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하루키와 음악
백영옥 외 지음 / 그책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키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특히 하루키가 좋아하는 음악(재즈, 팝송, 클래식)을 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소설가, 재즈평론가, 라디오 PD, 음악 칼럼니스트인 네 사람이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가 배영옥이 쓴 글은 음악 이야기보다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행할 때는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작가보다는 하루키의 책을 가방에 챙겨넣게 된다는 이야기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는 하루키가 쓴 소설 중 가장 짧은 편에 속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에 하루키 소설의 모든 '원형'이 담겨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읽고 난 후였다.  -30-

 

충분히 공감이 되는 문장이었다. 하루키의 소설들은 비슷한 유형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들고 굳이 장편으로 만들기보다는 단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의 소설들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상실의 시대를 두 번이나 읽었음에도 줄거리가 뭐였지 싶다. 뭔가 분위기만 있는 소설 같은 느낌이랄까. 그의 소설이 음악을 저변에 깔고 있기 때문일까. 음악이란 게 결국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스치듯 흘러가버리는 것이니까. 아련한 여운만 남긴 채.

 

재즈 평론가인 황덕호는 재즈 매니아로서의 하루키의 안목을 높이 평가하는 편인데 하루키를 통해서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재즈아티스트를 새롭게 발견하기도 한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재즈가 뭐냐는 질문을 자신도 종종 받는데 하루키도 그와 같은 질문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루키가 작가가 되기 전 재즈 카페를 운영하고 있을 때 흑인 병사와  일본인 아가씨가 와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틀어 달라고 했다. 그냥 친구 사이로 보이는 그들은 가끔 와서 그렇게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듣고 갔는데 그들은 한동안 카페에 오지 않았다. 그러다 일본인 아가씨 혼자 카페를 찾아왔다. 흑인 병사는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일본인 아가씨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그 카페에 가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들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재즈에 대한 어떤 정의보다도 재즈에 어울리는 정의 같다. 이 책을 읽어고나서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찾아 들어보다가 우연히 올해가 그녀의 탄생 100주년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아무런 의미를 몰라도 첫소절만 들어도 눈물이 핑 도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냥 마음이 공명하는 것 같다.

 

라디오 PD인 정일서는 하루키의 글에서 60년대의 팝과 비틀즈의 노래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하루키의 정서는 늘 60년대 언저리를 향해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책을 읽다 보니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특히 남자인물들은 너무 하루키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의 음악에 대해 쓴 네 작가 중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기도 했지만. 어떤 상황에서 든 음악에 대한 지식이 줄줄 흘러나오니. 하루키가 재즈 카페를 운영할 만큼 음악에 친숙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등장인물마저 그래야 할까. 

 

네 번째 글은 클래식 관련 글이라서 도통 어렵다. 음반 제목부터가. 마지막에는 좀 지친다. 무슨 클래식 음반 제목 읽다가 책이 끝난다.

 

사실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소설에도 작가가 향유했던 여러 문화적 요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런 게 하루키의 영향이 많이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신세대 작가들이 쓴 글을 보면 일본 작가들이 쓰는 경향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고. 아마도 우리나라의 작가들도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서 일상에 천착하는 글들을 쓰는 것으로 바뀌어가다보니 그렇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 종이 위에 유럽을 담다
리모 글.그림 / 재승출판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최근에 유럽 미술관 혹은 유럽 여행과 관련된 책을 읽다보니 유럽에 많이 익숙해진 느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 여행을 참 많이들 가는구나 싶기고 하고 유럽 관련 책들을 참 많이들 내는구나 싶기도 하고. 예전 책들은 뭔가 공부를 하는 듯한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면 이 책은 그냥 작가의 여행에 무임승차한 듯 편안한 마음으로 읽었다. 작가의 손과 눈으로 그려낸 소박하고 아름다운 스케치로 눈요기를 하면서...

