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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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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한국소설로는 보기 드물게 미스터리 기법이 드러났다. 치밀한 구조와 서사가 이야기의 뼈대며 읽을거리다. 인물의 내면 묘사도 촘촘하다. 자료 조사는 더 꼼꼼하게 했고, 묘사도 한 치 빠진 데가 없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뭘까? 고민했다.

  이런 치밀한 스토리 구조에 어울리지 않게 캐릭터가 빈약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인물들의 세계가 없다는 말이다. 그건 이야기 전체를 이끌고 갈 세계관이 없다는 말이다. 세계관은 주제를 말하는 건데,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건 기본 중에 기본인데 이게 빠졌다.

  그건 인물의 캐릭터가 한 쪽으로 치닫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령을 죽인 최현수의 부인 강은주는 악에 받친 인물이다. 살아온 과정, 대화 하나 하나가 다 악에 찬 말과 행동 뿐이다. 강은주의 내면에는 그악스럼만이 존재한다. 또 딸 세령을 상습 폭행하고 최현수 부자에게 복수하는 인물 오영제의 성격은 자기 마음 대로만 하는 인물 한 가지밖에 묘사되어 있지 않다. 인물마다 한 가지 캐릭터만 가지고 있다.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다. 이 상황에서는 이런 점이, 저 상황에서는 저런 점이 나타나고, 그게 인간을 혼란스럽게 하고 다른 이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스스로 늪에 빠지게 하고 불안하게 해 종내 스스로 정체성을 찾으려고 몸부림 친다. 그런데 이 소설의 인물들은 각각 한 가지 성격만 부여받고 죽을 때까지 그 한 성격만 고수하며 같은 행동만 한다. 사건은 인간의 복잡한 내면이 드러나는 행동 때문에 얽힌다. 인물의 성격이 곧 세계다. 이 소설에서 인물은 작가가 촘촘하게 구성해놓은 그물에 그냥 걸쳐져 있다. 자기 옷도 없이 요소요소에 배치된 레고같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지옥을 가지고 있고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의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아버지 최현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건 아들 최서원이었는데, 그 아들을 지킨 건 아버지가 아니라 아저씨 안승환이었기 때문이었다. 최현수가 수십 명을 죽이면서까지 아들을 지키고 싶었고, 그걸 보여 주고 싶었다면 아들을 지키는 과정은 아버지 최현수가 책임지고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 역할은 한 집에 사는 작가 안승환이 맡았다. 안승환은 모든 불이익과 소외와 왕따와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도 최현수 아들 최서원을 지켜냈는데, 그 동기는 나와 있지 않다. 안승환은 왜 그렇게 험한 꼴을 당하면서 서원을 지켜냈을까?

   이 소설의 촘촘한 디테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잠시도 멈추거나 비껴나가지 않고 이야기 전체를 잘 지켜냈다. 그래서 단순한 스토리지만 서사의 힘으로 끝까지 읽게 만든다.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두 축인 오영제의 복수하기 욕망은 싸이코같은 그의 성격으로 한 축을 세웠다. 또 다른 축인 최현수의 아들 지키기 욕망은 그 역할을 작가인 안승환에게 넘겨 주어 흐지부지해졌다. 안승환은 목숨 걸고 서원을 지켜야할 이유를 부여받지 못한지 삽입된 채 조연 역할만 충실히 했다. 작가는 최현수의 욕망을 더 부각시키고 싶었으리라 본다. 그런 점에서 실패했다. 욕망에 따른 행위를 일찌감치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복합적이지 않은 인물 설정이 이것을 부추겼다. 오영제는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는 인물, 은주는 악에 바친 인물, 최현수는 아들을 지키고 싶지만 내면의 지옥에 끌려다니는 무능한 인물, 안승환은 인물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능한 최현수의 대신 움직이는 인물. 인물은 한 가지 성격뿐이고 그래서 그들의 욕망도 한 가지밖에 없다.

