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 낀 손등에 방금 내려앉았다가 녹은 눈송이가 거의 완전한 정육각형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뒤이어 그 곁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삼분의 일쯤 떨어져나갔지만, 남은 부분은 네 개의 섬세한 가지들을 본래 모습대로 지니고 있었다. 부슬부슬한 그 가지들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소금 알갱이같이 작고 흰 중심이 잠시 남아 있다가 물방울이 되어 맺힌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3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3

그러던 어느 밤 우연히 찾아낸, 간명한 선으로 그린 새의 단면도는 특별히 아름다워 이미지를 저장해두었다. 몸 가운데 정말 풍선 같은 기낭이 있었고, 뼈들에는 타원형의 구멍들이 피리처럼 뚫려 있었다.그래서 그렇게 가벼웠던 거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5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가 내 손등에 내려앉는다. 구름에서부터 천 미터 이상의 거리를 떨어져내린 눈이다. 그사이 얼마나 여러 차례 결속했기에 이렇게 커졌을까? 그런데도 이토록 가벼울까. 이십 그램의 눈송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커다랗게 펼쳐진 형상일까.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5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6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8

엔진음과 함께 버스가 다가온다. 둔한 잔향을 눈송이들이 빨아들인다. 백묵 끝으로 흑판을 긁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버스가 멈춰 선다. 그 잔향도 눈의 정적 속으로 삼켜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2

숲이 소리치며 흔들리고 있다. 나무들이 이고 있던 눈이 흩날린다. 깨어질 것 같은 이마를 차창에 댄 채 나는 해안도로에서 봤던 눈보라를 생각한다. 먼 수평선 위로 흩어지던 구름을, 수만 마리 새떼처럼 낮게 날던 눈송이들을 생각한다. 섬을 삼킬 듯 흰 포말을 몰고 달려들던 잿빛 바다를 생각한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8

울창한 삼나무 숲 사이로 일차선 도로가 휘어든다. 박명 속에 수천 그루의 높은 나무들이 눈발 속에 흔들려, 마치 내 오랜 꿈속 검은 나무들이 아직 살아 있던 풍경 같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8

눈이 떨어진다.

이마와 뺨에.
윗입술에, 인중에.

차갑지 않다.
깃털 같은,
가는 붓끝이 스치는 것 같은 무게뿐이다.

살갗이 얼어붙은 건가.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눈에 덮이고 있나.

하지만 눈꺼풀들은 식지 않은 것 같다. 거기 맺히는 눈송이들만은 차갑다. 선득한 물방울로 녹아 눈시울에 스민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9

턱이 떨린다. 이가 부딪히며 딱, 딱 소리가 난다. 잇새에 혀를 넣으면 베일 것 같다. 젖은 눈꺼풀을 밀어올려 나는 어둠을 본다. 눈을 감았을 때와 똑같은 어둠이다. 보이지 않는 눈송이들이 눈동자로 떨어져 나는 눈을 깜박인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0

내가 느끼기에 이 섬의 바람은 마치 배음처럼 언제나 깔려 있는 무엇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든 온화하게 나무를 쓸고 가든, 드물게 침묵할 때조차 그것의 존재가 느껴졌다. 특히 침엽수들과 아열대 활엽수들이 섞여 자라는 구간에서는, 수종에 따라 다른 속도와 리듬으로 가지와 잎사귀들 사이를 통과하며 형용 못할 화음을 만들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4

시시각각 더 무거운 어둠에 잠기는 눈길에서 나는 그 바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적의 뒷면에 먹 자국처럼 배어 있는, 언제든 형상을 이루며 선명해질 수 있는 그림자 같은 그걸 걸음마다 느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5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9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9

모른다, 새들이 어떻게 잠들고 죽는지.
남은 빛이 사라질 때 목숨도 함께 끊어지는지.
전류 같은 생명이 새벽까지 남아 흐르기도 하는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0

몸을 펼친 채 단박에 얼어붙은 순간들이 결정結晶처럼 빛난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3

모르겠다, 이것이 죽음 직전에 일어나는 일인지.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결정이 된다. 아무것도 더이상 아프지 않다. 정교한 형상을 펼친 눈송이들 같은 수백 수천의 순간들이 동시에 반짝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모든 고통과 기쁨, 사무치는 슬픔과 사랑이 서로에게 섞이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동시에 거대한 성운처럼 하나의 덩어리로 빛나고 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3

