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여행 / 어제 여행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자크 루보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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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9월 23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서울국제작가축제에 다녀왔다. 2년마다 하는 행사라고 알고 있다. 한국의 소설가, 시인(극작가가 참여한 적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과 세계 각국의 소설가, 시인이 서울에 모여 작품을 낭독하고 다채로운 공연을 하는 본격 문학축제였다. 점심 시간대부터 저녁 전까지의 시간은 웅진 W스테이지에서 평론가가 사회를 맡고, 한국-외국 작가들이 대담하는 형식으로 채워졌고, 저녁 시간에는 북촌 창우극장과 나무 현대미술 갤러리에서 각각 이틀 간 공연이 이어졌다. 기억에 남는 순간 베스트 5를 꼽으라면 이렇게 열거하고 싶다. 


최고은의 노래 - 김소연 시인의 낭독 

한유주의 <불가능한 동화> 낭독

다니엘 레빈 베커의 '우연히 마주친 음악incidental music' 연극공연 

다와다 요코의 낭독과 북 연주 

터키 작가 르자 크라치의 낭독 및 흡연 및 탈의 및 음주 및 탈의 퍼포먼스(조연호 시인과 강정 시인의 밴드 공연, 이영광 시인의 '유령' 연작 낭독과 판소리 공연을 놓친 게 두고두고 아쉽다 ㅜㅜ).


대체로 대담보다는 공연이 흥미로웠는데 한유주 - 다니엘 레빈 베커의 대담은 특별했다. 1960년에 결성된 프랑스의 실험문학 집단 '울리포'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울리포는 작가뿐만 아니라 수학자, 화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형식적 제약'을 스스로 가해 새로운 문학을 추구하고자 했다. 옛날의 정형시나 시조 같이 정해진 규칙에 맞춰 창작하는게 아니라 작가가 임의로 만든 형식적 제약 안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울리포의 수장 격이라 볼 수 있는 레몽 크노를 이웃블로거 '곰곰생각하는발' 님을 통해 알게 됐다.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의 일부분을 번역해 올려주신 덕분에 울리포란 이름은 모르는 상태에서 '울리포적'인 것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한유주 작가의 경우 울리포의 회원은 아니지만 울리포프레스라는 독특한 출판사를 운영한 경험이 있고(500부 limited edition 자크 드뉘망의 '뿔바지'를 소장하고 계신 분이 관객 석에 있으셨다... 부러워요ㅜ), 미국의 소설사 다니엘 레빈 베커는 울리포의 회원이라고 했다. 다니엘은 울리포란 단체에 대해 설명하면서 조르주 페렉의 작품들을 예로 들었는데 알파벳 e가 없는 단어로만 쓴 작품 <실종>(1969)과 모음 e만 사용해 완성한 작품 <돌아온 사람들>의 존재는 거의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런 '미친' 짓의 시초가 페렉은 아니라고 한 사실이 더 놀라웠는데 아무튼 문학동네의 인문서가에 꽂힌 작가 선집에 포함된 조르주 페렉과 레몽 크노의 작품들이 하루빨리 출간되길 기다리면서 이미 출간된 사물들, w 또는 유년의 기억, 인생사용법, 잠자는 남자, 겨울여행/어제여행,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읽고자 했다. 그 중 예전에 주문해놓은(고로 한 장도 펼쳐보지 않은) <잠자는 남자>를 펼쳤으나 이상 빰치는 혹은 프루스트 빰치는 난해한 문체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페렉과 나는 2달 정도의 조정기간을 들어갔다. 


 두 달만에 페렉을 다시 펼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건 한예종에서 하는 추계특강 세 번째 강의에 페렉을 번역하신 김호영 선생님의 조르주 페렉 강의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 거의 꼬박 하루를 <잠자는 남자>에 '꼬라박아' 겨우 완독해낼 수 있었다. 절대적 고독의 아우라를 풍기는 이방인L'etranger.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이상의 <날개> 등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난해한 문체 때문에 어떤 작품과도 섞이지 않는 강한 개성을 느꼈다.  