  이야기를 읽으며 미야베 미유키와 비교되었다. 서사로 치면 미미여사나 정유정 작가나 비등하다. 그런데 미미 여사 이야기에는 인물의 성격이 서사를 끌고 나가는 느낌이 드는 건 뭘까? 정유정 작가의 인물에는 인간의 복합성이 없다. 인간은 강하면서도 약하고, 일어섰다가 또 주저앉고, 앞으로 나갔다가 또 쉽게 움츠러 들기도 한다. 정유정 작가의 인물은 강하기만 하다. 약하고 부족하고 모자라서 자칫 부서지기 쉬운 인물들이 아니다. 그래서 소설 속에만 있는 인물들인 것이다. 하지만 미미 여사의 인물은 약하고 모자라고 자책하고 억울하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사건을 일으키고 또 사건을 해결한다. 그것이 독자의 공감을 얻어 책을 덮을 수 없게 만든다.

  다면적인 캐릭터의 부재와 힘. 그것이 세계관을 만들고 없애는 과정. 캐릭터 없이 세계가 있을 수 없는 소설 작법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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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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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 젊은이의 출구 없는 삶을 우울하지 않게 묘사했다. 오히려 자기파괴적인 양상과 대결하는 구도가 신선했다. 자기파괴적인 20대와 대결하는 또다른 20대의 구도가 이 소설의 뼈대다. 똑똑하고 뛰어난 20대가 미래없는 현실에서 미쳐 자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만 또다른 20대는 똑같이 암울하고 똑같이 비전없고 똑같이 막혀 있지만 그래도 그런 방식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도 대안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건 이 책을 읽는 독자와 20대의 몫이다.

  작가는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는 이다. 그런 점에서 장강명의 문제제기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수많은 청년백수의 좌절을 어떤 이는 힐링으로 어떤 이는 종교적 도피로 어떤 이는 환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같이 희망이 있다고 하지만 누구도 구체적이지 않다. 장강명은 희망이고 나발이고를 아예 말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 현실 자체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다.

  남성 작가가 왜 여자를 주인공으로 했을까? 주인공 세연은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 가지는 로망이나 억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모든 남자가 뒤돌아 보는 뛰어난 미모에 전교 1등만 한 두뇌, 사람의 마음을 쥐락 펴락하는 심리술, 자기 말에 동의하게 하는 설득력, 많은 이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카리스마. 깊은 사고력에 기반으로 한 사회의식, 거기다 신비스러움까지. 작가가 묘사한 여자 주인공 세연이다. 하지만 이런 여자가 현실에는 없다. 작가는 처음에 주인공 세연을 미모와 지성을 갖추고 성질까지 있는 완벽한 여자로 묘사했다. 그건 세연의 주장에 남자들이 동의하게 하기 위해 설정한 캐릭터지만, 그래도 억지스럽다.

  주인공 세연은 섹스를 통해 연쇄 자살을 현실화 시키며 자신의 계획에 동의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작가의 여성인식을 볼 수 있다. 자살한 세연 주변의 남자들은 의식과 내면의 과정을 세연과 소통하며 세연의 연쇄 자살 주장에 동의하는 게 아니었다. 세연은 자살 선언을 하고 남자들과 몸을 섞으며 자기를 위해 죽어달라고 간청한다. 그것도 5년이나 뒤에. 비현실적인 설정이다. 세연이 20대들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는 사회인식을 하고 그런 주장을 펼쳤다면, 그 주장에 동의하는 인물도 같은 인식적 맥락에서 행동하고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세연이 세상에 자기 주장을 펼치는 동료를 만든는 방법은 미모를 이용한 섹스다. 세연은 몸을 섞고 명령을 내리고 그들은 세연이 말한 대로 5년 뒤에 죽는다. 한 목숨은 접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치열하고 치밀한 내면의 과정이 없다. 사람을 마치 컴퓨터 부속처럼 여기는 듯한 인간관이 펼쳐진다. 거기다 추라는 여자도 세연의 뜻을 위해 뭐든지 하는 창녀로 만들었다.

  세화가 등장하는 후반으로 갈수록 작가가 품는 여자에 대한 인식은 의심스럽다. 이 모든 일은 세연의 동생 세화가 꾸몄고, 세화는 같은 뜻을 가진 여자 변호사와 팀을 이뤄 세상에 대한 적대를 드러낸다. 장강명에게 여자는 목적을 위해 섹스를 사용하는 인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위험하다. 어쩌면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여자를 대단하게 그려놓았지만, 결국 대단한 이념은 섹스를 통해 현실로 이루어지고, 대단한 여자들은 자기도취로 미쳐가는 인물들이다.