가느다란 맥박 같은 감각이 손가락 끝에서 차츰 또렷해진다.
잊고 있던, 손바닥에 남았던 감각도 새로 피가 통하듯 생생해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6

저 너머에 뭔가 있다. 빛을 발하는 무엇인가가.
덤불숲을 가로질러 나가자 길게 휘어진 검푸른 눈길이 이어진다. 숲을 끼고 도는 그 길은 점점 밝아져, 모퉁이의 끝에 이르러서는 선명한 은빛을 발하고 있다. 나는 필사적으로 속력을 낸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가르며 숨차게 나아간다.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다시 눈언저리를 닦는다. 눈을 바로 뜨고 멀리 있는 불빛을 본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7

철문이 활짝 열려, 마치 빛의 섬 같은 그곳에서 불빛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누가 저기 먼저 와 있나, 몸서리치며 생각한 다음 순간 깨닫는다.
그날 이후 아무도 오지 않은 거다.
공방에 불이 켜져 있는데 대답이 없는 게 이상해서 들어와보니 내가 기절해 있었대.
피 흘리는 환자를 급히 트럭 짐칸에 실으며 아무도 불을 끄지 않은 거다. 문을 닫을 겨를조차 없었던 거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바람이 몰아쳐 들어가고 있다. 눈부신 빛을 내쏘는 눈가루들이 함께 공방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8

막 내려앉은 순간 눈송이는 차갑지 않았다. 거의 살갗에 닿지도 않았다. 결정의 세부가 흐릿해지며 얼음이 되었을 때에야 미세한 압력과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얼음의 부피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흰빛이 스러지며 물이 되어 살갗에 맺혔다. 마치 내 피부가 그 흰빛을 빨아들여 물의 입자만 남겨놓은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92

제목이 뭐야?
밀폐용기에 담긴 것을 나무 숟가락으로 덜어 주전자에 넣다 말고 인선이 물었다.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98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02

찰랑이는 촛물을 심지로 빨아들이며 타오르는 불꽃을 나는 보았다. 공방 난로의 격렬하던 불꽃과 비교할 수 없이 작고 고요한 것이었다. 너울대는 불꽃 안쪽에서 파르스름한 심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맥이 뛰는 씨앗 같았다. 가물거리는 주황빛 가장자리까지 고동이 번지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09

음미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 찰나의 감각이어서, 기억하기 위해선 여러 차례 더 빠르게 반복해야 했다. 각질과 표피를 건너 예리한 화기가 진피로 스며들기 직전까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10

새 그림자가 흰 벽 위로 소리 없이 날고 있었다. 예닐곱 살 아이의 몸피만큼 커진 그림자였다. 꿈틀거리는 날개 근육과 반투명한 깃털들의 세부가 확대경을 통과한 것처럼 선명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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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성 위경련 때문에 단골 병원에 가기 위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팔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어기적어기적 건널 때, 오지 않는 약속 상대를 기다리며 소란한 카페 구석에 웅크려 앉아 문 쪽을 바라볼 때, 또다른 악몽에서 깨어나 고개를 떨며 천장의 어둠을 올려다볼 때, 그 모르는 벌판에 눈이 내리고 검은 나무들 사이로 바다가 밀려들어온다고.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47

하지만 바람이 다시 몰아치기 시작하면 마치 거대한 팝콘 기계가 허공에서 맹렬히 돌아가는 듯 눈송이들이 솟구쳐오른다. 눈이란 원래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지상에서부터 끝없이 생겨나 허공으로 빨려 올라가는 거였던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62

바람이 센 곳이라 그렇대, 어미들이 이렇게 짧은 게. 바람소리가 말끝을 끊어가버리니까.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76

결국 집을 나온 건 살고 싶어서였어. 그러지 않으면 그 불덩이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80

부리가 젖은 운동화 속 발가락들이 시렸다. 파카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주먹들이 딱딱하게 얼었다. 머리에 더 눈이 쌓여 이젠 마치 흰 털실로 뜬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이는 인선이 입을 벌려 말할 때마다 반투명한 불꽃 같은 입김이 흘러나와 어둠 속에 번졌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88

