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와일라잇 - 나의 뱀파이어 연인 트와일라잇 1
스테프니 메이어 지음, 변용란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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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먼저 봤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영화와 비교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더구나 그 영화가 매혹적이고 아름다웠고 신비로워 눈을 뗄 수 없을 땐 더욱 그러했다. 어찌 보면 영화가 재미있어 원작을 선택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건 영화 속 이야기를 다시 훑는 느낌이었다.

  영화로 옮겨진 대다수의 원작을 읽을 때면 이미 봤던 영화에 대해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 경우에는 그랬다. 하지만 영화 트와일라잇은 달랐다. 원작의 스토리로 영화 매체의 특성을 참 잘 살려 만들었다. 영화 트와일라잇은 원작에 없는 신비로운 이미지를 가미시켰다. 늘 비가 내리는 북반부의 축축한 톤을 영화는 잘 살렸다. 양치식물이 온통 뒤덮인 초록색 숲과 물기를 머금어 축축한 나무와 이파리들은 빛을 보지 않고 숨어사는 뱀파이어의 슬픈 운명과 잘 어울렸다. 어둡고 흐린 하늘빛은 창백하리만치 파리한 뱀파이어의 피부색처럼 영화의 색깔로 녹아 있었다. 영화는 특별할 것도 색다를 것도 없는 뱀파이어 이야기를 이렇듯 북반부의 축축한 색깔과 남자 배우의 독특한 생김새를 적절히 섞어 신비롭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원작은 뱀파이어의 야수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꾸려 나갔다. 뱀파이어 에드워드는 체취가 강렬하게 감미로운 인간 벨라를 사랑하지만, 언제든 한 입에 먹어 치울 수 있는 벨라를 자신의 야수성으로 덮치지 않으려 불쌍할 정도로 애쓴다. 인간이었다가 뱀파이어가 되어 100년 동안 야수로 살아온 그는 인간에게 없는 강력한 능력이 있다. 엄청난 힘과 무섭도록 빠른 속도, 타인의 생각을 읽는 능력과 잘생긴 외모도 있다. 이것으로 그는 100년을 갖은 위험과 방랑과 위협에서 살아남았다. 그에 비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도 지키지 못할 만큼 왜소하다. 벨라는 늘 넘어지고 엎어지며 사고의 위험에 놓여 있고, 경찰서장인 벨라 아버지는 10년 동안 총알 한 번 쏘지 않은 자신의 총을 매일 열심히 닦는다. 이렇듯 에드워드의 야수성은 인간을 앞서지만 그 야수성은 인간을 보호하고 돌보며 착하게 쓰고 있다.

  이렇듯 착한 야수성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보호하지만 에드워드는 여자를 집어삼킬까봐 노심초사한다. 100년을 유지해온 야수성을 조절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그는 인간을 먹지 않는 이유를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가 초조해하고 망설이는 건 사랑하는 여자를 먹게 될까봐, 그래서 그 여자를 잃게 될까봐서가 아니었다. 100년 동안 자신의 무기로 가져온 것들이 결국 자신을 집어삼킬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을 파괴시킬까봐 자기 안에서 정체성의 심한 혼란을 일으킨다. 그는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걸 한순간도 부정하지 않지만, 그의 행위는 이미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야수는 동물의 고기를 먹고 그 피를 마시며 생명을 유지한다. 하지만 눈 앞에 맛있고 먹음직스런 동물 고기가 있는데, 그걸 먹을 수 없다. 에드워드의 불안은 자신을 부정해야 하는 존재의 혼란이다.

  그래서 이야기 전개는 에드워드와 벨라에 대화에 의지해 흘러간다. 야수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에드워드의 고민이 이야기의 초점이다. 뱀파이어의 정체를 아는 벨라와 그는 대화로 소통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사변적이다. 사건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고 주요 등장인물의 내밀한 대화가 중심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야수성을 거세해야 하는 에드워드의 고민은 빼 버렸다. 그 결과 스토리만 남게 되었고, 그들의 사변적인 대화는 흐리고 축축한 이미지 톤으로 대신했다. 그 신비로운 이미지 톤이 결국 영화를 살린 셈이었다.

  에드워드의 고민은 갈등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의 고민은 벨라를 사랑하면서 시작되었지만 그 해결은 벨라와 관계 속에서 풀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벨라를 눈 깜짝할 사이에 덮칠 수 있지만 그 능력을 조절해야 하는 건 오로지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고민은 고민에 그치지 갈등이 될 수 없다. 갈등은 비슷하거나 같은 조건에 있을 때 관계의 힘이나 변수로 서로 영향을 받을 때나 가능한 말이다. 벨라에 대한 에드워드의 고민은 힘 센 사자가 연약한 노루를 좋아해서 생기는 고민이다. 잡아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힘의 관계에서 권력은 늘 사자에게 있고 그래서 일방적이다.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뱀파이어를 그린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트와일라잇은 인간을 한없이 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그리고 있는 점이 색다르다. 야수성은 인간에게도 있다. 전쟁 범죄나 가정 폭력, 성폭력에서 가해자는 야수로 그려지지만 실제로 그들이 야수인 건 아니다. 그들 또한 다른 동물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는 않는다. 그야말로 성질이 특화되었다는 의미다. 트와일라잇에선 인간의 관념적 야수성이 아니라 동물의 물리적 야수성을 다룬다. 동물의 야수성은 인간보다 우월하고 월등하게 뛰어나다.

  뱀파이어 에드워드는 한 순간도 인간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보다 강하니까. 그는 야수성을 버릴 마음이 없다. 하지만 그는 벨라를 잡아먹지 않고 식욕을 조절하는 자신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매번 확인한다. 그것이 에드워드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준다. 하지만 그래서 혼란스럽다. 자신의 강함을 확인하지만 왜 야수성을 억제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100년만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느낀 야수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 놓였다. 그렇게 사랑은 100년의 야수에게서 야수성을 빼앗았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사랑이란 이렇게 자신의 근원적인 성질을 부정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끝없는 혼란으로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드는가? 그래서 달라진 게 뭐가 있나? 에드워드가 아무리 고민해도 그는 100년 동안 살아왔던 존재의 성질을 버리지 못한다. 그건 물리적이고 생물적인 존재의 현존이니까. 물리적인 신체가 없으면 인간이든 동물이든 죽으니까. 그도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만 결코 자신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사랑의 한계는 딱 여기까지다. 사랑하면 나를 버려야 하고 그러면 나는 사라진다. 결국 자신이 살아있어야 사랑도 가능하다. 내가 있어야 타인도 존재하는 거니까. 때때로 이것을 뛰어넘는 성인, 성녀들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결국 물리적 육체를 가진 범부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누가 자신을 버린 사랑은 아름답다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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