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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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난 적 있다는 말을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만났다기보다 당신이 나를 어렴풋이 봤다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어머니의 옛집 2층 작은 창을 통해서, 약 2초간. 그때 당신이 머물렀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당신은 견디지 못했을 테고 나와 어머니 역시 다른 삶을 살았을 겁니다. 다른 삶, 닿을 수 없는 당신에게 닿으려고 허공에서 홀드를 찾듯 버둥거리는 삶 말입니다. 당신의 고독이란 것을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외면함으로써 얻어오지 않았던가요. 그러니까 우리가 멀리서 잠시 만났던 그 여름날, 어머니는 옳은 선택을 했던 겁니다. Il faut payer. 당신이 당신의 암벽을 가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에는 어머니와 나를 잃는 세계도 있었습니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어머니와 나는 행복했습니다. 당신도 그러했기를 바랍니다.


어떤 원망도 없이, 당신의 산과 고독을 생각해보곤 합니다. 수직에 가까운 수십, 수백 미터 높이 암벽에 매달려 홀드 하나하나마다 죽음을 상기하는 삶이란. 거대한 자연 앞에 한없이 미약한 존재감을 느끼는 순간이란. 생사의 경계를 함께 넘는 동료애나, 손에서 놓치고 만 물병이나, 등반에 장애가 되는 일행을 향한 증오나, 추락사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나, 부상당한 친구의 안타까움이란. 정상을 밟고 무사히 내려왔을 때의 성취감이란. 신체가 느끼는 낱낱의 고통과 집중력과 피로감을 샤워로 씻어내는 청량감이란. 열여덟 시간의 잠이란. 조난자를 구하거나 기록을 갱신하려는 욕망이란. 소문이 전설처럼 전해지는 유명 등반가의 명성이란. 변덕스러운 날씨와 장비를 탓할 수 없는 운이란. 단출한 소지품과 가재도구란. 떠도는 삶이란.


당신의 고독을 자유라 불러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력을 닮은 온갖 무거운 것들, 결혼, 가족, 가정, 정착지를 이루지 않음. ‘대가’를 치른 자유는 가벼웠습니까. 비싼 값으로 맞바꾼 고독은 행복했습니까. 이곳에선 시선을 들면 언제든지 알프스가 눈에 들어옵니다. 당신의 손과 발자국, 땀과 고독을 비밀처럼 간직한 그 ‘신전’(86)을 볼 때 나는 당신을 봅니다. 어머니의 옛집 2층 창을 통해 당신이 나를 보았던 것처럼 아련하게. 배낭 하나에 온 인생을 넣고 책임과도 같은 중력을 거슬러, ‘소설 속의 누군가처럼 사랑을’(210) 하며 오직 두 손 두 발로 암벽을 오르는 ‘이 아름다운 미국인’(193) 아버지.


어머니는 당신이 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세계에서는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저 ‘떠나가다가 마지막으로 한 번 흘끗 뒤를 돌아보는 것’(168)처럼 당신을 생각하는 편이 최선이라고. 다만 잠깐 손들어 인사해 봅니다. 커다란 허공 속, 수직 암벽, 의지할 곳이라곤 작은 홀드 몇 개와 로프일 뿐 나머지는 모두 죽음일 때, 혹시 당신은 한 번이라도, 당신과 같이 ‘옅은 빛깔의 머리털’(242)을 한 작은 존재를 생각했을까요. 무게, 중력, 추락하기에 맞춤한 짐. 그러지 않았기를, 내가 당신을 책임의 땅으로, 구속으로 끌어내리지 않았기를, 않기를 원합니다. 어머니께 전달되지 못한 당신의 편지처럼 이번에는 내가 당신께 닿지 못할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식으로 몇 번 발음해보았다는 내 이름을 서명으로 남깁니다. 당신의 산에 보 픽스(beau fixe)가 가능한 한 자주 함께하길 빌며, 장.


북쪽으로 가는 도중에 마침내 그르노블에서 그녀가 한 말을 알게 되었다. 자꾸만 굴러다니던 퍼즐 조각 하나가 문득 제자리를 찾아 들어간 것처럼 알아차렸다. 그는 그 집의 장식 없는 기다란 벽, 창문, 되는대로 마구 움직이는 아이의 조그만 팔과 더불어 그녀가 간단히 말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었다. ‘안녕’이었다. (24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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