 하지만 막상 <잠자는 남자>는 조재룡 평론가가 번역한 작품이어서 그런지 강의 시간에 많이 다뤄지진 않았다. 강의시간이 2시간으로 제한돼 있었기도 하고, 선생님이 감기에 걸리셨는지 몸이 안 좋으셔서 시간여유가 없었다. 대신 페렉의 대표작인 <인생사용법>에 대해선 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바로 어제 인생사용법을 다 읽었는데 인생사용법 작가노트도 꼭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100개의 장으로 구상되었으나 99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이뤄진 점, 라틴제곱 삼각형을 통해 만든 표로 어느 장에 어떤 색깔이 들어가게 할지, 어떤 작가를 인용할지 결정한 점, 인생사용법 작가노트를 출간해 독자들에게 인생사용법이란 대단히 복잡한 구조를 지닌 작품의 수수께끼 같은 탄생비화를 알린 점이 나를 매혹시켰다. 자발적으로 엄숙주의에 빠져 문학을 굉장히 무겁고 진지하게'만' 바라보았던 내게 페렉의 유희정신은 어떤 해방감과 자유로움, 신선한 쾌락이었다. 페렉이 젊은 시절 좌파잡지를 출간하기도 하고, 정치에 꽤 열정적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유대인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은 그였지만 자서전과 소설을 섞은 'w 또는 유년의 기억'을 집필하고 내면의 그늘을 거의 극복하고 한강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빛'이 있는 세계로 넘어왔다고 김호영 선생님은 설명하셨다. 


 기존의 소설이 서사 중심이었다면 페렉의 소설은 묘사 중심이다. 제인 오스틴처럼 내면의 감정묘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페렉은 '사물'에 집중한다(그의 데뷔작 이름은 '사물들'이다!). 그는 묘사의 글쓰기를 통해 침묵하고 있는 사물들에게 말을 걸고, 겉보기에 별 것 없는 것 같고 너무 친숙해서 보이지 않는 사물들이 기억하고 있는 풍요로운 서사를 끌어낸다. 이에 '일상의 사회학'이란 멋진 표현이 붙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기억-과거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탐색했고, 제임스 조이스가 현재의 순간에 현현하는 진리, 소위 에피파니라고 그려내려고자 애썼다면, 조르주 페렉은 맑스적 의미에서 사물화된, 타성에 젖어 생명력을 잃은 일상의 사물들을 살려냄으로써 사물을 통해 일상을 구원하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구원은 너무 거창하다. 페렉이라면 훨씬 ''귀엽게' 표현했을 텐데... 연인끼리 사랑하는 사람의 쇄골, 어깨, 귓볼, 복숭아뼈를 하나하나 호명함으로써 사랑의 구체적인 물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페렉은 일상을 구성하는 사물 하나하의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일상회된 의식이 감각하지 못하는 일상의 풍요로운 속살을 불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연인, 페렉.       


 <겨울여행>은 아주 짧은 분량의 소설이다. 주인공 뱅상 드그라엘이 동료 드니 보라드의 별장에서 무명시인 위고 베르니에가 쓴 <겨울여행> 시집을 발견한다. 출간연도가 1864년이란 걸 확인하고 깜짝 놀란다. 이게 사실이라면 보들레르, 폴 베를렌 같은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들이 위고 베르니레의 표절자인 셈이 밝혀지기 떄문이다. <어제여행>은 자크 루보가 페렉의 <겨울여행>을 이어썼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후 울리포 회원들이 이 패러디를 연작으로 계속 써내려가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됐다고 한다. 


  창작과 표절에 대한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질문을 던지는 겨울여행/어제여행. 피에르 바야르의 <예상표절>이란 작품과 있지만 창조가 불가피하게 모방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창작과 표절 사이의 질문은 끊임없이 제기될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페렉은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기 힘들다며 미래의 글쓰기는 인용의 글쓰기가 될 거라 미국의 한 대학강연에서 말한 적 있다. 페렉보다 앞서 인용의 글쓰기를 시도한 사람으로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책'을 쓰고 싶다던 미완성 저작 아케이트 프로젝트(파사젠베르크)의 저자 발터 벤야민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인용은 기본적으로 기억이라 볼 수 있다. 인용구가 놓인 맥락을 벗겨 현재 글에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인용의 글쓰기는 과거를 재배치해 현재를 재구성하는 기억의 건축술이다. 이미 쓴 텍스트를 바탕으로 축조되는 비평은 그런 의미에서 인용의 글쓰기를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장르라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의 저서 중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제목이 흥미롭다. 아아, 세계를 완전히 분해해서 다시 조립할 수 있다면,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인용한 오마르 카이얌의 구절은 아직까지(아마 앞으로도) 내게 최고의 아포리즘 중 하나이다. 


 페렉이 <W 또는 유년의 기억>에서 인용한 레몽 크노의 문장을 이 글을 닫고자 한다. 


그림자들이 요동치는 저 미친 안개

어떻게 환히 밝힐 수 있을까?


그림자들이 요동치는 저 미친 안개

저기에 나의 미래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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