오직 그 눈에 대해서만 말했을 뿐이야. 수십 년 전 생시에 보았고 얼마 전 꿈에서 보았던, 녹지 않는 그 눈송이들의 인과관계가 당신의 인생을 꿰뚫는 가장 무서운 논리이기라도 한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0

계속해서 엄마는 말했어.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헌디 너가 그날 밤 꿈에, 그추룩 얼굴에 눈이 히영하게 묻엉으네…… 내가 새벡에 눈을 뜨자마자 이 애기가 죽었구나, 생각을 했주. 허이고, 나는 너가 죽은 줄만 알아그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0

젖은 아스팔트 위로 눈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것들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그래야지……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맺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없이 사라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3

더이상 달리지 않는다. 눈송이들이 떨어지는 속도가 시간의 흐름과 일치하는 것 같은, 내 걸음도 거기 맞춰야 할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나는 걷는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6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7

밖에 눈이 오고 있을지도 몰라.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지루한 방학숙제를 하다 말고 방안에 눈이 내린다고 생각했다. 방금 거스러미를 뜯어낸 손 위로. 머리카락과 지우개 가루가 흩어져 있는 장판 바닥 위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8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9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99

마침내 노인이 입술을 떼었다. 통역자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놀라운 집중력으로 오직 카메라만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좋아. 내가 이야기해줄게.
카메라 렌즈를 꿰뚫고, 그 뒤에 서 있었을 인선의 눈까지 관통해 날아온 그 눈의 빛이 내 눈을 찔렀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02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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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듬지가 잘린 단면마다 소금 결정 같은 눈송이들이 내려앉은 검은 나무들과 그 뒤로 엎드린 봉분들 사이를 나는 걸었다. 문득 발을 멈춘 것은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로 자작자작 물이 밟혔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어느 틈에 발등까지 물이 차올랐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은 바다였다. 지금 밀물이 밀려오는 거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8

스무 날 가까이 열대야가 계속되던 무렵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거실의 고장난 에어컨 아래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찬물 샤워를 이미 수차례 했지만, 땀에 젖은 몸은 마룻바닥에 등을 대고 있어도 식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0

감은 눈꺼풀 속으로 별안간 그 벌판이 밀려들어왔다.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 위로 흩어지던 눈발이, 잘린 우듬지마다 소금처럼 쌓여 빛나던 눈송이들이 생시처럼 생생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0

아니, 그건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 같은 거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칼이?사람의 힘으로 들어올릴 수도 없을 무거운 쇳날이?허공에 떠서 내 몸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마주 올려다보며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0

다만 개인적인 예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물에 잠긴 무덤들과 침묵하는 묘비들로 이뤄진 그곳이, 앞으로 남겨질 내 삶을 당겨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바로 지금을.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

그 모든 안간힘이 지나간 늦봄, 서울 근교의 이 복도식 아파트로 세를 얻어 들어온 거였다. 더이상 돌볼 가족도, 일을 할 직장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5

그걸 쓰려면 생각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모든 게 부스러지기 시작했는지.
언제가 갈림길이었는지.
어느 틈과 마디가 임계점이었는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5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5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5

모르는 여자들과 함께, 그녀들의 아이들과 손을 나눠 잡고 서로 도우며 우물 안쪽 벽을 타고 내려갔다. 아래쪽은 안전할 줄 알았는데, 예고 없이 수십 발의 총탄이 우물 입구에서 쏟아져내렸다. 여자들이 아이들을 힘껏 안아 품속에 숨겼다. 바싹 마른 줄 알았던 우물 바닥에서 고무를 녹인 듯 끈끈한 풀물이 차올랐다. 우리들의 피와 비명을 삼키기 위해.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9

우듬지가 잘린 검은 나무들 위로 눈부신 육각형의 결정들이 맺혔다 부스러진다. 발등까지 물에 잠긴 내가 놀라 뒤돌아본다. 바다가, 거기 바다가 밀려들어온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2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인사를, 제대로.
물잔에 빠뜨린 각설탕처럼 내 사적인 삶이 막 부스러지기 시작하던 지난해의 여름, 이후의 진짜 작별들이 아직 전조에 불과했던 시기에 ‘작별’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었다. 진눈깨비 속에 녹아서 사라지는 눈–여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마지막 인사일 순 없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4

아직 무사해.
거대하고 육중한 칼이 허공에서 나를 겨눈 것 같은 전율 속에서, 눈을 부릅뜸으로써 그 벌판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은 채 나는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5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6

