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대 젊은이의 출구 없는 삶을 우울하지 않게 묘사했다. 오히려 자기파괴적인 양상과 대결하는 구도가 신선했다. 자기파괴적인 20대와 대결하는 또다른 20대의 구도가 이 소설의 뼈대다. 똑똑하고 뛰어난 20대가 미래없는 현실에서 미쳐 자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만 또다른 20대는 똑같이 암울하고 똑같이 비전없고 똑같이 막혀 있지만 그래도 그런 방식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도 대안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건 이 책을 읽는 독자와 20대의 몫이다.

  작가는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는 이다. 그런 점에서 장강명의 문제제기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수많은 청년백수의 좌절을 어떤 이는 힐링으로 어떤 이는 종교적 도피로 어떤 이는 환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같이 희망이 있다고 하지만 누구도 구체적이지 않다. 장강명은 희망이고 나발이고를 아예 말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 현실 자체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다.

  남성 작가가 왜 여자를 주인공으로 했을까? 주인공 세연은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 가지는 로망이나 억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모든 남자가 뒤돌아 보는 뛰어난 미모에 전교 1등만 한 두뇌, 사람의 마음을 쥐락 펴락하는 심리술, 자기 말에 동의하게 하는 설득력, 많은 이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카리스마. 깊은 사고력에 기반으로 한 사회의식, 거기다 신비스러움까지. 작가가 묘사한 여자 주인공 세연이다. 하지만 이런 여자가 현실에는 없다. 작가는 처음에 주인공 세연을 미모와 지성을 갖추고 성질까지 있는 완벽한 여자로 묘사했다. 그건 세연의 주장에 남자들이 동의하게 하기 위해 설정한 캐릭터지만, 그래도 억지스럽다.

  주인공 세연은 섹스를 통해 연쇄 자살을 현실화 시키며 자신의 계획에 동의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작가의 여성인식을 볼 수 있다. 자살한 세연 주변의 남자들은 의식과 내면의 과정을 세연과 소통하며 세연의 연쇄 자살 주장에 동의하는 게 아니었다. 세연은 자살 선언을 하고 남자들과 몸을 섞으며 자기를 위해 죽어달라고 간청한다. 그것도 5년이나 뒤에. 비현실적인 설정이다. 세연이 20대들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는 사회인식을 하고 그런 주장을 펼쳤다면, 그 주장에 동의하는 인물도 같은 인식적 맥락에서 행동하고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세연이 세상에 자기 주장을 펼치는 동료를 만든는 방법은 미모를 이용한 섹스다. 세연은 몸을 섞고 명령을 내리고 그들은 세연이 말한 대로 5년 뒤에 죽는다. 한 목숨은 접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치열하고 치밀한 내면의 과정이 없다. 사람을 마치 컴퓨터 부속처럼 여기는 듯한 인간관이 펼쳐진다. 거기다 추라는 여자도 세연의 뜻을 위해 뭐든지 하는 창녀로 만들었다.

  세화가 등장하는 후반으로 갈수록 작가가 품는 여자에 대한 인식은 의심스럽다. 이 모든 일은 세연의 동생 세화가 꾸몄고, 세화는 같은 뜻을 가진 여자 변호사와 팀을 이뤄 세상에 대한 적대를 드러낸다. 장강명에게 여자는 목적을 위해 섹스를 사용하는 인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위험하다. 어쩌면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여자를 대단하게 그려놓았지만, 결국 대단한 이념은 섹스를 통해 현실로 이루어지고, 대단한 여자들은 자기도취로 미쳐가는 인물들이다.

  남성 작가가 여자를 주인공으로 그려내는 건 무척 고단한 시도다. 남자들은 도저히 섬세하고 복잡한 여자의 심리를 묘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표백>의 여성상은 창녀와 성녀가 혼재된 김기덕식 묘사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묘사는 대다수 여성들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고, 그래서 인물의 성격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장강명은 여자를 모른다고 본다. 그러니 창녀나 성녀라는 관념적 여성상밖에 그려내지 못하지. 그게 이 소설의 단점이다. 여자를 모르는 남성 작가는 그냥 주인공을 남자로 묘사하라. 그러면 최소한 인물의 성격에 구멍이 뻥뻥 뚫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물 묘사의 공험함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건, 다른 작가의 글을 인용한 단문들의 의식적인 문장들이 인물의 비어 있는 부분을 일정 부분 대체하고 있다.

  20대 청년 현실이 처절하고 우울하지만 소설에서 그들의 우울이 드러나지 않는 건, 기자인 작가의 문체에 있다고 본다. 모든 묘사가 짧고 간단한 문장이다. 주인공 남자가 알콜 중독으로 들어가는 묘사도 보고하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다. 처절하고 비참한 20대를 감정적으로 묘사하면 실제보다 더 우울해진다. 어쨌든 현업 기자인 작가의 보고서같은 짧고 단명한 문체가 20대 전반의 의식과 흐름을 훑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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