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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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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한국소설로는 보기 드물게 미스터리 기법이 드러났다. 치밀한 구조와 서사가 이야기의 뼈대며 읽을거리다. 인물의 내면 묘사도 촘촘하다. 자료 조사는 더 꼼꼼하게 했고, 묘사도 한 치 빠진 데가 없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뭘까? 고민했다.

  이런 치밀한 스토리 구조에 어울리지 않게 캐릭터가 빈약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인물들의 세계가 없다는 말이다. 그건 이야기 전체를 이끌고 갈 세계관이 없다는 말이다. 세계관은 주제를 말하는 건데,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건 기본 중에 기본인데 이게 빠졌다.

  그건 인물의 캐릭터가 한 쪽으로 치닫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령을 죽인 최현수의 부인 강은주는 악에 받친 인물이다. 살아온 과정, 대화 하나 하나가 다 악에 찬 말과 행동 뿐이다. 강은주의 내면에는 그악스럼만이 존재한다. 또 딸 세령을 상습 폭행하고 최현수 부자에게 복수하는 인물 오영제의 성격은 자기 마음 대로만 하는 인물 한 가지밖에 묘사되어 있지 않다. 인물마다 한 가지 캐릭터만 가지고 있다.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다. 이 상황에서는 이런 점이, 저 상황에서는 저런 점이 나타나고, 그게 인간을 혼란스럽게 하고 다른 이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스스로 늪에 빠지게 하고 불안하게 해 종내 스스로 정체성을 찾으려고 몸부림 친다. 그런데 이 소설의 인물들은 각각 한 가지 성격만 부여받고 죽을 때까지 그 한 성격만 고수하며 같은 행동만 한다. 사건은 인간의 복잡한 내면이 드러나는 행동 때문에 얽힌다. 인물의 성격이 곧 세계다. 이 소설에서 인물은 작가가 촘촘하게 구성해놓은 그물에 그냥 걸쳐져 있다. 자기 옷도 없이 요소요소에 배치된 레고같다.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지옥을 가지고 있고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의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아버지 최현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건 아들 최서원이었는데, 그 아들을 지킨 건 아버지가 아니라 아저씨 안승환이었기 때문이었다. 최현수가 수십 명을 죽이면서까지 아들을 지키고 싶었고, 그걸 보여 주고 싶었다면 아들을 지키는 과정은 아버지 최현수가 책임지고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 역할은 한 집에 사는 작가 안승환이 맡았다. 안승환은 모든 불이익과 소외와 왕따와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도 최현수 아들 최서원을 지켜냈는데, 그 동기는 나와 있지 않다. 안승환은 왜 그렇게 험한 꼴을 당하면서 서원을 지켜냈을까?

   이 소설의 촘촘한 디테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잠시도 멈추거나 비껴나가지 않고 이야기 전체를 잘 지켜냈다. 그래서 단순한 스토리지만 서사의 힘으로 끝까지 읽게 만든다.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두 축인 오영제의 복수하기 욕망은 싸이코같은 그의 성격으로 한 축을 세웠다. 또 다른 축인 최현수의 아들 지키기 욕망은 그 역할을 작가인 안승환에게 넘겨 주어 흐지부지해졌다. 안승환은 목숨 걸고 서원을 지켜야할 이유를 부여받지 못한지 삽입된 채 조연 역할만 충실히 했다. 작가는 최현수의 욕망을 더 부각시키고 싶었으리라 본다. 그런 점에서 실패했다. 욕망에 따른 행위를 일찌감치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복합적이지 않은 인물 설정이 이것을 부추겼다. 오영제는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는 인물, 은주는 악에 바친 인물, 최현수는 아들을 지키고 싶지만 내면의 지옥에 끌려다니는 무능한 인물, 안승환은 인물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능한 최현수의 대신 움직이는 인물. 인물은 한 가지 성격뿐이고 그래서 그들의 욕망도 한 가지밖에 없다.