그러나 여전히 깊이 잠들지 못한다.
여전히 제대로 먹지 못한다.
여전히 숨을 짧게 쉰다.
나를 떠난 사람들이 못 견뎌했던 방식으로 살고 있다, 아직도.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7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아 쓴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모두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8

흰 실밥 같은 눈송이들이 긋고 지나가는 허공의 길들을 얼마간 지켜보다 주변을 둘러보자, 통증과 인내에 익숙해진 듯 공허한 얼굴의 환자들과 보호자들 모두 침묵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44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이를테면 고통. 유서를 완성하겠다는 모순된 의지로 지난 몇 달을 버텨왔다는 것. 자신의 삶이라는 지옥에서 잠시 빠져나와 친구를 병문안하고 있는 이 순간이 기이하게 낯설고 선명하게 느껴진다는 것.
하지만 인선이 이상하다고 한 말은 다른 의미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46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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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2년. 학교에 다니는 모든 아이들이 아는 연도다. 컴퓨터의 힘이 무한해진 해, 또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무한에 가까워진 해였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게 된 해였다. 〈클라우드〉는 〈선더헤드〉로 진화했고, 알 수 있는 모든 것의 전부가 이제 선더헤드의 무한에 가까운 메모리 속에 담겨,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 <수확자>, 닐 셔스터먼 / 이수현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3584 - P58

2042년은 우리가 죽음을 정복한 해이며, 숫자 세기를 그만둔 해이다. 물론 그 후에도 수십 년을 더 세기는 했지만, 불사(不死)를 얻은 순간부터 지나가는 시간은 의미를 잃었다. - <수확자>, 닐 셔스터먼 / 이수현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3584 - P59

소년은 이름이 로언이라고 했고,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는데 조명이 어두워지며 커튼이 올라가더니, 대화를 이어 가기에는 너무 크고 풍성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오페라는 베르디의 「라 포르차 델 데스티노La Forza del Destino」, 즉 〈운명의 힘〉이었지만, 두 사람을 이 자리에 던져 놓은 것은 분명 운명이 아니라 아주 계획적인 누군가의 손이었다. - <수확자>, 닐 셔스터먼 / 이수현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3584 - P67

자신의 인생이 어떤 길을 갈지 확신한 적은 없었다. 아마 대학에 가고, 뭔가 재미있는 분야에서 학위를 딴 후에 안정된 직업에 정착해서, 편안한 남자를 만나고, 점잖고 평범한 삶을 살겠거니 했다. 그런 삶을 갈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예상했다. 시트라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정말로 열망할 만한 것이 없는 시대에 삶은 주로 유지 보수였다. 영원한 유지 보수. - <수확자>, 닐 셔스터먼 / 이수현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3584 - P85

결국 결정을 내려 준 것은 그림이었다. 그날 밤 로언의 꿈에는 회화 캔버스들이 어른거렸다. 사망 시대의 삶은 어땠을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열정이 가득했으리라. 신앙을 낳을 정도의 두려움. 고양감에 의미를 부여하는 절망. 그 시절에는 겨울도 더 춥고 여름은 더 더웠다고들 했다. - <수확자>, 닐 셔스터먼 / 이수현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3584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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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성장은 완료되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인류의 경우 배울 것은 더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 존재에 대해 더 해독할 것이 없었다. 그것은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사실 크게 보면 모두가 똑같이 쓸모가 없었다. 수확자 패러데이의 말은 그런 뜻이었고, 시트라는 어느 선까지는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기에 격분했다. - <수확자>, 닐 셔스터먼 / 이수현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3584 - P25

우리 대부분에게는 그렇게 안전하지 못한 세상이란 상상하기도 어렵다. 보이지도 않고, 계획에도 없는, 구석구석에 위험이 숨어 있는 세상이라니. 그 모든 것이 이제는 과거의 일이지만, 단순한 진실 하나만은 남아 있다. 사람들은 죽어야 한다는 사실.
그건 우리가 다른 어딘가로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수확자>, 닐 셔스터먼 / 이수현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3584 - P32

예전에는 인생의 끝이 자연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말을 훔쳐 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독점했다. 이제는 우리가 죽음의 유일한 배급자다. - <수확자>, 닐 셔스터먼 / 이수현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3584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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