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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최근 한국소설로는 보기 드물게 미스터리 기법이 드러났다. 치밀한 구조와 서사가 이야기의 뼈대며 읽을거리다. 인물의 내면 묘사도 촘촘하다. 자료 조사는 더 꼼꼼하게 했고, 묘사도 한 치 빠진 데가 없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뭘까? 고민했다.
이런 치밀한 스토리 구조에 어울리지 않게 캐릭터가 빈약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인물들의 세계가 없다는 말이다. 그건 이야기 전체를 이끌고 갈 세계관이 없다는 말이다. 세계관은 주제를 말하는 건데,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건 기본 중에 기본인데 이게 빠졌다.
그건 인물의 캐릭터가 한 쪽으로 치닫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령을 죽인 최현수의 부인 강은주는 악에 받친 인물이다. 살아온 과정, 대화 하나 하나가 다 악에 찬 말과 행동 뿐이다. 강은주의 내면에는 그악스럼만이 존재한다. 또 딸 세령을 상습 폭행하고 최현수 부자에게 복수하는 인물 오영제의 성격은 자기 마음 대로만 하는 인물 한 가지밖에 묘사되어 있지 않다. 인물마다 한 가지 캐릭터만 가지고 있다.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다. 이 상황에서는 이런 점이, 저 상황에서는 저런 점이 나타나고, 그게 인간을 혼란스럽게 하고 다른 이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스스로 늪에 빠지게 하고 불안하게 해 종내 스스로 정체성을 찾으려고 몸부림 친다. 그런데 이 소설의 인물들은 각각 한 가지 성격만 부여받고 죽을 때까지 그 한 성격만 고수하며 같은 행동만 한다. 사건은 인간의 복잡한 내면이 드러나는 행동 때문에 얽힌다. 인물의 성격이 곧 세계다. 이 소설에서 인물은 작가가 촘촘하게 구성해놓은 그물에 그냥 걸쳐져 있다. 자기 옷도 없이 요소요소에 배치된 레고같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지옥을 가지고 있고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의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아버지 최현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건 아들 최서원이었는데, 그 아들을 지킨 건 아버지가 아니라 아저씨 안승환이었기 때문이었다. 최현수가 수십 명을 죽이면서까지 아들을 지키고 싶었고, 그걸 보여 주고 싶었다면 아들을 지키는 과정은 아버지 최현수가 책임지고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 역할은 한 집에 사는 작가 안승환이 맡았다. 안승환은 모든 불이익과 소외와 왕따와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도 최현수 아들 최서원을 지켜냈는데, 그 동기는 나와 있지 않다. 안승환은 왜 그렇게 험한 꼴을 당하면서 서원을 지켜냈을까?
이 소설의 촘촘한 디테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잠시도 멈추거나 비껴나가지 않고 이야기 전체를 잘 지켜냈다. 그래서 단순한 스토리지만 서사의 힘으로 끝까지 읽게 만든다.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두 축인 오영제의 복수하기 욕망은 싸이코같은 그의 성격으로 한 축을 세웠다. 또 다른 축인 최현수의 아들 지키기 욕망은 그 역할을 작가인 안승환에게 넘겨 주어 흐지부지해졌다. 안승환은 목숨 걸고 서원을 지켜야할 이유를 부여받지 못한지 삽입된 채 조연 역할만 충실히 했다. 작가는 최현수의 욕망을 더 부각시키고 싶었으리라 본다. 그런 점에서 실패했다. 욕망에 따른 행위를 일찌감치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복합적이지 않은 인물 설정이 이것을 부추겼다. 오영제는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는 인물, 은주는 악에 바친 인물, 최현수는 아들을 지키고 싶지만 내면의 지옥에 끌려다니는 무능한 인물, 안승환은 인물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능한 최현수의 대신 움직이는 인물. 인물은 한 가지 성격뿐이고 그래서 그들의 욕망도 한 가지밖에 없다.
이야기를 읽으며 미야베 미유키와 비교되었다. 서사로 치면 미미여사나 정유정 작가나 비등하다. 그런데 미미 여사 이야기에는 인물의 성격이 서사를 끌고 나가는 느낌이 드는 건 뭘까? 정유정 작가의 인물에는 인간의 복합성이 없다. 인간은 강하면서도 약하고, 일어섰다가 또 주저앉고, 앞으로 나갔다가 또 쉽게 움츠러 들기도 한다. 정유정 작가의 인물은 강하기만 하다. 약하고 부족하고 모자라서 자칫 부서지기 쉬운 인물들이 아니다. 그래서 소설 속에만 있는 인물들인 것이다. 하지만 미미 여사의 인물은 약하고 모자라고 자책하고 억울하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사건을 일으키고 또 사건을 해결한다. 그것이 독자의 공감을 얻어 책을 덮을 수 없게 만든다.
다면적인 캐릭터의 부재와 힘. 그것이 세계관을 만들고 없애는 과정. 캐릭터 없이 세계가 있을 수 없는 소설 작법을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