  이야기를 읽으며 미야베 미유키와 비교되었다. 서사로 치면 미미여사나 정유정 작가나 비등하다. 그런데 미미 여사 이야기에는 인물의 성격이 서사를 끌고 나가는 느낌이 드는 건 뭘까? 정유정 작가의 인물에는 인간의 복합성이 없다. 인간은 강하면서도 약하고, 일어섰다가 또 주저앉고, 앞으로 나갔다가 또 쉽게 움츠러 들기도 한다. 정유정 작가의 인물은 강하기만 하다. 약하고 부족하고 모자라서 자칫 부서지기 쉬운 인물들이 아니다. 그래서 소설 속에만 있는 인물들인 것이다. 하지만 미미 여사의 인물은 약하고 모자라고 자책하고 억울하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사건을 일으키고 또 사건을 해결한다. 그것이 독자의 공감을 얻어 책을 덮을 수 없게 만든다.

  다면적인 캐릭터의 부재와 힘. 그것이 세계관을 만들고 없애는 과정. 캐릭터 없이 세계가 있을 수 없는 소설 작법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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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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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대 젊은이의 출구 없는 삶을 우울하지 않게 묘사했다. 오히려 자기파괴적인 양상과 대결하는 구도가 신선했다. 자기파괴적인 20대와 대결하는 또다른 20대의 구도가 이 소설의 뼈대다. 똑똑하고 뛰어난 20대가 미래없는 현실에서 미쳐 자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만 또다른 20대는 똑같이 암울하고 똑같이 비전없고 똑같이 막혀 있지만 그래도 그런 방식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도 대안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건 이 책을 읽는 독자와 20대의 몫이다.

  작가는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는 이다. 그런 점에서 장강명의 문제제기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수많은 청년백수의 좌절을 어떤 이는 힐링으로 어떤 이는 종교적 도피로 어떤 이는 환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같이 희망이 있다고 하지만 누구도 구체적이지 않다. 장강명은 희망이고 나발이고를 아예 말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 현실 자체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럽다.

  남성 작가가 왜 여자를 주인공으로 했을까? 주인공 세연은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 가지는 로망이나 억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모든 남자가 뒤돌아 보는 뛰어난 미모에 전교 1등만 한 두뇌, 사람의 마음을 쥐락 펴락하는 심리술, 자기 말에 동의하게 하는 설득력, 많은 이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카리스마. 깊은 사고력에 기반으로 한 사회의식, 거기다 신비스러움까지. 작가가 묘사한 여자 주인공 세연이다. 하지만 이런 여자가 현실에는 없다. 작가는 처음에 주인공 세연을 미모와 지성을 갖추고 성질까지 있는 완벽한 여자로 묘사했다. 그건 세연의 주장에 남자들이 동의하게 하기 위해 설정한 캐릭터지만, 그래도 억지스럽다.

  주인공 세연은 섹스를 통해 연쇄 자살을 현실화 시키며 자신의 계획에 동의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작가의 여성인식을 볼 수 있다. 자살한 세연 주변의 남자들은 의식과 내면의 과정을 세연과 소통하며 세연의 연쇄 자살 주장에 동의하는 게 아니었다. 세연은 자살 선언을 하고 남자들과 몸을 섞으며 자기를 위해 죽어달라고 간청한다. 그것도 5년이나 뒤에. 비현실적인 설정이다. 세연이 20대들이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는 사회인식을 하고 그런 주장을 펼쳤다면, 그 주장에 동의하는 인물도 같은 인식적 맥락에서 행동하고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세연이 세상에 자기 주장을 펼치는 동료를 만든는 방법은 미모를 이용한 섹스다. 세연은 몸을 섞고 명령을 내리고 그들은 세연이 말한 대로 5년 뒤에 죽는다. 한 목숨은 접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치열하고 치밀한 내면의 과정이 없다. 사람을 마치 컴퓨터 부속처럼 여기는 듯한 인간관이 펼쳐진다. 거기다 추라는 여자도 세연의 뜻을 위해 뭐든지 하는 창녀로 만들었다.

  세화가 등장하는 후반으로 갈수록 작가가 품는 여자에 대한 인식은 의심스럽다. 이 모든 일은 세연의 동생 세화가 꾸몄고, 세화는 같은 뜻을 가진 여자 변호사와 팀을 이뤄 세상에 대한 적대를 드러낸다. 장강명에게 여자는 목적을 위해 섹스를 사용하는 인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위험하다. 어쩌면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여자를 대단하게 그려놓았지만, 결국 대단한 이념은 섹스를 통해 현실로 이루어지고, 대단한 여자들은 자기도취로 미쳐가는 인물들이다.

