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듬지가 잘린 단면마다 소금 결정 같은 눈송이들이 내려앉은 검은 나무들과 그 뒤로 엎드린 봉분들 사이를 나는 걸었다. 문득 발을 멈춘 것은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 아래로 자작자작 물이 밟혔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어느 틈에 발등까지 물이 차올랐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지평선인 줄 알았던 벌판의 끝은 바다였다. 지금 밀물이 밀려오는 거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8

스무 날 가까이 열대야가 계속되던 무렵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거실의 고장난 에어컨 아래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찬물 샤워를 이미 수차례 했지만, 땀에 젖은 몸은 마룻바닥에 등을 대고 있어도 식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0

감은 눈꺼풀 속으로 별안간 그 벌판이 밀려들어왔다.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 위로 흩어지던 눈발이, 잘린 우듬지마다 소금처럼 쌓여 빛나던 눈송이들이 생시처럼 생생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0

아니, 그건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 같은 거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칼이?사람의 힘으로 들어올릴 수도 없을 무거운 쇳날이?허공에 떠서 내 몸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마주 올려다보며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0

다만 개인적인 예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물에 잠긴 무덤들과 침묵하는 묘비들로 이뤄진 그곳이, 앞으로 남겨질 내 삶을 당겨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바로 지금을.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

그 모든 안간힘이 지나간 늦봄, 서울 근교의 이 복도식 아파트로 세를 얻어 들어온 거였다. 더이상 돌볼 가족도, 일을 할 직장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5

그걸 쓰려면 생각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모든 게 부스러지기 시작했는지.
언제가 갈림길이었는지.
어느 틈과 마디가 임계점이었는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5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5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5

모르는 여자들과 함께, 그녀들의 아이들과 손을 나눠 잡고 서로 도우며 우물 안쪽 벽을 타고 내려갔다. 아래쪽은 안전할 줄 알았는데, 예고 없이 수십 발의 총탄이 우물 입구에서 쏟아져내렸다. 여자들이 아이들을 힘껏 안아 품속에 숨겼다. 바싹 마른 줄 알았던 우물 바닥에서 고무를 녹인 듯 끈끈한 풀물이 차올랐다. 우리들의 피와 비명을 삼키기 위해.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9

우듬지가 잘린 검은 나무들 위로 눈부신 육각형의 결정들이 맺혔다 부스러진다. 발등까지 물에 잠긴 내가 놀라 뒤돌아본다. 바다가, 거기 바다가 밀려들어온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2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인사를, 제대로.
물잔에 빠뜨린 각설탕처럼 내 사적인 삶이 막 부스러지기 시작하던 지난해의 여름, 이후의 진짜 작별들이 아직 전조에 불과했던 시기에 ‘작별’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었다. 진눈깨비 속에 녹아서 사라지는 눈–여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마지막 인사일 순 없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4

아직 무사해.
거대하고 육중한 칼이 허공에서 나를 겨눈 것 같은 전율 속에서, 눈을 부릅뜸으로써 그 벌판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은 채 나는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5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6

그러나 여전히 깊이 잠들지 못한다.
여전히 제대로 먹지 못한다.
여전히 숨을 짧게 쉰다.
나를 떠난 사람들이 못 견뎌했던 방식으로 살고 있다, 아직도.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7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아 쓴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모두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8

흰 실밥 같은 눈송이들이 긋고 지나가는 허공의 길들을 얼마간 지켜보다 주변을 둘러보자, 통증과 인내에 익숙해진 듯 공허한 얼굴의 환자들과 보호자들 모두 침묵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44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이를테면 고통. 유서를 완성하겠다는 모순된 의지로 지난 몇 달을 버텨왔다는 것. 자신의 삶이라는 지옥에서 잠시 빠져나와 친구를 병문안하고 있는 이 순간이 기이하게 낯설고 선명하게 느껴진다는 것.
하지만 인선이 이상하다고 한 말은 다른 의미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46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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