  남성 작가가 여자를 주인공으로 그려내는 건 무척 고단한 시도다. 남자들은 도저히 섬세하고 복잡한 여자의 심리를 묘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표백>의 여성상은 창녀와 성녀가 혼재된 김기덕식 묘사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묘사는 대다수 여성들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고, 그래서 인물의 성격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장강명은 여자를 모른다고 본다. 그러니 창녀나 성녀라는 관념적 여성상밖에 그려내지 못하지. 그게 이 소설의 단점이다. 여자를 모르는 남성 작가는 그냥 주인공을 남자로 묘사하라. 그러면 최소한 인물의 성격에 구멍이 뻥뻥 뚫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물 묘사의 공험함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건, 다른 작가의 글을 인용한 단문들의 의식적인 문장들이 인물의 비어 있는 부분을 일정 부분 대체하고 있다.

  20대 청년 현실이 처절하고 우울하지만 소설에서 그들의 우울이 드러나지 않는 건, 기자인 작가의 문체에 있다고 본다. 모든 묘사가 짧고 간단한 문장이다. 주인공 남자가 알콜 중독으로 들어가는 묘사도 보고하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다. 처절하고 비참한 20대를 감정적으로 묘사하면 실제보다 더 우울해진다. 어쨌든 현업 기자인 작가의 보고서같은 짧고 단명한 문체가 20대 전반의 의식과 흐름을 훑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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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노진선 옮김 / 솟을북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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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과 유머가 넘친다. 재미있게 읽었다. 보기보다 분량이 많았다. 도서동아리 지정 도서라 모임 전날 밤을 새워 읽었다. 동아리에서 원작을 영화한 동명의 영화를 보니 책은 안 읽어 와도 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다 읽고 갔다. 원작을 영화로 만든 건 항상 실망스러웠다. 스토리도 엉성하고. 또 영화 작법과 소설의 텔링은 다르니까. 줄리아 로버츠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니 대중적인 영화라 예상했다. 그래서 책을 꼭 읽고 가려 했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그만한 뭔가가 있으리라 여겼다.

   역시 괜찮았다. 러시아 소설이나 유럽소설처럼 진지하고 깊이 있는 탐구는 없었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진지함과 미국 30대 여성의 자기 탐구는 있었다. 서양문화의 한계를 동양에서 찾으려는 서양문명의 시도 또한 볼 수 있었다. 이혼한 미국인 30대 여성의 자기 길찾기는 그 나이대, 지적인 백인 중산층, 이혼이나 결별 경험이 있는 여성에게는 충분히 스며드는 여지가 많았다. 남자한테 기대지 말고 혼자 서라. 그러면 새로운 로맨스는 또 올 것이고 물질도 얻을 것이고 잃어버린 성공도 돌아올 것이다. 여성으로 제대로 서면 부와 풍요로움과 성도 다시 풍성해질 거라는 환타지를 이 소설은 확실히 준다.

   하지만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단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내면의 신을 만나는 과정이 자신을 만나는 여정임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미국인에게 내면의 신은 무엇일까? 섹스일까, 배우자일까, 물질의 풍요로움인가. 엘리자베스가 결국 만나게 되는 건 새로운 남자다. 일년 반 동안 섹스하지 않고 견디고 버티며 결국 자기와 가장 잘 맞는 남자를 만났고, 그에게 기대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여자로 끝을 맺어 아쉬움이 남았다.

   풍부한 유머가 돋보인다. 거기다 비유법 사용이 적절하고 뛰어나다. 설렁설렁 가는 것같은데도 지성도 풍부하다. 깊이 있는 사고력이 드러나진 않지만 풍부하게 사고한다. 그건 많은 독서에 있다는 걸 알았다. 아주 다양하고 풍요롭게 책을 읽은 것같다. 새벽 5시 반에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 책을 읽은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했다. 책을 많이 읽는다. 특히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어야겠다. 그런 의지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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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일라잇 - 나의 뱀파이어 연인 트와일라잇 1
스테프니 메이어 지음, 변용란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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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먼저 봤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영화와 비교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더구나 그 영화가 매혹적이고 아름다웠고 신비로워 눈을 뗄 수 없을 땐 더욱 그러했다. 어찌 보면 영화가 재미있어 원작을 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건 영화 속 이야기를 다시 훑는 느낌이었다.