  남성 작가가 여자를 주인공으로 그려내는 건 무척 고단한 시도다. 남자들은 도저히 섬세하고 복잡한 여자의 심리를 묘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표백>의 여성상은 창녀와 성녀가 혼재된 김기덕식 묘사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묘사는 대다수 여성들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고, 그래서 인물의 성격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장강명은 여자를 모른다고 본다. 그러니 창녀나 성녀라는 관념적 여성상밖에 그려내지 못하지. 그게 이 소설의 단점이다. 여자를 모르는 남성 작가는 그냥 주인공을 남자로 묘사하라. 그러면 최소한 인물의 성격에 구멍이 뻥뻥 뚫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물 묘사의 공험함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건, 다른 작가의 글을 인용한 단문들의 의식적인 문장들이 인물의 비어 있는 부분을 일정 부분 대체하고 있다.

  20대 청년 현실이 처절하고 우울하지만 소설에서 그들의 우울이 드러나지 않는 건, 기자인 작가의 문체에 있다고 본다. 모든 묘사가 짧고 간단한 문장이다. 주인공 남자가 알콜 중독으로 들어가는 묘사도 보고하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다. 처절하고 비참한 20대를 감정적으로 묘사하면 실제보다 더 우울해진다. 어쨌든 현업 기자인 작가의 보고서같은 짧고 단명한 문체가 20대 전반의 의식과 흐름을 훑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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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노진선 옮김 / 솟을북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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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성과 유머가 넘친다. 재미있게 읽었다. 보기보다 분량이 많았다. 도서동아리 지정 도서라 모임 전날 밤을 새워 읽었다. 동아리에서 원작을 영화한 동명의 영화를 보니 책은 안 읽어 와도 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다 읽고 갔다. 원작을 영화로 만든 건 항상 실망스러웠다. 스토리도 엉성하고. 또 영화 작법과 소설의 텔링은 다르니까. 줄리아 로버츠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니 대중적인 영화라 예상했다. 그래서 책을 꼭 읽고 가려 했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그만한 뭔가가 있으리라 여겼다.

   역시 괜찮았다. 러시아 소설이나 유럽소설처럼 진지하고 깊이 있는 탐구는 없었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진지함과 미국 30대 여성의 자기 탐구는 있었다. 서양문화의 한계를 동양에서 찾으려는 서양문명의 시도 또한 볼 수 있었다. 이혼한 미국인 30대 여성의 자기 길찾기는 그 나이대, 지적인 백인 중산층, 이혼이나 결별 경험이 있는 여성에게는 충분히 스며드는 여지가 많았다. 남자한테 기대지 말고 혼자 서라. 그러면 새로운 로맨스는 또 올 것이고 물질도 얻을 것이고 잃어버린 성공도 돌아올 것이다. 여성으로 제대로 서면 부와 풍요로움과 성도 다시 풍성해질 거라는 환타지를 이 소설은 확실히 준다.

   하지만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단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내면의 신을 만나는 과정이 자신을 만나는 여정임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미국인에게 내면의 신은 무엇일까? 섹스일까, 배우자일까, 물질의 풍요로움인가. 엘리자베스가 결국 만나게 되는 건 새로운 남자다. 일년 반 동안 섹스하지 않고 견디고 버티며 결국 자기와 가장 잘 맞는 남자를 만났고, 그에게 기대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여자로 끝을 맺어 아쉬움이 남았다.