 

작가의 여행은 프랑스에서 시작된다. 카메라 대신 드로잉북과 펜을 들고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차분히 관찰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그림처럼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여행지에서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여행지에 관한 많은 지식들을 쏟아내려고도 하지 않고 여행지에서의 힘듦을 과장하지도 않고 일기를 써내려가듯 담담히 하루하루를 스케치해 나간다.

 

사실 작가가 드로잉을 위해 여행하는 곳은 우리에게는 전혀 낯선 곳이 아니다. 최근에 너무 많아진 TV 여행프로그램이나 책들로 인해 이제는 가보지 않았는데도 식상할 지경이다. 파리가 그렇고 스페인의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사그리다 파밀리아, 구엘 공원이 그렇고 로마의 건축물도 마찬가지고. 스케치가 없었다면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만나는 수많은 건축물들과 도시들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리고 길고양이들까지 아주 가깝에 느껴진다. 어딘지 따뜻하고 정감 있다. 아마도 사진이 아닌 그림의 힘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프라하에 관한 내용이 흥미로웠던 것 같다.

 

1938년 3월 15일, 히틀러의 군대가 프라하를 점령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이었던 에밀 하하는 조국의 무력함을 통감하며 체코군에게 더 이상 저항하지 말라는 무기력한 명령을 내렸다. 역사적으로 굴욕적인 순간이었지만 무모한 저항을 피함으로써 프라하의 시가지는 무자비한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404-

 

프라하 하면 자연스럽게 프라하의 봄이 먼저 떠오르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오른다. 그 외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거의 없다. 사진에서 본듯 한 도시 전체의 차분한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고.

 

프라하를 거쳐 이스탄불에서 작가의 스케치 여행은 끝난다. 여행 끝에 작가는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직장을 그만 두고 떠난 여행.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이 끝나면 잠시 비워둔 자리로 돌아가면 되지만 작가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 막연한 불안. 아마도 여행의 끝은 그렇지 않을까. 잠시 비워놓은 곳으로 돌아갈 자리가 있는 사람도 작가처럼 그렇지 못한 사람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카로 가는 길 - 이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적 가르침
무함마드 아사드 지음, 하연희 옮김 / 루비박스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표지가 아름답다. 보고 있으면 알라(신)를 향해 기도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처럼 평온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이슬람은 성전이라는 명목하에 전쟁과 테러를 자행하는 종교로 여겨질 따름이다. 이런 우리의 편견은 서구인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했거나 TV 등 대중매체에서 보도되는 이미지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우리의 편견과는 상관없이 저자가 체험하고 배운 이슬람의 본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는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유대율법을 배우며 자랐고 대학에서는 철학, 예술 등을 공부했지만 그는 어느 곳에서도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베를린에서 기자생활을 하던 중 예루살렘에 있던 외삼촌의 권유로 여행을 하면서 이슬람 사회를 접하게 된다.

 

저자는 오랜 친구이자 안내자이기도 한 자이드와 함께 사막을 여행하던 중 사막에서 길을 잃고 탈수 증세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에 처한 후 돌연 목적지를 바꿔 메카로 향하면서 겪게 되는 일들과 그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슬람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오랜 동반자인 자이브와 함께 낙타를 타고 메카를 향하는 여행은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긴 하지만 아름답다. 인간존재를 돌아보게 하는 심연과도 같은 사막이 있고, 사막처럼 끝없는 별이 있고, 오아시스가 있고, 여행자를 가족처럼 항상 반겨주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 달콤한 대추야자라도 내어주는 유목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메카로의 순례는 이슬람을 받아들인 지 7년이 되는 32살의 그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가슴 설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저자는 독일 일간지의 기자의 신분을 얻어 아라비아의 사막, 이집트, 멀리는 아프카니스탄 등을 여행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슬람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유럽에서의 생활에서 안정을 느낄 수 없었던 그는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옆에서 지켜보며 이슬람에 대해 공부하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이슬람 본연의 모습을 알게 된다.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생활양식이라는 것, 신학 체계라기보다 신에 대한 의식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 사회적 행동 양식이며, 이슬람 어디에도 원죄와 구원에 대한 메시지는 없다는 것 등. 기독교가 현세의 삶보다는 내세를, 육체보다는 영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르게 이슬람은 현세의 삶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며 육체와 영혼이 구분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슬람은 여성에게도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등 여성을 존중하는 종교였고, 지식에 대한 탐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라는 것이다. 지금의 모순된 이슬람은 경전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나쁜 인습으로 인해 변질된 결과라는 것이다.