  영화로 옮겨진 대다수의 원작을 읽을 때면 이미 봤던 영화에 대해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 경우에는 그랬다. 하지만 영화 트와일라잇은 달랐다. 원작의 스토리로 영화 매체의 특성을 참 잘 살려 만들었다. 영화 트와일라잇은 원작에 없는 신비로운 이미지를 가미시켰다. 늘 비가 내리는 북반부의 축축한 톤을 영화는 잘 살렸다. 양치식물이 온통 뒤덮인 초록색 숲과 물기를 머금어 축축한 나무와 이파리들은 빛을 보지 않고 숨어사는 뱀파이어의 슬픈 운명과 잘 어울렸다. 어둡고 흐린 하늘빛은 창백하리만치 파리한 뱀파이어의 피부색처럼 영화의 색깔로 녹아 있었다. 영화는 특별할 것도 색다를 것도 없는 뱀파이어 이야기를 이렇듯 북반부의 축축한 색깔과 남자 배우의 독특한 생김새를 적절히 섞어 신비롭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원작은 뱀파이어의 야수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꾸려 나갔다. 뱀파이어 에드워드는 체취가 강렬하게 감미로운 인간 벨라를 사랑하지만, 언제든 한 입에 먹어 치울 수 있는 벨라를 자신의 야수성으로 덮치지 않으려 불쌍할 정도로 애쓴다. 인간이었다가 뱀파이어가 되어 100년 동안 야수로 살아온 그는 인간에게 없는 강력한 능력이 있다. 엄청난 힘과 무섭도록 빠른 속도,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과 잘생긴 외모도 있다. 이것으로 그는 100년을 갖은 위험과 방랑과 위협에서 살아남았다. 그에 비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도 지키지 못할 만큼 왜소하다. 벨라는 늘 넘어지고 엎어지며 사고의 위험에 놓여 있고, 경찰서장인 벨라 아버지는 10년 동안 총알 한 번 쏘지 않은 자신의 총을 매일 열심히 닦는다. 이렇듯 에드워드의 야수성은 인간을 앞서지만 그 야수성은 인간을 보호하고 돌보며 착하게 쓰고 있다.

  이렇듯 착한 야수성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보호하지만 에드워드는 여자를 집어삼킬까봐 노심초사한다. 100년을 유지해온 야수성을 조절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그는 인간을 먹지 않는 이유를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가 초조해하고 망설이는 건 사랑하는 여자를 먹게 될까봐, 그래서 그 여자를 잃게 될까봐서가 아니었다. 100년 동안 자신의 무기로 가져온 것들이 결국 자신을 집어삼킬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을 파괴시킬까봐 자기 안에서 정체성의 심한 혼란을 일으킨다. 그는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걸 한순간도 부정하지 않지만, 그의 행위는 이미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야수는 동물의 고기를 먹고 그 피를 마시며 생명을 유지한다. 하지만 눈 앞에 맛있고 먹음직스런 동물 고기가 있는데, 그걸 먹을 수 없다. 에드워드의 불안은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존재의 혼란이다.

  그래서 이야기 전개는 에드워드와 벨라에 대화에 의지해 흘러간다. 야수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에드워드의 고민이 이야기의 초점이다. 뱀파이어의 정체를 아는 벨라와 그는 대화로 소통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사변적이다. 사건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고 주요 등장인물의 내밀한 대화가 중심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야수성을 거세해야 하는 에드워드의 고민은 빼 버렸다. 그 결과 스토리만 남게 되었고, 그들의 사변적인 대화는 흐리고 축축한 이미지 톤으로 대신했다. 그 신비로운 이미지 톤이 결국 영화를 살린 셈이었다.