   풍부한 유머가 돋보인다. 거기다 비유법 사용이 적절하고 뛰어나다. 설렁설렁 가는 것같은데도 지성도 풍부하다. 깊이 있는 사고력이 드러나진 않지만 풍부하게 사고한다. 그건 많은 독서에 있다는 걸 알았다. 아주 다양하고 풍요롭게 책을 읽은 것같다. 새벽 5시 반에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 책을 읽은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했다. 책을 많이 읽는다. 특히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어야겠다. 그런 의지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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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日1食 - 내 몸을 살리는 52일 공복 프로젝트 1日1食 시리즈
나구모 요시노리 지음, 양영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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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된 동기는 바로 저자의 사진 때문이었다. 50대 후반으로 알고 있는 저자가 사진에 30대처럼 보인 순간 나도 모르게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정보에는 여러 가지 매료되는 점이 많다. 지구에 등장한 이래로 인류는 춥고 배고프게 살아왔으니 지금의 포식문화는 자연스런 방식이 아니라는 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그 순간 장수유전자가 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해방처럼 다가왔다.

어릴 적 밥투정하다 굶으면 엄마는 ‘이 한 끼 못 먹으면 영원히 한 끼 잃어버린다’며 한 끼 굶으면 인류 종말이라도 올 것처럼 표현했다. 그래서 세 끼 식사는 당위처럼 늘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어야 되고, 사람은 세 끼 밥심으로 산다’는 명제는 ‘자나 깨나 불조심’ 표어처럼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래서 한 끼를 거르고 난 다음 끼니에는 음식을 맹렬하게 흡입했고, 더부룩한 배가 부담스러웠지만 끼니를 채웠다는 심리적 보상으로 터질 것같은 위장의 고통을 간단히 무시했다.

세 끼 식사는 집단의식같다. 태어날 때부터 세 끼를 먹었고, 그 세 끼가 당연한 줄 알고 여태까지 살았다. 주부들은 하루 세 끼 식사를 꼬박꼬박 준비한다. 가족들한테 아침해 먹이고 돌아서서 밥하고 또 밥하면서 세 끼를 꼬박 만들어냈다. 그런데 하루 한 끼 먹고도 살 수 있다니, 더구나 굶주리고 배고플 때 장수유전자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다니, 1일 1식은 하루 세 끼의 패러다임을 뒤집었다는 데서 음식의 집단의식과 개인 식습관의 혁명이다.

1일 1식 체험에 성공한 알라딘 리뷰를 읽고 용기를 얻어 나도 시도했다. 처음에는 어지럽고 힘이 없어 곧 쓰러질 것같았다. 늘 섭취하던 분량의 음식물이 안 들어오니 눈도 침침하고 귀도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음식물이 줄어든 만큼 먹는 데로 가던 에너지는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대신 책이나 사색, 기도, 명상으로 시간과 에너지가 확장됐다. 놀라운 건 음식물이 부족해 곧 쓰러질 것같던 몸이 서서히 줄어든 음식에 적응했다는 것이다. 신기했다. 동시에 살이 빠져 몸과 마음이 가뿐하고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포식으로 향하는 탐심이 줄어들었다. 먹는 걸 좋아하고 요리하는 것도 무척 좋아하다보니 항상 관심이 맛있는 것에 가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먹는 음식들은 대개 조절하지 못해 넘치도록 먹었다. 위장은 죽겠다고 아우성쳤지만 항상 더 먹지 못해 아쉬웠다. 요즘 식사 횟수를 줄이고 음식량도 줄이고 있다. 1일 1식으로 패러다임을 바꾸니 세 끼 식사에 매달려 먹던 강박적인 식사에서 자유로워졌다. 적절히 배고픈 상태를 유지하면서 먹고 싶을 때 먹다 보니 ‘먹는 것이 주인’이었던 데서 이제는 ‘내가 먹는 것의 주인’으로 방향 전환을 했다.

하지만 포식문화에 오랫동안 적응해 있던 터라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지 못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렇다고 먹지 못한 것이 결핍으로 오지는 않는다. 먹는 건 선택이니까. 결핍에는 보상이 따르지만 한 끼를 먹든, 두 끼를 먹든 먹는 것의 주인으로 내가 결정하는 건 보상이 필요 없는 선택의 문제이니 어쨌든 자유롭다.

한 끼 못 먹으면 한 끼를 영원히 잃어버린다는 끼니의 강박은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던 세대의 강박이다. 전쟁과 기아로 근근이 연명하며 삶조차 잃어버리던 세대에게 세 끼 식사는 생존 수단이며 가족이 결속되는 집단의식이었다.하지만 먹을 것이 넉넉해진 세대에게 하루 세 끼는 강박이 되었다. 끼니 강박이 포식을 낳았고, 지금 여기 포식의 세대에는 또 포식의 강박이 있다. 비만과 다이어트는 포식문화가 낳은 강박이다.

