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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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선방했다. ‘사랑-죽음’이라는 진부한 조합 사이에 광기가 들어가니 병적으로 어두워진다. 내용도 그러한가? 글쎄. 사랑이 있고 광기가 있고 죽음이 있기는 하다. 사랑은 싫고 광기는 가끔 무섭고 죽음은 별 감흥이 없다. 이를 어쩌지. 기예르모 델 토로의 극찬을 어째.


광기를 얘기하면 되겠다. 그 전에 잠시, 키로가의 사랑이 싫은 이유는 밝혀야지. 남자주인공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만 있지 그 사랑에 대해 독자가 느낄 수 있는 사랑스러움은 없다. 대상 존재의 심경 묘사나 대사가 거의 부재한다. 주인공의 일방적 사랑은 폭력으로 보일 정도다. 유일하게 자신의 감정을 발화하는(?) 여인이라면 뇌막염 환자가 고작이다. 어떤 상태에서? 착란상태에서. 벡델테스트 통과 기대도 하지 않은 옛날 작가이긴 하나, 이런 사랑 불편해요, 불편해. 또한 사랑 테마는 아니지만, 제정신으로 심경을 드러내는 다른 여인, 마리아가 「엘 솔리타리오」에서 어떻게 되는지 보라.


광기를 얘기하면 되겠다. 그 전에 다시 잠시, 죽음이 별 감흥이 없다고 했다. 독사에 물려 죽고 일사병으로 죽고 꿀 먹고 죽고 가시철조망에 걸려 죽는다. 끝. ‘키로가의 작품에서 죽음은 추상적 혼란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이다.’(띠지) 실제로 벌어지는 죽음, 가차 없는 끝보다 내게는 오히려 (죽음이 없는) 밀림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강에서 나무를 건져 올리는 이들」이나 「멘수들」은 직선이 아니라 원 같아서 아직도, 여전히, 영원히 강에서 나무를 건져 올리고 벌목장과 포사다스를 오갈 것만 같다. ‘죽음’ 자리에 노동이나 밀림을 넣으면…… 이상하겠지. 미안. 이제 좋은 것만 남았다. 광기를 얘기하자. 부록 편에 실린 「광견병에 걸린 개」는 말 그대로, 폭발하는 광기를 보여준다.


올해 3월 20일, 산타페 차코 지방의 어느 마을 사람들은 아내를 엽총으로 쏜 다음, 자기 앞을 지나가던 인부까지 쏴 죽인 미친 남자를 추적하고 있었다. (305쪽, 「광견병에 걸린 개」)


첫머리에 결말을 척 던져둔 다음 10여 일 전 일기부터 날짜순으로 이어진다. 마을에 광견들이 득시글댄다. 전염병처럼 퍼져가는 광견병이다. 페데리코의 허술한 집이 문제다. 집 주위 개들이 어찌나 무서운지, 나에겐 좀비보다 더했다. 초현실적인 크리처가 실재 생물보다 더 무서울 수 없는가 보다. 또한 구성이나 내용이 『나는 전설이다』와 흡사해 놀랐다. (매시슨 선생이 키로가를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랑 테마에서도 보았듯 키로가의 일방적 관점 서술이 일기 형식에 마침맞은 듯도 하다. 군더더기 없이 화자의 병적인 변화를 보여주기에 말이다.


작가 자신이 선집에서 제외한 작품이라던데, 부록 편이 없었다면 나로선 섭섭할 뻔했다. ‘사랑-죽음’이라는 닳고 닳은 조합 사이에 들어선 광기를 위해서라도. 기예르모 델 토로매니아를 위해서라도. 처음 만난 작가, 사랑은 조금 싫고 광기는 가끔 무섭고 노동은 참으로 슬펐던 오라시오 키로가다. ‘1910년 산이그나시오로 이주해, 밀림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단편집 『밀림 이야기』『야만인』 등을 출간했다.’(앞날개) 내가 더 보고 싶은 게 『밀림 이야기』 속에 모여 있을 것 같아 출간 기대하게 된다. ‘신간알리미 신청’ 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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