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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합시다
이철희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평점 :
지난 대선은 내 생애 첫 대선이었다.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에 선거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었다. 나의 내일을 위한 내 일, 선거. 4대강, 용산참사, 한진 등 ‘최고의 후보’에서 ‘최악의 대통령’으로 소개된 MB정권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지만 다시 도돌이표처럼 이명박근혜 보수정권10년을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다. 인터넷에 올린 유아인 씨의 글처럼 어쨌든 51대 48, 국민의 반끼리 분열할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대통령이 잘해낼 수 있도록 지지해주자는 의견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자신의 이념, 감정에 휘둘려 현상을 왜곡시키고 본질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정치, 올바르게 다스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책에서 말하는 ‘보통사람’, 일반시민이 지배의 주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의 주체에서 배제되는 것 또한 아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줄 수 있는 후보를 물색하고, 최적의 후보에게 한 표를 행사하고, 그 후보에 당선돼 공직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잘못된 부분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면 총선이나 대선 때 투표용지에 한 번씩 도장이나 찍는 선거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의 주체로 시민이 거듭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본 서용순 교수의 글을 인용해보려고 한다.
<주체성을 잃은 아우성>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의 주체성이란 이러한 자본-의회주의적 담론에서 벗어나 불가능한 것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으로 접근하는 실천적 주체성이다. 말하자면, 이 주체성은 기존의 모든 지배 논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가늠하게 하는 실천적 동력인 것이다.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하루하루 살기 바쁜 이 마당에 무슨 다른 생각을 하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여전히 지배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바디우의 철학이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은 정확하게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의회주의적 논리와 일치한다. 이 실천적 주체성은 열성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저 몇 년에 한 번 투표장에 나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고, 곧 실망하고 마는 자본-의회주의의 정치 행위와는 전혀 다른 실천의 지속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대의제 정치는 순전히 게으름뱅이의 정치다. 이것저것 귀찮고, 살기 바쁘다.정치는 그냥 정치인이 해라. 그렇게 사람들은 직업 정치인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우성을 친다. 그리고 다음 선거를 기다린다. 또 투표하고, 또 실망한다.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대의제 정치를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 구조의 무한 반복일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변화는 오늘날의 대의제 정치라는 유일한 가능성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다른 가능성을 찾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다른 가능성은 오늘날 불가능한 것으로 낙인찍힌 것에서 나온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62호] 2013년 12월 19일 (목)자, 바디우가 우리에게 남긴 것 中-
이 지점에서 이철희 소장의 ‘뭐라도 합시다’는 결국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최적의,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수단인 정치를 통해서 뭐라도 하자는, 시민이 자신의 생계에 쫓겨 혹은 바뀌지 않은 세상 때문에 느낀 정치에 대한 환멸에 의해 형성된 정치적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정치적 주체로 거듭날 것을 각성하는 구호가 될 것이다.
대부분 자기계발서가 저지르는 만행-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부족, 잘못으로 돌리는 우를 이 책은 범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정치의 경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한민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의 경우1인=1표, 선거 안에서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권력이 많든 적든 남자는 여자든 건강한 사람이든 장애인이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치를 외면할수록 누군가는 이득을 본‘다는 이 띠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민주주의란 현 단계에서 최선의 체제 속에서(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목숨을 바쳤는가) 우리가 최소한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 최대한의 피해를 돌아올 수 있다는 섬뜩한 전언이 되는 것이다. 별것도 아닌 ’담벼락에 욕이라도 하는‘, 그렇다는 것은 최소한 정치와 시사에 최소한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므로, 최소한의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내 생활을 바꿀 수 없고, 정책을 바꿀 수 없고, 나라를 바꿀 수 없고,세상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본격 현실정치를 다룬 책은 얼마 본적이 없어 사실 책을 읽기 전에 조금 겁먹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책을 펼치는 순간 소설책 못지않게 가독성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서 깜짝 놀랐다. 한국의 정치사부터 다음 대선에 대한 분석 및 전망까지 정말 알차고 재밌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외국의 사례를 들 때 미국으로 조금 편중된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대한민국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많은 정치학자들이 미국에서 공부하는(이철희 소장도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 경향이 있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책 후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독일식 사회민주주의, 발전보다는 복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최근 흐름에 맞게 유럽의 사례가 좀 더 소개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이 되신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이 책을 읽고 대통령을 향한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주셨으면 한다.(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에 소개된 이신조 소설가의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 서경식 교수의 저서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