그리고 1일 1식도 비만과 다이어트와 같은 포식문화의 강박이다. 1일 1식은 젊음과 장수의 강박으로 향한다. 그것은 포식문화가 선택한 또 다른 탈출구이다. 음식은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그걸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 젊어지고 싶고 오래 살고 싶은 욕구는 포식문화로 해결되지 못한다. 그래서 한 끼만 먹으라고 권한다. 앞 세대가 생존과 유대로 형성해온 하루 세 끼의 집단의식을 뒤집어 패러다임을 바꾸라고 말한다. 1일 1식은 유전자와 젊음과 장수와 인류의 혹독한 역사를 이론처럼 깔고 있지만 그것 또한 다이어트 강박처럼 포식문화의 또다른 변종이며, 젊어지고 싶고 오래 살고 싶은 욕구가 낳은 충격요법일 뿐이다.  

이제는 젊음과 장수의 강박마저 생겼다. 스스로 먹을 걸 찾아 온 산을 헤매지 않아도 되는 인류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먹을거리 앞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성장만 해오던 자본주의가 몸집이 불어 더 이상 못 자라겠다고 주저앉아 헤매는 것처럼 말이다. 그 안에서 미약한 개인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1일 1식이 주는 젊음과 장수 유전자를 강박적으로 붙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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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전 한 푼 없이 떠난 세계여행
미하엘 비게 지음, 유영미 옮김 / 뜨인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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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 제목을 보았을 때 황당했다. 돈 한 푼 없이 세계 여행을 하다니, 가능한 이야기일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책을 집어들었다.

  가난하고 못 먹던 6~7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생들 사이에서 무전여행은 낭만과 유행을 가진 동경의 대상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무전여행에 도전하고픈 열의가 있었고 미숙하지만 시도는 해봤던 이들이 주변에 있었다. 그때는 젊은이들 사이에 돈이 없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요즘 무전여행이라고 하면 노숙자를 떠올린다. 여행이라면 중형급은 아니지만 준중형급정도 되는 차는 있어야 되고, 콘도 예약은 해놓아야 준비성 있고, 텐트도 각종 장비가 갖춰진 일이백만원 정도급은 되야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각종 맛자랑 프로그램에서 소개하는 현지음식을 찾으려 인터넷 검색 서비스 되는 아이폰은 챙겨야 하고, 즐기기 위해 빵빵한 신용카드는 필수다. 무전여행이 낭만이던 시대에서 불과 2~30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성장 자본주의가 한계에 다다른 2012년의 여행은 돈 없이는 집밖으로 한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되어 있다.

  지은이는 한 마디로 자본에서 벗어난 여행을 계획했고 성공했다. 비행기 표를 구하기 위해 별별 알바를 다 했고, 버스 티켓을 위해 표 파는 이에게 양해를 구했고, 기차에는 그냥 올라탔고, 배에서는 선원으로 일했다. 음식은 식당을 돌며 얻었고, 때로는 쓰레기더미를 뒤지기도 했다. 그는 신용카드를 쓰는것 외에 할 수 있는 건 다 하면서 여비를 마련했다. 돈을 벌려고 가능한 아이디어를 다 짜냈고, 식당에서 음식을 얻을 때도 무전여행의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고 잠자리는 카우치 서퍼의 회원들한테서 도움을 받았다.

  그의 여행기를 읽으며 새로웠던 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계를 도는 무전 여행 계획을 설명했다는 점이었다. 만나는 이들에게 공감을 얻으려 노력했고 실제로 그를 만난 이들의 무수한 공감과 지지와 도움으로 그는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결국 관계를 통해 많은 문제를 해결했고 돈 없이도 세계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의 계획을 비웃고 의심하고 외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지지하고 동의하고 재미있다고 여기며 선뜻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공짜로 뭔가를 얻지 않았다. 이런 이런 계획이 있고 지금 하고 있는데, 당신은 나를 도와줄 수 있나?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이만큼 하겠다는 자세였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었고 그가 연 만큼 세상은 응답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깨달음과 지혜를 얻었다.

