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 낀 손등에 방금 내려앉았다가 녹은 눈송이가 거의 완전한 정육각형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뒤이어 그 곁에 내려앉은 눈송이는 삼분의 일쯤 떨어져나갔지만, 남은 부분은 네 개의 섬세한 가지들을 본래 모습대로 지니고 있었다. 부슬부슬한 그 가지들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소금 알갱이같이 작고 흰 중심이 잠시 남아 있다가 물방울이 되어 맺힌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3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3

그러던 어느 밤 우연히 찾아낸, 간명한 선으로 그린 새의 단면도는 특별히 아름다워 이미지를 저장해두었다. 몸 가운데 정말 풍선 같은 기낭이 있었고, 뼈들에는 타원형의 구멍들이 피리처럼 뚫려 있었다.그래서 그렇게 가벼웠던 거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5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가 내 손등에 내려앉는다. 구름에서부터 천 미터 이상의 거리를 떨어져내린 눈이다. 그사이 얼마나 여러 차례 결속했기에 이렇게 커졌을까? 그런데도 이토록 가벼울까. 이십 그램의 눈송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커다랗게 펼쳐진 형상일까.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5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6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18

엔진음과 함께 버스가 다가온다. 둔한 잔향을 눈송이들이 빨아들인다. 백묵 끝으로 흑판을 긁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버스가 멈춰 선다. 그 잔향도 눈의 정적 속으로 삼켜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2

숲이 소리치며 흔들리고 있다. 나무들이 이고 있던 눈이 흩날린다. 깨어질 것 같은 이마를 차창에 댄 채 나는 해안도로에서 봤던 눈보라를 생각한다. 먼 수평선 위로 흩어지던 구름을, 수만 마리 새떼처럼 낮게 날던 눈송이들을 생각한다. 섬을 삼킬 듯 흰 포말을 몰고 달려들던 잿빛 바다를 생각한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8

울창한 삼나무 숲 사이로 일차선 도로가 휘어든다. 박명 속에 수천 그루의 높은 나무들이 눈발 속에 흔들려, 마치 내 오랜 꿈속 검은 나무들이 아직 살아 있던 풍경 같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8

눈이 떨어진다.

이마와 뺨에.
윗입술에, 인중에.

차갑지 않다.
깃털 같은,
가는 붓끝이 스치는 것 같은 무게뿐이다.

살갗이 얼어붙은 건가.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눈에 덮이고 있나.

하지만 눈꺼풀들은 식지 않은 것 같다. 거기 맺히는 눈송이들만은 차갑다. 선득한 물방울로 녹아 눈시울에 스민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29

턱이 떨린다. 이가 부딪히며 딱, 딱 소리가 난다. 잇새에 혀를 넣으면 베일 것 같다. 젖은 눈꺼풀을 밀어올려 나는 어둠을 본다. 눈을 감았을 때와 똑같은 어둠이다. 보이지 않는 눈송이들이 눈동자로 떨어져 나는 눈을 깜박인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0

내가 느끼기에 이 섬의 바람은 마치 배음처럼 언제나 깔려 있는 무엇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든 온화하게 나무를 쓸고 가든, 드물게 침묵할 때조차 그것의 존재가 느껴졌다. 특히 침엽수들과 아열대 활엽수들이 섞여 자라는 구간에서는, 수종에 따라 다른 속도와 리듬으로 가지와 잎사귀들 사이를 통과하며 형용 못할 화음을 만들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4

시시각각 더 무거운 어둠에 잠기는 눈길에서 나는 그 바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적의 뒷면에 먹 자국처럼 배어 있는, 언제든 형상을 이루며 선명해질 수 있는 그림자 같은 그걸 걸음마다 느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5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9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39

모른다, 새들이 어떻게 잠들고 죽는지.
남은 빛이 사라질 때 목숨도 함께 끊어지는지.
전류 같은 생명이 새벽까지 남아 흐르기도 하는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0

몸을 펼친 채 단박에 얼어붙은 순간들이 결정結晶처럼 빛난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3

모르겠다, 이것이 죽음 직전에 일어나는 일인지.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결정이 된다. 아무것도 더이상 아프지 않다. 정교한 형상을 펼친 눈송이들 같은 수백 수천의 순간들이 동시에 반짝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모든 고통과 기쁨, 사무치는 슬픔과 사랑이 서로에게 섞이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동시에 거대한 성운처럼 하나의 덩어리로 빛나고 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3

가느다란 맥박 같은 감각이 손가락 끝에서 차츰 또렷해진다.
잊고 있던, 손바닥에 남았던 감각도 새로 피가 통하듯 생생해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6

저 너머에 뭔가 있다. 빛을 발하는 무엇인가가.
덤불숲을 가로질러 나가자 길게 휘어진 검푸른 눈길이 이어진다. 숲을 끼고 도는 그 길은 점점 밝아져, 모퉁이의 끝에 이르러서는 선명한 은빛을 발하고 있다. 나는 필사적으로 속력을 낸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가르며 숨차게 나아간다.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다시 눈언저리를 닦는다. 눈을 바로 뜨고 멀리 있는 불빛을 본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7

철문이 활짝 열려, 마치 빛의 섬 같은 그곳에서 불빛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누가 저기 먼저 와 있나, 몸서리치며 생각한 다음 순간 깨닫는다.
그날 이후 아무도 오지 않은 거다.
공방에 불이 켜져 있는데 대답이 없는 게 이상해서 들어와보니 내가 기절해 있었대.
피 흘리는 환자를 급히 트럭 짐칸에 실으며 아무도 불을 끄지 않은 거다. 문을 닫을 겨를조차 없었던 거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바람이 몰아쳐 들어가고 있다. 눈부신 빛을 내쏘는 눈가루들이 함께 공방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48

막 내려앉은 순간 눈송이는 차갑지 않았다. 거의 살갗에 닿지도 않았다. 결정의 세부가 흐릿해지며 얼음이 되었을 때에야 미세한 압력과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얼음의 부피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흰빛이 스러지며 물이 되어 살갗에 맺혔다. 마치 내 피부가 그 흰빛을 빨아들여 물의 입자만 남겨놓은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92

제목이 뭐야?
밀폐용기에 담긴 것을 나무 숟가락으로 덜어 주전자에 넣다 말고 인선이 물었다.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198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02

찰랑이는 촛물을 심지로 빨아들이며 타오르는 불꽃을 나는 보았다. 공방 난로의 격렬하던 불꽃과 비교할 수 없이 작고 고요한 것이었다. 너울대는 불꽃 안쪽에서 파르스름한 심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맥이 뛰는 씨앗 같았다. 가물거리는 주황빛 가장자리까지 고동이 번지는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09

음미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 찰나의 감각이어서, 기억하기 위해선 여러 차례 더 빠르게 반복해야 했다. 각질과 표피를 건너 예리한 화기가 진피로 스며들기 직전까지.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10

새 그림자가 흰 벽 위로 소리 없이 날고 있었다. 예닐곱 살 아이의 몸피만큼 커진 그림자였다. 꿈틀거리는 날개 근육과 반투명한 깃털들의 세부가 확대경을 통과한 것처럼 선명했다.

-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