 

매일 다섯 번 씩 메카를 향해 기도를 드리는 이슬람인의 모습을 보면 어딘지 광신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거나 그들의 삶이 종교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이슬람은 그들에게는 하나의 생활양식(조선시대에 유교가 생활양식이었듯이)이며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엄격한 의식이나 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늘 신이 곁에 있다고 믿는 그들의 마음의 자연스러런 표현인 것이다. 순수한 믿음 그 자체다.

 

저자는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가 된 뒤로 유일신 신앙은 모두 사막에서 생겨났다고 말한다. 이는 순수하고 단조로우며 절대적인 존재에 순응하게 만드는 사막만의 고유한 특징 때문이다. 순수하고 단조로우며 절대적인 사막 앞에서 절대자를 떠올리다는 건 저자의 말처럼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무함마드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임을 자처하지 않았다. 코란에 따르면 신을 향한 자기 항복은 태고부터 이어진 '인간의 본능'이다. 바로 이 점을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예언자들이 전파했던 것이며, 코란은 그 중 가장 늦게 전해진 계시였다. -413-

 

이 책은 종교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저자가 사우디아라비의 사막에서 지냈던 1920년대부터 30년대 초반까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중동의 정세에 대해서도 현장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저자는 기자의 신분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 이븐 사우드가 잃어버렸던 땅을 다시 되찾는 과정에서 영국이 반군에게 무기를 지원하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하고, 이탈리아군과 맞서는 무자헤딘 지도자와 접촉하여 그들을 이집트로 탈출시키는 것을 돕기도 한다.

 

그리고 시오니즘이 한창이던 때 저자는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내기도 했다. 저자는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이 정복자로서 들어와 살기 전부터 그 땅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과 유대인이 떠난 후 2000년 동안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완전히 무시한 채 오로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당시 저자의 이런 생각은 유대사회에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몇 천 년 동안이나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시오니즘은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래로 지금까지 수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책이다.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 혹은 잘못 알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고, 저자가 경험한 많은 일들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곁에 두고 읽는 니체 곁에 두고 읽는 시리즈 1
사이토 다카시 지음, 이정은 옮김 / 홍익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는 편이다. 제목만으로는 이 책이 자기계발서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니체의 사상을 대중들에게 쉽게 풀어쓴 책이 아닐까 짐작했었는데 이건 자기계발서 쪽에 더 가깝다. 그런 점에서 조금 실망하다가 읽다보니 예전에 알았던 단편적인 지식이 떠오르기도 하면서 읽을 만하다. 아, 이런 말도 있었지. 진짜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싶다. 뭔가 의지가 생기는 것도 같고. 왜 일본작가가 이런 책을 썼는지도 알 것 같다. 이제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그렇다고 하지만 도전의식이나 뭔가 큰 꿈을 이루어야겠다는 목표의식 없이 알바 등으로 가볍게 혹은 초연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자극이 될 만한 글을 남기려고 한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책이 많이 읽히고 있는 건지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히 반복되는 삶의 무서움을 알고 난 후에, 그것을 견디면서 현재를 후회없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론 부분에서 니체는 내세에서의 행복 따위는 기대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생명의 불씨를 최대한 지피며 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니체의 '영겁회귀' 사상이다. - 99-

 