   “나는 무게를 최소화하기 위해 애를 쓰며 짐을 꾸릴 때도 빼놓지 않았던 일기장을 배낭에서 꺼냈다. “지금 닭의 모습을 하고 있는 녀석은 본래 ‘매’로 태어났다. 3킬로미터 밖에서 뛰어다니는 토끼와 들쥐를 볼 줄 알았····.” 그 순간, 내게 더욱 분명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불가능한 여행을 떠나기 전, 어떤 힘에 이끌리듯 미친 듯이 일기장에 적어 내려갔던 ‘30센티미터 앞의 모이만 좆는 닭’과 ‘3킬로미터 밖의 토끼와 들쥐를 볼 줄 아는 매’의 차이를 비로소 명확히 이해하게 된 것이다. ‘30미터 앞의 모이만 좆는 닭’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나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고, 내 것을 움켜쥔 채 뭔가 대가가 주어지기 전에는 절대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좁고 닫힌 나의 마음이었다. 반대로 ‘3킬로미터 밖의 토끼와 들쥐를 볼 줄 아는 매’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자기가 가진 것을 남을 위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내어줄 줄 아는 열린 자세와 큰 마음이다. 나는 이제껏 잃고 있었던 그런 ‘매의 시력’을 무모하고 황당해 보였던 150여 일간의 이번 여행을 통해 조금이나마 회복하게 되었고, 열린 자세와 큰마음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가장 크고 값진 열매였다.“

    그의 여행에서 마음에 남는 건, 끝까지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다른 나라에서 굶어죽을 위기에 처할 때 쓰려고 신용카드를 한 장 준비해 갔다. 물론 위기도 많았고 신용카드를 쓸까 말까 고민할 만큼 배고파 탈진할 만큼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지만 위기와 어려움을 끝까지 버티자 어디선가 문이 열렸다. 그렇게 돈 없이 여행하는 원칙을 지킨 자신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졌고 책의 마무리에 그는 이렇게 썼다.

  “무모하고 좌충우돌이었던 나의 여정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내 인생 2막의 새로운 출발선이 될 것이다. 실제 여행에서 그러했듯, 그 새로운 인생의 여행길에서 어쩌면 나는 훨씬 더 많은 문제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세운 새로운 여행 수칙 두 가지. 첫째, ‘그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되 반드시 사람을 통해 해결하기, 또 가급적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 둘째, ‘인생의 문제를 너무 무겁지 않게 하기, 또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되 돈에 의해 나의 인생 방향과 행복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하기”

   오늘의 우리는 여행뿐 아니라 인생 자체가 돈에 휘둘리고 좌우된다. 누구의 인생이랄 것도 없다. 성장 자본주의의 가운데서 돈 없는 인생은 끔찍하다는 걸 누구나 경험한다. 돈이 뿌리요 토대며 근간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저자의 여행기를 읽으며 조금 힘이 났다. 땡전 한 푼 없이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는 저자가 얻은 결론은 인생은 수많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고 그 해결은 돈이 아닌 관계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그의 깨달음이 마음을 움직였다. 세상은 마치 돈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처럼, 돈 없는 인생은 위태로워 곧 쓰러질 것처럼 난리를 치지만 사실 한 사람의 인생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과 방향으로 좌우되는 것이지 돈에 의해 움직이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 책을 덮으며 내 인생의 방향은 어디로 향하는지 깊이 돌아보았다. 돈 때문에 인생 방향과 행복이 흔들리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나를 만났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크다.

  더불어 이 책은 뼛속 깊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소년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 아이들은 미래에 대해 엄청난 불안을 안고 있다. 돈을 많이 벌어 편하게 살고 싶은데 잘 벌지 못하면 어쩌나, 경쟁 사회에서 밀려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으로 공부하고 또 공부하며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그 아이들에게 돈 없이 세계를 돌아다닌 인생의 선배 한 명이 말하길, 돈이라는 불안을 놓고 자신의 의지로 인생을 살 때 행복을 만났던 경험을 이 책을 통해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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