아버지와는 너무 달라요…”

“그 애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어.”


 

 

그저 조용히 가슴이 쿵 하는 아름다움. 갑작스럽지 않게, 자극적이지 않게, 눈이 쌓이듯 그렇게. 아마도 세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저 큰 공백에 상관없이, 세스는 캘로웨이를 ‘아는’ 한 사람이 되어 어떤 만화나 문장이나 장면을 마주쳤을 때 ‘아, 캘로 같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알아간다는 것에 공백은 장애가 되지 않음을, 되레 그 공백이 ‘순수한 열망’의 불꽃을 지키는 산소 같음을 알겠다.

 


M은 나를 좋아했고 나를 잘 알았다. 어디선가 이 만화책을 보게 된다면 틀림없이 ‘아, 이거 누가 좋아하겠는데’ 할 것이다. 좀 약해지면 어때? ‘지금 저지르는 별 볼일 없는 일에 대한 다짐’을 받아주는 체트 같은 친구와, 우연이 운명이 되어 좇고 싶은 작가 한 명 정도 두고 있으면 괜찮은 인생이야. 그래, 저들이 나를 약해지도록 놔두지 않겠지. M, 고마워. 세스도 고마워요.

 

 

 

  가장 멋있는 사람, 체트. (취향임. 인정해주기. M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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