  에드워드의 고민은 갈등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의 고민은 벨라를 사랑하면서 시작되었지만 그 해결은 벨라와 관계 속에서 풀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벨라를 눈 깜짝할 사이에 덮칠 수 있지만 그 능력을 조절해야 하는 건 오로지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고민은 고민에 그치지 갈등이 될 수 없다. 갈등은 비슷하거나 같은 조건에 있을 때 관계의 힘이나 변수로 서로 영향을 받을 때나 가능한 말이다. 벨라에 대한 에드워드의 고민은 힘 센 사자가 연약한 노루를 좋아해서 생기는 고민이다. 잡아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힘의 관계에서 권력은 늘 사자에게 있고 그래서 일방적이다.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뱀파이어를 그린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트와일라잇은 인간을 한없이 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그리고 있는 점이 색다르다. 야수성은 인간에게도 있다. 전쟁 범죄나 가정 폭력, 성폭력에서 가해자는 야수로 그려지지만 실제로 그들이 야수인 건 아니다. 그들 또한 다른 동물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는 않는다. 그야말로 성질이 특화되었다는 의미다. 트와일라잇에선 인간의 관념적 야수성이 아니라 동물의 물리적 야수성을 다룬다. 동물의 야수성은 인간보다 우월하고 월등하게 뛰어나다.

  뱀파이어 에드워드는 한 순간도 인간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보다 강하니까. 그는 야수성을 버릴 마음이 없다. 하지만 그는 벨라를 잡아먹지 않고 식욕을 조절하는 자신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매번 확인한다. 그것이 에드워드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준다. 하지만 그래서 혼란스럽다. 자신의 강함을 확인하지만 왜 야수성을 억제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100년만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낀 야수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그렇게 사랑은 100년의 야수에게서 야수성을 빼앗았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사랑이란 이렇게 자신의 근원적인 성질을 부정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끝없는 혼란으로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드는가? 그래서 달라진 게 뭐가 있나? 에드워드가 아무리 고민해도 그는 100년 동안 살아왔던 존재의 성질을 버리지 못한다. 그건 물리적이고 생물적인 존재의 현존이니까. 물리적인 신체가 없으면 인간이든 동물이든 죽으니까. 그도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만 결코 자신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사랑의 한계는 딱 여기까지다. 사랑하면 나를 버려야 하고 그러면 나는 사라진다. 결국 자신이 살아있어야 사랑도 가능하다. 내가 있어야 타인도 존재하는 거니까. 때때로 이것을 뛰어넘는 성인, 성녀들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결국 물리적 육체를 가진 범부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누가 자신을 버린 사랑은 아름답다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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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동서 미스터리 북스 52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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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 마쓰모토 세이초의 추리소설 두 개가 실려 있다.

<점과 선>

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치밀했다. 경시청 형사가 범인 찾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 열차 시간표를 구체적으로 사용해서 일본 전역을 왔다갔다 하는 사실적인 묘사가 절묘하다. 뇌물과 배임, 횡령의 공무원 비리 사건을 살인의 배후에 넣어 사회 비판한 점이 탁월하다. 범인은 그 과정에서 소외된 우울한 여성으로 설정하면서 단지 비판을 넘어 사회 속에 있는 인간의 외로움을 드러낸 점이 뛰어나다. 범인은 외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제로의 초점>

범인을 찾는 이, 사건을 찾아가는 이가 실종자의 부인으로 설정하는 것이 돋보인다. 남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이 결혼한 새댁이 1주일만에 남편이 실종되어 찾으면서 남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하나씩 드러내는 점이 뛰어나다. 남편의 흔적을 예리한 느낌으로 하나하나 더듬어 나가는 한가지씩 밝혀내는 점이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결국 핵심은 남편은 어떤 인간이었나, 남편의 비밀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범인은 미군정 당시 매춘여성이었지만 지금은 지방 명사가 된 여성. 과거의 비밀을 감추려 계속 살인을 하는 여성을 설정한 것은 약간 식상했다.

범인을 찾으면서 남편의 동료와 관계, 시아주버니, 동서와 관계, 그들의 인물 묘사를 예리하게 했다. 이들의 작은 몸짓, 눈빛, 말투 등으로 그들의 심리를 묘사한 점이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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