니체는 플라톤이나 공자같이 인류를 현혹시키는 그리스도교와 불교, 여기에 소크라테스까지 포함시켜서 퇴폐 또는 타락이라는 의미의 '데카당'이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233-

 

니체는 향상심을 가지고 높은 곳을 향해 날아가는 한 발의 화살이 되라고 말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팔랑거리는 가벼움으로 무작정 비상하기만을 꿈꾸라고 권한 건 아니다. -150-

 

그런데 작가가 전하는 니체의 말을 초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 따라가기에는  버겁다. 웬지 작가의 글을 읽고 있으면 초인이 되어야 할 것 같고 나에게 뭔가 더 채찍질을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가진 그 이상의 것을 해내야 할 것 같다. 가볍게 춤추는 약동하는 삶은 느껴지지 않고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올리는 시지포스만 떠오른다. 천진난만하게 놀고 망각하는 어린아이의 정신을 지닌 니체, 때로는 춤추고 생을 즐기는 니체, 육체를 긍정하는 니체의 모습은 그가 살다간 모습과는 너무 멀어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생을 그토록 긍정하는 글을 쓴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일은 못 볼지도 몰라요 - 960번의 이별, 마지막 순간을 통해 깨달은 오늘의 삶
김여환 지음, 박지운 그림 / 쌤앤파커스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으면서 질질 우는 건 싫어하는데 그래서 이 책을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각오하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하지만 눈물을 펑펑 쏟을 정도의 장면은 거의 없다. 죽음과 죽어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흔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죽음을 어느 정도는 수용하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감정을 격하게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 중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또 한가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사람들을 대하는 작가의 시선이 담담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이런 시선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작가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친구가 너 표정관리 좀 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사람의 표정이 너무 편안헤 보였던 것이다. 작가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그렇게 편안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임종 전에 어머니와 함께 호스피스 병동에 있으면서 충분히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형제들과도 충분히 서로 슬픔을 나누고 교감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과정을 모르는 사람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그런 얼굴일 수 있냐고 질책 아닌 질책을 한 것이었다.

 

 

'죽음'은 한순간이다. 경험상,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 순간은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의 과정, 즉 '죽어감'을 매우 힘들어 한다. '죽어감'은 녹이는 과정이다. 환자는 그 힘든 일을 혼자서 할 수 없다. 남겨진 사람들이 환자와 같이 잘 녹여야 한다.  -179-

 

작가의 가족들은 어머니의 '죽어감'을 함께 잘 녹여냈기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편안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실제로 작가의 어머니도 딸이 호스피스 병동의 의사로 있지만 처음에는 호스피스 병동에 오는 걸 꺼렸다. 결국에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몸이 악화되자 당신 스스로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는 걸 결정했다고 한다. 임종실에 어머니를 모셔두고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막상 호스피스의사가 아닌 입원환자의 보호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괴로움은 또다른 것이었다.

 

'죽음'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다. 몇 해 전부터는 간혹 나보다 어린 사람이 먼저 죽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도 나와 비슷한 나이의 누군가의 죽음을 맞았다. 소식을 듣기 전 한 달 전까지 시골에도 갔다 오고 얼굴색도 많이 좋아졌다고 들었다. 그러다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에도 말기암 환자들이 죽음을 앞두고 그렇게 급속도로 나빠진다고 한다. 죽음 직전의 그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언제나 내게도 죽음이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편이긴 하지만 그건 정말로 생각일 뿐일 것이다. 그 일이 내게 일어났을 때 나는 어떤 죽음을 맞게 될지... 자신이 살아온 모습대로 죽음을 잘 받아들이게 될지 혹은 끝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발버둥치다 가게 될지. 잘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웰다잉은 삶의 완성이 아니라 삶의 결과물이다. 누구나 손쉽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은 더군다나 아니다. 저마다 주어진 힘든 삶을 잘 이겨내야만 누릴 수 있는 삶의 마지막 축복인 것이다. -2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